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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린레이 Oct 31. 2022

<죽음의 수용소에서> 리뷰: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1946) - 삶을 살아가는 법


미디어: 책

제목: 죽음의 수용소에서 (Ein Psycholog erlebt das Konzentrationslager)

지은이: 빅터 프랭클 (Victor Frankl)

번역: 정순희

출판사: 제일출판사

출간연도: 1999

원문 출간연도: 1946

페이지: 253p



요새 미래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당장 대학원 졸업 후 무엇을 할까부터 내 인생의 최종 목표는 무엇일까까지 그 어느 것도 명확하게 보이는 것은 없었다. 내 앞에 끼인 안개를 걷어보려 해도 걷히기는커녕 더욱 짙어질 뿐이었다. 해답도 없고 심연으로 빠질 뿐인 고민이라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우연찮은 계기로 친한 누나에게 털어놓게 되었다. 내 고민을 듣더니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이 도움이 될 것 같다며 나에게 추천해주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정신과 의사가 쓴 책이라고 소개받았고 흥미가 생겨서 읽어보기로 했다. 나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도서관에서 빌렸는데, 찢어지고 너덜너덜해진 책을 보면서 심상치 않은 고전임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여러 권을 조금씩 읽는 성향이어서 한 권을 완독 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거의 1~2주 만에 완독을 하였다. 책을 덮고난 후, 눈앞에 있는 안개는 걷히지 않았지만 나는 자그마한 등불을 얻을 수 있었다. 등불의 빛이 안개를 감싸고돌자 내 앞을 막아섰던 안개는 아름다운 오로라로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구는 <죽음의 수용소에서>가 내 마음속에 남겨 준 메세지이자 <죽음의 수용소에서> 원서 제목 <Nevertheless, say yes to life>의 일부이기도 하다.


나에게는 부정적인 감정이 한순간 머릿속을 지배할 때 감정을 역전시켜버리는 마법의 문구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하스스톤이라는 게임에서 나오는 캐릭터 말퓨리온의 대사 "실수할 수도 있지"이다. 나의 잘못된 선택으로 결과가 썩 좋지 않을 때, 나는 이것이 이미 벌어진 일이더라도 자꾸 곱씹게 되고 후회하곤 한다. 이 굴레에 얽혀있을 때 육성으로 "실수할 수도 있지"라고 읊조리면 마음이 안정되면서 모든 부정적인 감정이 순간 해소된다. 어찌 보면 운칠기삼의 하스스톤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말퓨리온의 이 대사를 들을 수 있어서가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나에게 있어 "실수할 수도 있지"와 똑같은 역할을 해주었다. 다른 점이라고는 내가 어떤 상황에 있냐는 것이다. 전자는 내가 생각지도 못한 환경에 있을 때, 후자는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잘 나타내는 이야기가 절묘한 타이밍에 등장한다. 저자는 중간에 우리는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고 말을 하며, 끝을 테헤란에서의 죽음이라는 이야기로 맺는다. 한창 '이게 무슨 소리지?' 하면서 머리를 골골 싸매고 있을 때, 테헤란에서의 죽음의 이야기가 등장함으로써 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비로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돈 많고 권력 있는 페르시아 사람이 어느 날 하인과 함께 정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인이 비명을 지르며 방금 죽음의 신을 보았다고 했다. 죽음의 신이 자기를 데려가겠다고 위협했다는 것이다. 하인은 주인에게 말 중에서 가장 빠른 말을 빌려달라고 애원했다. 그 말을 타고 오늘 밤 안으로 갈 수 있는 테헤란으로 도망치겠다고 했다. 주인은 승낙을 했다.
하인이 허겁지겁 말을 타고 떠났다. 주인이 발길을 돌려 자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죽음의 신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러자 주인이 죽음의 신에게 물었다.
“왜 그대는 내 하인을 겁주고 위협했는가?”
그러자 죽음의 신이 대답했다.
“위협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오늘 밤 그를 테헤란에서 만나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그가 아직 여기 있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했을 뿐이지요.”


나는 언젠가부터 내 인생을 내가 개척해나갈 수 없다고 느꼈다. 인생은 내가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게임과 같이 내게 주어질 환경은 이미 정해져 있고 그 환경 속에서 선택지를 고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테헤란에서의 죽음 이야기는 내 가치관을 대변하는 훌륭한 이야기였기에 나중에 내 생각을 멋있게 전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미묘한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다.


테헤란에서의 죽음 이야기를 내 가치관에 빗대어 보면 하인은 테헤란을 도망친다는 선택지를 고른 것이고 죽음의 신은 주어진 환경인 것이다. 더 놀라운 건 페르시아 사람 또한 주어진 환경에서 어떠한 선택을 하는데, 그 선택은 무려 죽음의 신에게 말을 건다는 선택지이다. 일반적으로 죽음의 신을 만나면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이 생각이 "나는 죽음의 신이 뭔지 알고 있어"로부터 나오는 얼마나 오만한 생각인지 페르시아 사람의 행동에서 보여준 것이다.


나는 하인이 죽음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기에 혹은 페르시아 사람이 죽음에 맞섰기에 결과가 이렇게 되었다고 느껴지진 않는다. 둘 다 운명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모른 채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이다. 예를 들어, 진짜로 하인이 도망쳐서 살 수도 있었고 페르시아 사람이 죽었다면? 이야기의 교훈은 과연 운명을 개척하라가 되었을까? 나는 테헤란에서의 죽음 이야기의 교훈은 섣불리 판단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에 페르시아 사람은 죽음의 신이 죽음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페르시아 사람이 "왜 죽이려고 했는가?"가 아닌 "왜 겁주고 위협했는가?"라고 질문을 한 것을 보면 그렇게 생각이 든다. 심지어 죽음의 신은 끝까지 하인을 죽인다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정말 죽음의 신은 죽음을 가져다주는 신일까? 이 질문의 답은 그 누구도 모르기에 내가 직접 판단을 내려야만 한다. 그렇기에 페르시아 사람은 말을 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아직 죽음의 신이 죽음을 가져다준다고 판단을 곧바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말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의미치료라는 심리치료법이 하나 나온다. 한 줄로 요약해보면, 최악의 고통이 오더라도 의미를 찾는다면 벗어날 수 있다는 치료법이다.


피할 수 없는 최악의 고통,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찾자!


여기서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등장한다. 해설서나 리뷰를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뉘앙스가 '고통은 이미 주어졌지만 희망은 있다'라고 들린다. 그러나 내가 받아들인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비슷하지만 약간 뉘앙스가 다르다. 


피할 수 없는 최악의 고통인 것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미를 찾아보자


나는 의미치료의 대의를 '인 것 같지만'을 더 붙여서 이해를 하였다. 고통'인 것 같지만' 사실 아닐 수도 있다라는 느낌으로 말이다. 나에게 있어 최악의 고통일지 최대의 행운일지 어떻게 바로 판단할 수 있겠는가? 이게 사실 앞에서 말한 일반적 정의랑 결국 일맥상통인 것 같은데, 뭐 하여튼 자세한 뉘앙스가 다르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인생은 게임과 같다고 생각한다. 환경은 주어지고, 나는 선택한다. 


이렇게 보자면 서문에서 언급한 안개는 내게 주어진 환경이다. 이제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가장 불합리하게 생각했던 것은 내게 주어진 선택지 중에서는 안개를 없앤다라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러한 선택지가 나올 때까지 그 자리에 주저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죽음의 수용소에서> 덕분에 쳐다보지도 않던 한 선택지가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등불을 받는 것이었고 안개를 없애는 것이 아닌 안개 속을 탐험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 선택은 곧 나에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새로운 환경이 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잘못된 선택을 했다? 실수할 수도 있지!


고마워요! 정윤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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