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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린레이 Feb 19. 2024

<순전한 기독교> 리뷰: 아쉬웠던 종교로의 첫걸음

C.S.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1952) - 치밀하지 못했다


미디어: 책

제목: 순전한 기독교 (Mere Christianity)

지은이: C.S. 루이스

옮긴이: 장경철, 이종태

출판사: 홍성사

출간연도: 2016 (38쇄)

원문 출간연도: 1952

페이지: 349p


본 글에서의 '기독교'는 개신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종파를 의미하는 것임을 앞서 밝힌다.


나는 세상의 법칙을 적어둔 절대적 공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창조한 신이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절대적 공리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 무엇하나 정확히 아는 것은 없지만, 절대적 공리가 존재한다는 나만의 공리만은 진실로 믿고 싶었다. 이것을 지지해줄 수 있는 것은 분명 종교 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 그것은 아직 나만의 세상구조 이해가 정립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종교가 없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나를 담을 수 있는 바구니를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이 곧 나의 종교가 될 것이다.


처음으로 <순전한 기독교>라는 종교서적을 읽었다. 읽게 된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는 위와 같은 이유로 '종교'라는 세계를 더 이해하고 싶어서였다. 두 번째로는, 여자친구가 천주교를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종교를 믿는다면 분명 더 잘 지내는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늘 첫 번째 이유를 마음에 두면서 언젠가는 공부해야지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거기에 추진력을 달아준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내가 첫 종교서적으로 <순전한 기독교>를 택한 것은 가장 논리적으로 잘 설명한 책이라고 소개 받았기 때문이다. 종교를 따르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합리성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순전한 기독교>는 합리성을 갖추었다고 한다. 벌써부터 흥미로웠다.


<순전한 기독교>의 저자 C.S. 루이스는 머리말에서 책의 목표를 말한다. <순전한 기독교>의 목적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통적으로 믿어온 바를 설명하고 수호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기독교에서의 특정 종파가 옳고 그름을 논의하는 것이 아니라 비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의 존재를 납득시키고 설득하는 것이다.


목표부터 마음에 들었다. 종교가 없던 내가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일 수 있을 수도 있겠다는 흥분감을 느꼈다. 그래서 <순전한 기독교>의 논리를 정리해가며 독서를 진행하였다.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서는 잠시 멈추어 혼자 납득할 때까지 생각하였다. <순전한 기독교>의 논리에 나의 의견을 붙여 종교에 대한 나만의 논리를 만들어 갔다. 드디어 종교에 첫 발을 디딜 수 있는걸까?


결론부터 말하면 중간에 책을 덮었다. 중간부터 <순전한 기독교>의 논리가 나를 설득시키지 못하여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책을 덮게 하였던 논리 구조는 두 가지였다.


A가 아니니까 B가 맞아


바로 죄를 요서해 준다는 말, 그 어떤 죄라도 용서해 준다는 말입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이 하나님이 아니라면, 이것이야말로 웃음이 나올 정도로 황당무계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p.93)


예수가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가 용서 받았다고 선언하였다고 한다. 당사자도 아닌 사람이 와서 갑자기 죄를 용서해주겠다고 한다면 미친 사람처럼 보일 것이다. <순전한 기독교>에서도 황당무계한 일이라고 하였다. 단, 하나님이 아닐 경우에만 말이다.


따라서, 예수는 곧 하나님이 되는 것이다.


???


나는 이 논리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고 생각한다. 위의 전개가 납득되기 위해서는 둘 중 하나의 조건을 만족해야 한다.

예수는 미치지 않았다 (혹은 사람이 아니다).

사람들은 미친 사람처럼 행동을 하지 않는다.

첫 번째 조건을 만족한다면,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준다고 말하는 것은 미친 사람의 행동이거나 하나님일 경우 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하나님이 된다.

두 번째 조건을 만족한다면, 미친 사람처럼 행동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에 역시 예수=하나님이 된다.


그러나 나는 둘 중 하나의 조건이 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위의 조건들이 참이려면 현재로서는 공리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독자 분들은 두 번째 조건이 공리로 받아들여지는가? 세상에 일어나는 갖가지 사건들을 생각해보면 공리로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첫 번째 조건도 마찬가지다. 종교를 믿지 않는 나에게는 공리로 받아들이기 쉽지 않다.


<순전한 기독교>에서의 뉘앙스를 자의적으로 해석하였을 때, 첫 번째 조건이 참이기 때문에 예수는 곧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 같다. 예수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A가 아니니까) 예수는 하나님이다 (B가 맞아)라는 것이다. 그러면 'A가 아니니까'가 참임을 보여야하는데 <순전한 기독교>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혹시 너무 억지라고 생각한다면 <순전한 기독교>에서 말하는 또 다른 예시를 살펴보겠다. '순결'이라고 부르는 덕목인 성도덕에 대해서 설명하는 부분이다.


스트립쇼 공연에는 구경꾼들이 많이 몰려듭니다.
...
어떤 나라에 가서 보니, 덮개로 가린 접시를 무대에 들고 나타나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조명을 비추고 천천히 덮개를 들어올리며 양갈비나 베이컨 조각을 보여 주는 쇼만으로도 극장이 꽉꽉 찬다면, 그 나라 사람들의 식욕에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지 않겠습니까? (p.158)


<순전한 기독교>에서는 스트립쇼 공연의 예를 들면서 성욕에는 분명 무언가 문제가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식욕은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식욕은 성욕과 같은 스트립쇼가 없으니까(A가 아니니까) 성욕은 문제(B가 맞아)라는 것이다.


C.S. 루이스가 현대 시대에 살았더라면 위와 같은 논리를 펼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먹방'이라는 음식 스트립쇼 문화가 있다. 그럼 사람들의 식욕에 문제가 있다는걸까? 그렇게 장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 전문분야가 아니라서 생략하겠습니다


신약성경이 말하는 황금률은 모든 사람이 늘 옳다고 생각해온 바를 요약한 것입니다. (p.137)


기독교에서 말하는 황금률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은 새로운 규칙이 아닌 모든 사람이 늘 생각해오던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사회는 자꾸만 단순한 옛 원칙을 외면하려 한다. 따라서 이것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기억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까진 좋았다. 나는 세상의 공리는 존재하고(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거기서 파생된 것이 황금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논리에서 비롯된 다른 예시들이다.


중세의 위대한 기독교 스승들이 우리에게 준 충고로서, 현재 우리의 경제 제도가 완벽하게 거스르고 있는 교훈입니다. 그들이 한결같이 가르친 그 교훈이란 바로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p.142)


현재 경제제도의 근간을 뒤흔드는 소리다. <순전한 기독교>에서도 똑같이 말한다. 하지만 고대, 중세, 근대의 위대한 그리스도 문명들이 한결같이 지적했던 바이니 우리는 받아들이고 기억해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C.S. 루이스는 자신은 경제학자가 아니므로 더 이상의 논리 전개를 할 수 없다고 한다. 대신 경제학자 그리스도인이 필요한 이유라고 말한다.


모르는 분야가 나오면 후퇴할 줄 아는 현명한 자세다. 그런데 그러지 말아야 했다. 이 상황에서의 후퇴는 말하고 싶은 바는 다 말해두고 책임을 전혀 지지 않으려는 자세처럼 보인다. 내용이 납득이 되지 않으면 전문가한테 가서 물어보라니.


좋다. 내가 경제학자 그리스도인에게 왜 경제체제가 바뀌어야 하는지 물어보았다고 해보자. 만약 내가 그 답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납득을 하지 못한다면)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고대, 중세, 근대의 위대한 문명들이 늘 지지했던, 황금률과 같은 옛 원칙이므로 기억해야만 한다고 할 것이 분명하다. 순환 논리에 빠지게 된다. C.S. 루이스의 말을 빌리자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는데에 전혀 도움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위와 같은 이유로 책을 중간에 덮었다. 여기서 납득을 하지 못한다면 뒤의 내용도 받아 들이지 못할게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순전한 기독교>가 나쁜 책이라고 하려는 것은 아니다. 나와 같은 무신론자가 읽기에는 분명 논리적 결함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종교를 이미 믿기로 결심했지만 논리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상황이라면 <순전한 기독교>는 좋은 탈출구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종교는 허무맹랑한 것'이라고 결론 내리고 싶지도 않다. 앞서 말했듯이 나는 절대적 공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며 나만의 공리를 지지해줄 수 있는 것은 분명 종교 밖에 없을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또 나를 위한 여행을 떠나려고 한다. 다음 여행은 G.K. 체스터턴의 <정통>이나 앨빈 플랜팅가의 <지식과 믿음>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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