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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숨님 Oct 12. 2023

선을 넘는다는 것

현정언니에게 쓰는 두 번째 편지


마지막 편지를 받은 날짜가 7월 31일. 한참 여름이 절정을 향해 달려갈 무렵이었는데 벌써 10월도 여드레나 지나 버렸네요. 오늘 운전 중에 무심코 창밖을 보다 흠칫 놀라고 말았어요. 도로 가장자리에 심긴 나무들 이파리가 알록달록 변하기 시작했더라고요. 다음번에 문득 정신 차리면 손을 호호 불며 눈길을 걷고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코끝에 찬 기운이 살살 들기 시작하면 어김없이 털실을 삽니다. 집에 이미 쓰다 남은 것, 사두고 아직 못 쓴 것이 잔뜩(다이소에서 파는 제일 커다란 정리 상자로 여섯 개 정도) 있지만 털실 쇼핑은 늘 새롭고 즐거워요. 요즘 틈만 나면 보는 영상이 있는데요, 바로 뜨개 유튜버 ‘김대리’님의 채널이랍니다. 우리나라에서 뜨개바늘 좀 잡아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분이 바로 김대리님의 어머니이고, 이분은 어머니 회사에서 일하며 뜨개 튜토리얼이나 브이로그를 주로 올려요. 솜씨도 기가 막히고요. 말하자면 ‘뜨수저’인 셈이죠.


영상을 보는 동안 특히 제 마음에 띈 김대리님의 멋진 점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겁이 없어요. 저는 처음 코바늘과 대바늘을 잡은 이래 도안 없이 무언가를 만들어 본 적이 없답니다. 한 코라도 도안과 다르게 되면 눈물을 머금고 풀어버리고 마는, 극도로 도안 의존적인 뜨개질을 구사하죠. 하지만 김대리님은 그렇지 않습니다. 막 해 봐요. 자기 생각에 더 예쁠 것 같은 모양대로 단도 줄여보고, 코도 줄여보고, 새로운 기법도 ‘그냥’ 해요. 그러고는 “막상 해보니 별거 아니더라고요.”하고 싱긋 웃고, “너무 예쁘네요. 마음에 들어요.”하며 활짝 웃어요. 그 모습을 보면 정말 괜찮네. 나도 한번 해볼까, 하는 마음이 든답니다. 어떤 긴장도 동요도 요란스러움도 없이요.  


둘째, 지나치게 심각하지 않아요. 한번은 며칠에 걸쳐 만든 스웨터를 입어 보는데 한쪽 소매가 다른 쪽보다 약간 짧은 거예요. 약간이지만 한눈에 봐도 양쪽 길이가 다르다는 게 눈에 띌 정도였죠. 저라면 투덜거리며 풀어버릴 것 같았어요. 그러고는 다시 소매를 뜰 엄두가 안 나 며칠 묵혀 뒀을지도 모르죠. 어깨선을 다시 맞춰보고 이리저리 매무새를 고쳐 입어보며 잠시 난감해하던 김대리님의 결론은 이거였습니다. “음. 양쪽 길이가 다르면…… 요렇게 당겨서 입으면 됩니다. (간단)” 엥? 왼쪽 소매 끝을 손바닥 쪽으로 슬쩍 당겨 내리는 걸 보며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어요. 뒤통수를 살짝 맞은 것 같기도 했습니다. 맞아요. 전혀 큰일이 아니었던 거예요.


언니, 저는 처음 뜨개질을 시작한 지 얼추 30년이 되었답니다. 그동안 셀 수 없이 많은 목도리와 장갑, 인형, 수세미, 담요와 가방과 정체 모를 것들을 만들었어요. 하지만 스스로 생각하기에 저는 아직도 중급자 수준을 넘어서지 못해요. 100퍼센트, 1,000퍼센트 도안에 의존하는 수동적인 뜨개인이니까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취미 뿐 아니라 직업 쪽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전문성’은 제가 늘 걸려 넘어지는 돌부리의 이름이죠. 물론 취미생활에서 고급 이상의 기술을 구사하는 것과 직업 영역에서 전문성을 발휘하는 것이 같을 수는 없겠지만, 양쪽 모두 수동적인 자세로는 어떤 ‘선’을 넘어서지 못할 것 같아요. 슬쩍 한쪽 발을 물 밖에 걸쳐 놓고 남들이 잡아주는 물고기로 그때그때 허기만 달래는 제 모습을 상상해 봅니다. 안타깝기도, 답답하기도, 우스꽝스럽기도 해요.


실은 위에 언급한 스웨터 영상에서 김대리님이 ’선을 넘는 것‘에 대해 잠깐 얘기해요. 자기는 ‘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이 선이라고 생각한다고요. 그 물음(선)을 넘어서서 한 발짝만 딱 넘어가면 못 할 게 없다, 한번 해 보면 충분히 여러분도 스웨터를 뜰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될 거라고요. 당장은 어려워 보이고 막막해도 발을 떼 보는 것, 일단 발을 뗐으면 물속에 확실하게 들어갈 것, 아니다 싶으면 나오면 그만이지 하고 가볍게 생각해 보기도 하는 것. 이것이 올가을 제가 얻은 수확이에요. 결론: 올겨울엔 스웨터 뜨기에 도전해 보기로 했어요. (직업적으로는 조금 더 천천히 진행 중입니다)


언니의 선은 무엇인가요? 이미 넘어본 선은 어떤 걸까요? 여러 가지 궁금하지만, 답을 해주셔도 좋고, 패스하셔도 물론 괜찮답니다. 길고 예쁜 손가락으로 얼굴을 가리며 환하게 웃는 언니를 떠올리니 스웨터 소맷자락을 끌어당기는 김대리님도 또 한 번 생각나고, 두 사람의 모습에 괜히 저도 또 웃어보는 밤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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