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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국어교사 김지씨 Aug 03. 2020

이 한 곡의 노래가 준 기적같은 경험

김지씨의 수업 일기 (3)

구독하고 있는 주간지에서 소개된 음악 관련 서적을 인상깊게 봐둔 김지씨. 책은 읽는 것이 아니라, 수집하는 것이라는 신조 아래 방 안 가득 책을 쌓아놓기만 하는 그답게, 자연스럽게 손이 가는대로 책을 주문한다. 아침에 주문하면 저녁을 책을 받을 수 있는 이 편한 세상에서, 김지씨의 욕망은 너무나 순조롭게 실현되고 마는데... 그렇게 받아든 책은 이주엽, <이 한 줄의 가사>(열린책들)였다.

대중들의 마음 속에 깊숙이 새겨져, 한국 음악사에 잊을 수 없는 장면들을 연출했던 작품들의 한 소절을 솜씨좋게 추출하여, 그 의미를 유려한 문체로 녹여낸 책에 김지씨는 금새 빠져들고 말았다. 책을 구비하고 진열하는 것이 주목적인 '장서가'의 본분을 잊고 어느새 김지씨는 ‘독서’라는 심각한 행위를 하게 된 것이다. 그 문체의 매력에 빠져들었달까? 김지씨는 책을 읽으면서 '소설가 구보씨'에게서 영향을 받은 이 오래된 문체를 버리고, 그의 문체를 따라 쓰고 싶다는 강력한 충동마저 느낄 지경이었다. 그만큼 이주엽의 문체는 흡입력이 강했다. 예를 들어 노래방 곡번호까지 외우고 있을 정도로 김지씨가 애창하는 유재하의 '가리워진 길'을 놓고,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섬세하고 예민한 내면을 지녔던 유재하는 정처 없는 막막함과 불안함에 갇혀 스물 다섯 해를 걸었으리라. 그래서 그 길은 '보일 듯 말 듯 가물거리는 안갯속에 싸인 길'이거나 '잡힐 듯 말 듯 멀어져 가는 무지개와 같은 길'이었다. 핏기 없는 창백한 목소리마저 아름다운 유재하는 신기루 같은 이 길 위에서 머뭇거리고 두리번거린다. 그리고 조용히 되뇐다. '그대여 힘이 돼주오', '그대여 길을 터주오.'

(이주엽, <이 한 줄의 가사>, p.43)


고등학교 3학년  집안의 경제적 상황때문에 대학 진로가 불투명해졌을 때에도, 공부를  해보겠다는 고집을 피우며 군대까지 미루고 대학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을 때에도, 뒤늦게  군대에서 서른을 맞이했고 제대할 무렵에 직장도 뚜렷하지 않아 불안에 떨 때에도 김지씨를 조곤조곤 위로해주었던 '가리워진 ' 이런 문체로 만날  있다니... 김지씨는 자신의 경험과 한껏 조응하는  글을 읽고, 적지 않은 감동을 느꼈다. 그러면서 역시 음악의 힘은 강력하다는 생각을 다시   되새길  있었다.


그런데 역시  버릇을  못준다고,  책을 읽으며 김지씨는 직업병처럼 새로운 수업에 대한 열망을 가지게 되었다.  책에 실려있는  한 편, 한 편 길이가 그리 길지 않고,  하나에 대해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서술하는 형식을 취하 있다보니, 학생들과 함께 이 책을 읽고 이런 형식의 글을 쓰는 수업을 하면 재밌겠다는 생각이 언뜻  것이다. 이런 생각까지 미치게  것은 전에 김지씨가 대중음악을 놓고 수업을 해보았던 경험과도 연관되어 있다. 김지씨는 전에 음악으로 세상읽기라는 엉뚱한 제목의 수업을 개설해놓고 대중음악 작품들을 하나의 교재로 삼아 수업을 진행했었기 때문이다. 


물론 김지씨는 국어교사다보니 노래 자체만을 놓고 수업하기보다는, 문학 수업에서 시를 가르칠 때 시적 언어와 노래 가사의 유사성에 초점을 맞추어 비교해 본 경험이 어쩌면 더 많았던 것 같다. 고대가요 <정읍사>를 가르치면서, 화자가 달에게 자신의 감정을 토로하는 형식을 보아의 <No. 1>과 비교하여 설명하기도 했고, (이 노래에서 보아가 간절히 부르는 ‘너’는 ‘달’이다. 뮤직비디오 처음에 보름달이 떡하니 나오기도 하려니와, ‘보름이 지나면 작아지는 슬픈 빛’ 등의 표현은 바로 ‘너’가 달을 의미함을 알 수 있게 한다.) 화자의 상황을 상상하는 연습을 하기 위해 윤도현의 <7년의 그리움>같은 노래를 분석하기도 했다. (이 노래의 화자는 억울하게 감방에 갇힌 사람인 듯하다. ‘걷고 싶어질 때는 같은 자릴 맴돌다.’라는 표현의 의미를 찾아보면 된다. 물론 ‘담장’과 같이 직접적인 표현은 (    )로 비워두는 센스를 발휘하긴 했지만.) 그리고 김지씨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돌 그룹인  f(x)의 <첫사랑니>나 <airplane> 등의 노래에 담긴  비유적 의미를 설명해주기도 했다. ('힘들게 날 뽑아낸다고 한대도 평생 그 자릴 비워두겠지'라니... '첫사랑'과 '사랑니'의 공통점을 뽑아낸 이 감각적인 가사를 설명할 때마다 김지씨는 항상 목에 핏대를 세운다. 그리고 설리의 명복을 빈다...ㅠㅠ)


하지만 김지씨는 이주엽의 책을 읽은 뒤에 이런 수업말고 노래 자체가 수업의 주인공이 되는 '음악으로 세상읽기' 같은 시간을 다시 한번 기획해보려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 수업의 경험은 국어교사 김지씨에게 진짜 기적같은 것으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무슨 수업이었길래 '기적'이라는 표현까지 쓸 수 있었을까? 그렇다면 여기서 그 수업 이야기를 먼저 한 번 풀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수업의 시작은 그야말로 미약했다. 김지씨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방과후를 개설했는지, 그 무모함은 지금도 아찔한 기분을 들게 한다. 아마도 음악평론가 임진모 씨의 책 <팝, 경제를 노래하다>를 정말 재밌게 읽고 그 맛에 덜컥 시작한 것 같다. 그렇게 막장으로 수업을 기획해놓았으니, 당연히 김지씨에게 학생들 앞에서 할만한 이야기 따위는 없었다. 공부라도 해서 밑천을 벌 시간을 마련해야했다. 그래서 수업 초반에 김지씨는 임기응변으로 학생들에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하나 소개하고, 그 이유를 설명하라고 시켰다. 


하지만 방과후 수업에서 서로 처음 만난 학생들이 앞에 나와서 가장 좋아하는 노래를 진솔하게 소개한다??? 이건 거의 기적같은 일이다. 다들 뻘쭘해 하고, 당황한 표정이 역력해서 수업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날로 먹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진리를 절절히 깨닫고, 진땀을 한바탕 흘린 뒤에야 김지씨는 다시 이렇게 제안을 했다. '가장 좋아하거나 애창곡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노래가 자신의 경험과 너무 밀착되어 있어서 이 노래를 들으면 그 노래를 듣던 순간의 경험이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되는 노래와 그 경험을 소개하라고.' 그러면서 시범케이스로 먼저 김지씨가 자신의 케케묵은 경험들을 몇 개 들려주었다. 인생을 학생들보다는 두 배 이상 살아왔으니, 달콤씁쓸한 감정들이 묻어있는 오래된 추억 속의 노래 정도는 몇 개 있지 않겠는가. 그 이야기로 썰을 풀다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버렸다.


그 다음 시간이 되었을 때에 학생들은 그래도 마음이 조금은 풀어진 듯 보였다. 방과후 인원도 몇 명 되지 않고, 첫 시간의 분위기를 자연스럽게 이어가면서 '나도 했으니 너희들도 꼭 발표해야 한다'는 반협박까지 동원해 보았더니, 그 다음 시간부터는 슬슬 한 명씩 노래와 함께 자기 이야기를 준비해오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한 시간에 서, 너 명씩 자신이 살아온 이야기와 함께 노래를 틀고, 경험이 녹아있는 가사의 구절을 뽑아서 설명했다. 다른 학생들이 잘 모를 것 같은 자신의 최애 뮤지션을 소개하면서 일종의 호객 행위에 나선 학생들도 있었고, 매일 자신을 데려다줄 때 아빠가 차 안에서 틀어놓던 80년대 가수 노래를 설명하면서 아빠와 어제 싸운 이야기로 눈물을 보였던 학생들도 있었다. (물론 교실 전체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김지씨도 눈물 참느라 힘들었다.) 


이렇게 울고, 웃으며 초반부를 보낸 뒤에 본격적으로 임진모 선생님의 책을 같이 읽고, 거기에 나온 뮤지션들의 음악에 대해 조사하고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다. 음악과 당시 시대적 상황을 비교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지만, 그래도 학생들은 새로운 음악과 새로운 관점들을 이해하기 위해 상당히 많은 노력을 들였다. 그 성과도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래서 김지씨는 그 노력들을 생기부에 녹여주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다. 그 중에서 제일 운이 나빴던 학생은 'Sex Pistols'를 맡은 학생이었는데, 뮤지션의 문제적 이름 때문에 한참 고민을 하다가, 자체 검열 끝에 생활기록부에는 그 뮤지션의 이름을 싣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그런데 사실 기적과 같은 경험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래저래 수업을 진행하던 때쯤 김지씨는 우연히 임진모 선생님과 연락이 닿게 되었다. 그리고 김지씨네 학교 근처에 살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방과후 수업에 초청을 했는데, 놀랍게도 흔쾌히 수락을 해주셨다. 직접 학교에 오셔서 한 시간 훨씬 넘게 강연을 해주셨고, 방과후 수업을 들었던 학생들 말고도 100명이 넘는 학생들이 자리를 가득 메운 채 흥미롭게 강연이 진행되었다. 특히 방과후 수업에서 'Beach Boys'에 대해 꼼꼼하게 조사했던 학생들이 강연 전에 먼저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했는데, 그 학생들의 발표가 임 선생님의 극찬을 받았던 것은 김지씨가 교사로서 경험할 수 있었던 최고의 순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한 학기 방과후 수업을 마치고 나니, 음악과 관련된 수업이 김지씨에게나 학생들에게나 참 좋은 경험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이후에 김지씨가 이 수업을 계속 이어갈 것 같았지만, 사정은 그렇지 않았다. 이것저것 다른 방과후 수업을 건드려보기도 했고, 또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반강제로 부과된 억울한 수업들을 준비해야 하기도 했고, 고 3 담임을 맡아 입시의 선봉장이 되기도 하다보니 '음악으로 세상읽기' 수업을 거의 5년 가까이 제대로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에 읽은 이 <이 한줄의 가사>는 앙금처럼 가라앉아 있던 김지씨의 기억을 휘저어 다시 들뜨게 만들었다. 그래서 이번 여름방학에 김지씨는 이런 수업을 기획해보고, 다시 한 번 시도해 볼 것 같다. 혹시 또 모르지 않나? 이 책의 저자도 김지씨 학교를 기적처럼 찾아 줄는지...^^;;




추신) 김지씨는 '음악으로 세상읽기' 수업을 개설하려고 하다가, 원래 역사 선생님과 콜라보로 방과후를 진행하려는 했었던 기획과 엉뚱하게 맞물리면서 대중음악 가사를 놓고, 문학과 역사의 측면으로 접근하는 수업을 진행하기로 했다. 예를 들어 '단장의 미아리고개'와 같은 노래를 놓고, 6.25 전쟁에 대해 문학과 역사의 방면에서 각각 접근하는 것이다. 역시 젊은 선생님의 아이디어가 좋은 것 같다. 김지씨는 나이 먹을 수록 조심스레 묻어가는 미덕이야말로 생존의 가장 중요한 형질이 아니겠는가...라고 생각하며, 소리 죽여 웃어본다...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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