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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시옷 Feb 10. 2019

빡빡한 일정과 피로한 감흥

감흥을 입력할 시간조차 없는 여행





“여행 재밌었어?”
“너무 피곤해서 기억도 잘 안 나.”





  어떤 여행지에서 가장 좋았던 순간을 떠올려보면, 의외로 유명한 관광지를 보았던 순간보다 이름도 모를 작은 성당에 가만히 앉아 있을 때라든지, 공원에 앉아 커피 한 잔을 마셨던 때였던 것 같다. 의외로 멍하니 놓고 있었던 순간이라고 해야 하나. 여행은 매 순간 너무 바쁘기만 해서 오히려 기억할 시간조차 없는 경우가 많고, 바람 숭숭 통과할 만큼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던 때가 되어서야 좀 정리가 되고 기억에도 남는지 모르겠다.      


  여행이 감흥이 없어지는 건 욕심이 너무 많아 거지가 되는 일정 탓이 크다. 나는 딱 한번 패키지여행을 해본 적이 있다. (일일투어나 1박 2일 투어는 꽤 이용하는 편이지만) 내가 원해서 간 것은 아니었다. 나는 패키지여행이랑은 정말 맞지 않는 사람이다. 물론 패키지여행의 장점은 크다. 우선 동선을 짜느라 고생할 필요가 없다. 꼭 가야 한다고 믿는 관광지는 대부분 알아서 데려다준다. 호텔에서 관광지로 편하게 이동할 수 있다. 자유여행보다 값이 싸게 든다. 모르는 건 가이드에게 물어보면 된다. 가이드는 그것이 올바른 정보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그들이 숙지한 내용을 친절하게 관광지마다 말해준다. 원하면 사진도 찍어준다. 혼자 하는 여행이 외롭다면 패키지여행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패키지여행의 단점이 너무나 크다. 나는 아침 일찍 일정을 시작하는 것이 싫다. 물론 아침 일찍 일어나면 할 수 있는 것이 더 많을 수도 있지만 나는 조식이 끝날 시간에 겨우 일어나 뭔가를 먹는 사람이고 어쩔 땐 조식을 패스할 정도로 늦잠 자는 것이 좋다. 브런치를 먹고 슬슬 움직이는 게 딱이다. 물론 이게 모든 사람에게 패키지여행의 단점은 아니다.    

  

  진짜 단점은 충분히 여행의 감흥을 느낄 시간을 주지 않는 것이다. 일 때문에 동행한 패키지여행에서 나는 동행들이 일정을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 일주일이 넘게 혼자 뉴욕에 머물렀는데, 그제야 나는 5번가와 소호 거리를 걸을 수 있었다. 이게 무슨 소리냐하면, 5번가를 버스로 몇 번이나 지나쳤지만 가이드는 "여기가 5번가예요!"라고 말했고 버스 안에서 창밖으로 5번가를 그저 볼 수밖에 없었단 거다. 물론 거리를 굳이 구경할 필요가 있냐 물을 수도 있겠지만, 소호를 지나쳐 가는 것과 소호 거리를 걷는 것. 이게 같을 수도 없는 거다.


  아무튼 공식적인 일정이 끝나고 패키지여행에서 보았던 곳을 하나하나 다시 가보았다. 하루에 돌아다녔던 일정을 이틀에 나누어 가도 다 가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일정이었다. 그 당시에도 나는 숙소에 도착하면 곯아떨어졌고 아침은 번번이 걸렀고, 이동하는 동안 버스에서 잠을 충당하기에 바빴다. 버스가 멈추고 가이드가 깨우면 그제야 일어나 버스 밖으로 나가 관광지를 구경했지만 사실 잠이 너무나 절실했기에 대부분의 경우 관광지는 무신경해졌고 심드렁해졌다. 그게 패키지여행의 단점이라면 단점이다. 나 같은 저질체력은 패키지여행의 일정을 소화해내기가 힘들다.     


  일하면서 제일 싫었던 게 그래서 팸투어였다. 팸투어는 여행기자나 여행사 직원, 여행 블로거 등을 단체여행처럼 체험해보는 일정을 말한다. 코스 발굴과 소개, 홍보 등의 목적인 팸투어는 여러 곳을 소개하고 싶은 주최 측의 욕심으로 패키지여행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한 경우는 없다. 어떤 팸투어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숙소에 내려주고, 다음 날은 일곱 시부터 일정을 시작하기도 했다. 솔직히 아무리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2박 3일 그렇게 끌려다니면 감흥이고 뭐고, 기억도 잘 나지 않는다. 자료야 일단 있는 대로 챙기고, 사진이라도 잘 찍어둬야 한다. 글이야 어떻게든 만들어 쓴다지만 없는 사진이 뿅 하고 만들어지진 않으니까 말이다. 나야 돌아가서 기사 마감을 한다지만, 여행 블로거들은 잠도 미루고 간단한 사진과 글을 블로그에 업로드하고 자는 이들도 많이 보았다.  (일정이 어떻고 저떻고 하다가도 블로그에는 전혀 말투가 다른 건 둘째 치고) 정말 체력이며 정신력이며 의지가 대단하다고 감탄할 체력도 없는 나는 정말 대단하시네요,라고 말하고 기절하듯 잔다.


  팸투어나 패키지여행이 아니더라도 휴가도 이렇게 일정을 짜는 이들도 많다. 아니, 이렇게 짜야만 한다. 주어진 휴가는 너무 짧고, 보고 싶은 것은 많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욕심과 의지가 여행을 감흥 없게 만든다. 체력은 버텨주지 않고, 물론 죽을 만큼 힘들어도 갔을 때 정말 멋진 풍경을 보면 눈물이 날 정도로 모든 것을 잊지만 돌아오는 것은 다음날의 피로다. 여행은 매일매일이 강행군이라 피로를 풀기가 쉽지 않다. 일정이 길다면 혹은 온천이나 마사지가 유명한 곳이라면 그것마저 일정의 일부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쉬기가 쉽지 않다.     


  여유로운 여행이 좋은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학생 때는 시간이 많아도 돈 때문에, 직장인일 때는 부족한 시간 때문에 많은 이유로 일정은 한정되어 있다. 있는 연차를 붙여 쓰는 것도 눈치 보이는 마당에 어떻게 길게 휴가를 간단 말인가. 아무리 붙여도 며칠이나 된다고. 예전에 방콕에서 캄보디아로 넘어간 적이 있었는데, 6일을 머문다고 했더니 그렇게 조금 머무냐고, 자신도 3주밖에 머물지 못해 너무 짧다고 말하면서 한국인들은 다들 3일, 4일 바쁘게 여행한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다. 한국인이 빨리 보는 게 아니라 휴가가 짧은 게 문제라고 말해도 그 사람은 말로만 ‘그래?’ 했을 뿐, 별로 이해는 못 하는 눈치였다. 그 며칠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모르면서. 결국은 너무 일하는 사회 욕을 하게 되는 현실. 아무튼 한정된 일정, 다시 올지 안 올지 불투명한 이후를 생각하면 아파도 돌아와서 아픈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여행지에선 아픈 것도 사치다. 여행의 감흥이란 그런 의미에서 피로한 감흥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 여행이 정말 재밌었고, 좋았던 것 같은 건 시간이 지나면 뭐든 좋은 쪽이 더 많이 보이는 시간필터 때문이 아니라 여행의 감흥을 뒤늦게 곱씹을 수 있는 여유가 생겨서인지도 모른다. 그제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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