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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 Sep 29. 2020

서울대로 간 질그릇

고3을 시작하는 첫 3월엔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감이 팽배하다. 이 아이들과 앞으로 지낼 1년은 나에게도 긴장과 도전이 된다. 글자그대로 내가 아이들의 미래를 좌우하는 위치에 서기 때문이다. 올해는 정말 아프면 안 돼. 나 자신과 약속을 한다.     


두려움과 착잡함이 복잡하게 얽힌 얼굴의 아이들과 첫 인사를 한다. 자, 이제 너희들과는 내년 2월 대학합격이 최종 결정될 때까지 같은 운명을 나누는 한 팀이 된다. 아이들의 얼굴을 쭉 훑어보며 분위기를 살핀다. 고3은 개인의 역량만큼이나 학급의 분위기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혹시 분위기를 흐트릴만한 녀석들이 있는지 스캔을 한다.      


“ 다음 주엔 첫 모의고사가 있는 것을 다 알고 있죠? 지난 겨울방학 동안 열심히 준비한 결과를 보여주는 첫 시험이니 스타트를 멋지게 해봅시다.”     

만난 첫날부터 시험타령을 하며 아이들을 조인다.

군대 영화에서나 나올만한 악덕 조교가 떠오른다.     


고3 담임들은 사실 2학년을 마치고 진급이 결정되는 2월에 미리 올해의 명단과 성적이 빼곡하게 적힌 서류를 받아든다. 성적과 생활기록부를 분석하고 앞으로의 성적추이를 80~90% 예상한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중요한 것은 직접 아이를 만나는 일이다. 그 아이가 나머지 본인역량 10~20%를 어떻게 끌어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을 너무 많이 경험하기 때문이다.     


우리 반 서영이는 전교 1등으로 진급하여 우리 반에 배정되었다. 이 친구는 큰 언니와도 같은 포스로 아이들을 휘감는 재주가 있었다. 호탕하게 웃으며 애들하고 놀다가도 어느 틈에 집중해서 그 어려운 수학문제를 척척 풀어대고 있는 것을 보며 보통의 집중력이 아님을 간파할 수 있었다. 공부라는 자기 현업에서의 숙련된 통달을 이미 갖춘 녀석이었다. 게다가 쉬는 시간마다 찾아오는 친구들의 질문들에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응대하는 그녀는 공부뿐만 아니라 다방면에서 친구들에게 인정받으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짓는 그런 아이였다. 청소시간에 끝까지 빗자루를 들고 묵묵히 교실바닥을 쓸고 있는 것도, 또 정신없는 입시철에 자신도 준비에 정신없을 때인데도 조용히 와서 “선생님, 혹시 제가 도와드릴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라고 말할 줄 아는 친구였다.  

   

‘저 녀석은 좀 더 끌어낼 수 있겠어.’     


진학지도를 하다보면 부모님의 욕망이 곧 자신의 희망인 줄 알고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경우를 많이 접한다. 서영이는 교대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었는데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초등교사로서의 그녀가 도대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본인의 희망대로 고민 없이 교대 원서를 쓰게 할 건지.

한 번 더 다른 영역으로의 도전을 시켜볼 건지.

계속 갈등이 되었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자신의 인생 선택은 본인이 직접 확인하게 하고 싶었다. 나중에 일이 혹시 제대로 안될 때, 부모 탓이나 하는 멍청한 어른으로 키우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면 누군가 한번은 환기해주어야 한다.

그것이 고3담임. 바로 나다.     


“네?? 서울대요?”

그녀는 가당치도 않다는 듯이 눈을 똥그랗게 뜨며 반문했다.     

“아이고 선생님, 서울대 가기에는 제 성적이 아슬아슬하고, 저는 생각도 안 해봤어요.”

“도전하는 거지. 어차피 너는 수시원서 중에 하나는 교대에 합격할거잖아. 그러니 출사표를 한번 던져봐. 안되면 원래의 길을 가면 되는 거고. 적어도 네 인생에서 회한은 없어야 하지 않니?” 

         

나는 그렇게 그녀를 흔들어놓았다.

적어도 자신이 나중에 인생을 돌아봤을 때, 도전 그 자체도 시도하지 않았던 자신을 후회하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다.   

  

추천서는 크게 3가지 문항으로 구성된다. 

1번. 학업역량 250자.

2번. 인성 250자

3번. 기타 더 추가하고 싶은 내용. 1,000자     


기타 추가할 내용이 얼마나 많은데 고작 1,000자라니!

이 아름다운 아이를 공백포함 1,000자에 어찌 다 표현한 단 말인가.     


기존에 서울대 가는 친구들은 사실 서영이 말고도 많았다.

하지만, 공부를 잘 한다는 무기 아닌 무기로 많은 의무에서 면제되고, 모든 세상의 중심이 되어버린 아이들에게 워낙 시달리기도 많이 시달린 터라, 이렇게 소박하고도 울림을 주는 아이의 인생에 무엇이라도 보탬이 되어주고 싶었다.  

   

대학 면접은 10~15분 사이의 짧은 시간 안에 이루어진다.

사정관들은 사전에 학생의 서류를 살펴보고 질문을 미리 추출한다.

당일 교수 입학사정관과 전임 입학사정관 2~3명이 면접을 주관하게 된다.

나는 그 짧은 시간 안에 그 분들이 이 아이의 아름다움을 혹여 발견하지 못할까봐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단어하나 하나에 의미를 농축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 이 학생은 화려하지 않지만 시간이 갈수록 음식의 진정한 맛을 더해주는 질그릇과도 같이…….”     


맞아! 써놓고도 훌륭한 것 같아.

저런 미사여구는 사실 추천서의 일반적인 관습을 깨는 워딩이다.

그러나 그냥 그대로 내 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내용을 정말 진심을 다해 써준다면 읽는 사람을 움직일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면접이 끝나고 다음 날 서영이가 학교에 왔다.     

“어땠어? 그냥 후련하지?”
 “아이고 너무 떨려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마구 몰아치듯 질문을 하셔서 뭐라고 답했는지 기억도 안나요.”
 “마무리는 잘 했어?”
 “그냥 마지막에...준비해왔는데 말 못한 거 있으면 해보라고 하셔서..그냥 얼결에... 이렇게 말씀드렸어요. 음...뭐더라? 아 맞아! 제가 이 자리까지 오게 된 것은 저희학교 친구들과 선생님들이 도와주신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이런 기회가 주어져서 감사드리고 교수님들께도 감사드립니다.”     


아니, 뭐라고?

열여덟 살짜리 아이가 극도의 긴장감의 최고봉의 순간에, 저렇게 힘을 빼고 관조(觀照)하듯 말할 수 있다니!  

   

학생들은 아직 순수하고, 또 당일 극도의 긴장감으로 떨기 때문에 말을 지어서 연기하는 게 사실 거의 불가능하다. 수많은 모의 면접을 해본 나도 그걸 안다. 그런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을 해보라하면, 모두 예외 없이 저를 뽑아주신다면 신입생이 되어 열심히 대학 생활하겠습니다. 이런 이야기가 거의 대부분이다. 그런데 서영이는 평소 이타적인 자기방식대로 소박하게 진심을 말한 것이다.    

  

결국 정원 5명만 뽑는 그 학과에 당당히 합격소식을 알려왔다.

나는 그 면접관들을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 분들도 이 아이의 성정(性情)을 직접 느끼셨을 거라고 확신한다.     


이후, 서영이는 3월이 되면 어김없이 이모티콘도 하나 없는 문자메시지로 소박하게 소식을 알려온다.     

“ 선생님, 학기 초라 너무 바쁘시죠? 제가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지 불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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