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을, (그들 입장에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기획성 업무를 하며 지내온 나로서는 누가 시킨 적도 없는 일을 해야 한다고 설득하고, 설명하며, 관철시키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회사에 다녀보면 표면상으로는 모든 부서와 업무가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속으로 들어가 보면 경영상 크게 중요치 않은 한직 같은 업무들도 분명히 있다.
다른 곳도 마찬가지이지만 이런 류의 부서나 업무들은 예산을 사업계획대로 확보하는 게 너무 힘들다. 재정여건이 좋을 때는 그나마 괜찮지만, 비상경영(이 아닌 때가 있나 싶긴 한데)일 경우에는 전년보다 예산이 줄어드는 것이 당연하다. 그리고 받는 지시는, 적은 예산으로 더 많은 일을 하고, 불필요한 업무는 줄이고, 돈 안 쓰고도 티 나게 일하라는 것인데, 듣다 보면 참 어이가 없어서 화도 안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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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어려움은, 존재 이유의 증명이다. 우리 부서는, 내 업무는, 그리고 나는 왜 이 회사에 있어야 하는지 그 가치와 성과, 의미를 증명해야 한다.
정말 재밌는 구도 아닌가? 회사가 필요해서 채용된 사람에게 특정 업무를 맡겨놓고, "네가 왜 거기서 그 일을 해야 하는지 스스로 증명하고 회사를 설득해봐~"라는 지시를 받을 때의 황당함이란...
그래도 같이 고생하고 부서 전체가 그런 류라면 그래도 동료가 있어 버틸만한데, 혼자서 감당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외로움과 처절함은 상상을 초월한다.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다. 자기효능감은 인생의 추진력이기 때문이다. 더 치열하게 더 높은 자리에 더 영향력 있는 업무에 참여하고 싶어 하는 건 자신의 유용성을 증명하고 싶은 인간 누구나 가진 원초적 욕구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중요하지 않은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은 필요하다. 단 그 일을 해야 할 사람은 몇 가지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1. '중요하지 않은 일을 맡은 사람도 그다지 중요한 사람은 아니라'는 인식을 견딜 수 있는 단단한 자아
2. 지시를 기다리기보다 먼저 기획하고 제안할 수 있는 기획력
3. 최선을 다한 내 기안과 결과물을 시답잖게 대하는 상사와 주변을 이해할 수 있는 포용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