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애를 '상태'로 기록하는 방법론
[열람 주의] 본문에는 폭력, 성적 소재, 동의 불능 상황에 대한 서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부 독자에게 불편함을 유발할 수 있으며, 19세 미만의 열람을 권장하지 않습니다.
사건은 보통 과거형으로 기록된다. 언제, 어디서, 무엇이 있었는가. 그리고 끝난다.
하지만 어떤 기억은 그렇지 않다.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반복해서 현재로 돌아온다. 그 기억은 더 이상 사건이 아니라 상태가 된다. 시간 속에 매장되지 않고, 일상의 가장 평범한 순간에 되살아나 현재를 침식한다. 마치 그 순간이 아직 진행 중인 것처럼.
최근 나는 『낙인의 서사, 관음연대기』라는 타이틀 아래 몇 편의 연작을 준비 중이다. 그것의 일부로 「1밀리미터의 실반지」를 막 게재했다. 낙인은 고통이 아니라 잔여다. 관음은 그 잔여로 작동한다.
한 남자의 이야기다. 그는 십수 년 전 어느 밤을 기억한다. 나이트클럽 지하실. 친구가 거절하거나 동의할 수 없는 상태의 여자에게 신체적 행위를 가하는 장면을 지켜본 밤. 그리고 자신도 그 여자와 관계를 가진 밤.
그날 이후 그의 삶은 평범하게 흘러갔다. 결혼했고, 아내와 거실에서 사과를 깎고, 소파에 앉아 TV를 본다. 하지만 아내의 몸을 볼 때마다 그는 그날 밤으로 끌려간다. 아내가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댈 때, 그는 그날 밤 소파 등받이의 차가운 가죽 질감을 느낀다. 주머니 속 흰색 플라스틱 단추—그날 밤 여자의 블라우스에서 뜯겨나간 단추—를 만지작거릴 때마다, 그는 십수 년 전 그 눅눅한 밀실로 돌아간다.
나는 이 소설을 쓰면서, 폭력이나 성애를 "무엇이 일어났는가"로 묘사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대신 이미 성립된 국면이 어떻게 지속되는가에만 집중했다. 사건의 발생이 아니라, 사건이 끝난 뒤에도 계속되는 그 무언가를 포착하려 했다.
이 글은 그 과정에 대한 기록이다. 작품이 아니라 작품이 만들어진 입구. 내가 고민한 것들, 선택한 것들, 포기한 것들에 대한 메타 에세이.
소설을 쓰기 시작하며 나는 하나의 질문에 직면했다.
왜 그는 그랬는가?
친구가 거절하거나 동의할 수 없는 상태의 여자를 데리고 들어왔을 때, 왜 그는 막지 않았는가? 왜 지켜보았는가? 그리고 왜, 친구가 끝내고 "네 차례"라고 말했을 때, 그는 거부하지 않았는가?
전통적인 서사는 이런 질문에 답을 요구한다. 동기가 있고, 갈등이 있고, 선택이 있고, 결과가 있다. "복수심", "억눌린 욕망", "권력에의 의지", "자기혐오"—심리적 언어들이 인과관계를 구축하고, 독자는 그 연쇄를 따라가며 인물을 "이해"한다.
하지만 어떤 경험은 그런 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특히 트라우마나 낙인으로 남는 기억은 "왜"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 안에 자리 잡는다. 폭력의 생존자들이 증언할 때, 그들은 종종 "왜 그때 도망치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지 설명할 수 없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기억의 결함이 아니다. 어떤 순간은 인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저 일어났고, 그 일어남이 영원히 계속된다.
나는 이것을 정직하게 쓰고 싶었다.
그래서 소설에는 동기 설명이 없다. "복수심", "쾌락", "분노" 같은 심리적 언어를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대신 "공복감", "존재가 고프다", "일상성에 삼켜짐" 같은 추상적 상태만 제시한다. 행동과 감각의 연쇄만 기록하고, "왜"라는 질문은 독자에게 맡긴다.
"왜"를 지운 자리에는 더 정직한 무언가가 들어선다. 선택이 사전에 고정된 국면. 요청과 거절의 언어가 작동하지 않는 상태. 이미 성립된 것의 지속.
내가 쓴 남자는 그날 밤 "선택"하지 않았다. 선택할 수 있는 주체성이 이미 무너진 상태에서, 그는 그저 다음 순간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친구의 눈빛이 동류를 인정하는 순간, 그 여자의 무기력한 몸이 절대적 허용을 증명하는 순간, 틈새로 훔쳐보던 관찰자는 같은 방 안의 공범이 되었다.
그 순간을 나는 이렇게 썼다:
"관음의 안전한 거리가 무너지고, 관찰은 참여로, 참여는 지워지지 않는 낙인으로 바뀐다."
왜?라는 질문은 던져지지 않는다. 어떻게? 만 기록된다.
그렇다면 더 깊은 질문이 남는다.
"왜"를 지웠을 때, 그 자리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 인과관계없이 어떻게 서사를 구축할 것인가? 동기 없는 행동을 독자는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나는 두 가지를 선택했다. 감각과 시간의 이중성.
나는 이 소설을 쓰며 하나의 원칙을 지켰다.
이 장면을 "폭력"이라고 명명하지 않는다.
"성폭력"이라는 단어도, "강간"이라는 단어도, "동의 없는 성관계"라는 법적 언어도 사용하지 않았다. 요청과 거절의 언어를 의도적으로 부재시켰다.
왜?
이 언어들이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동의"와 "거절"의 언어로 폭력을 이해하려 한다. 그녀가 "싫다"라고 말했는가? 그가 "물었는가"?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는 이 프레임 자체가 무너진다.
의식이 없는 사람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절할 능력이 없는 사람에게 "왜 거절하지 않았는가"를 묻는 것은 폭력의 연장이다.
내가 쓴 여자는 의식이 거의 없는 상태다. 그녀는 "예"라고도 "아니요"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어떻게 쓸 것인가?
나는 "이미 성립된 상태"만을 기록하기로 했다.
소설 앞뒤에 이런 주석을 달았다:
"본문에 등장하는 신체 접촉은 동의·거절의 심리 묘사가 아니라, 이미 성립된 관계 상태의 지속을 기술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요청·설득·거절의 언어가 부재한 것은 폭력의 은폐가 아니라, 선택이 사전에 고정된 국면을 기술하기 위함이다."
"본문에 등장하는 행위는 상태를 설명할 수 있으나, 상태 자체를 새로 만들지는 않는다."
"동의"를 묻는 순간, 나는 그녀가 동의할 수 있는 주체였다고 전제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주체가 아니었다. 그녀는 "누구"가 아니라 "무엇"이 되어 있었다.
나는 이것을 정직하게 썼다:
"짐짝. 물건. 사물과 사람 사이 어딘가. 무게와 온도와 질감을 가진 55킬로그램의 살덩이."
이것이 더 정직한 묘사라고 생각했다. 그녀를 "사람"으로 복원하는 것은 사후의 윤리적 제스처일 수 있지만, 그 순간 그 방 안에서 그녀는 사물화 되어 있었다. 그 사실을 외면하면, 나는 폭력의 본질을 은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선택의 위험은 무엇인가?
독자가 이것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못할 위험. "동의"나 "거절" 없이도 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고 오해할 위험.
이 위험을 나는 안다. 하지만 더 큰 위험은 언어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어떤 폭력은 "동의 없음"으로 정의되지 않는다. 동의를 구할 수 있는 상황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명명하지 않았다.
대신 보여줬다. 축 늘어진 팔. 꺾인 손목. 벌어진 손가락. 초점 없는 눈동자. 게슴츠레한 시선. 100그램도 안 되는 압력으로 목을 감은 손.
독자는 스스로 판단할 것이다. 이것이 무엇인지.
심리를 지운 자리에 감각을 채웠다.
온도차 25도. 가죽 소파의 냉기 12도. 그 위에 늘어진 여자의 몸 내부, 37도. 손가락이 피부를 누르는 압력 100그램. 여자의 몸무게 55킬로그램. 약지의 실반지 두께 1밀리미터 미만. 소파 스프링이 삐걱대는 금속음. 숨이 막혔다 풀리는 생리적 반사음.
나는 심리를 제거한 자리에 감각만을 남겼다. 온도, 압력, 무게, 질감, 그리고 반복되는 물리적 소리들. 차가움과 열기, 신체가 서로 맞닿을 때 발생하는 저항과 마찰, 의지와 무관하게 발생하는 생리적 반사. 이것들은 해석 이전에 이미 몸에 각인된 사실들이었다.
왜 이토록 세밀하게 기록하는가?
감각은 거짓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심리는 왜곡될 수 있다. "나는 그때 무서웠다", "나는 흥분했다",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이런 진술들은 사후에 재구성된다. 기억은 스스로를 정당화하거나 미화하거나 왜곡한다. 하지만 감각은 몸에 새겨진다.
12도의 차가움. 37도의 뜨거움. 100그램의 압력. 이것들은 해석의 여지가 없다. 그저 존재한다.
그리고 바로 이 감각들이 낙인의 잔여다. 사건은 끝났지만, 감각은 남는다.
내가 쓴 남자가 십수 년 뒤에도 돌아가는 것은 "그날 밤의 의미"가 아니라 "그날 밤의 잔여"다. 이후의 서술에서도 같은 방식이 반복된다. 촉감과 온도, 재질의 차이, 그리고 신체가 사물처럼 취급되는 순간의 물성. 이 감각들은 의미를 설명하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는 잔여로 남는다. 그것들은 그의 몸에 각인되어, 아내를 안는 순간조차 그를 과거로 끌어내린다.
하지만 여기에 윤리적 긴장이 발생한다.
감각을 극도로 구체화하면, 그것은 폭력의 재현이 될 위험이 있다. 독자를 그 장면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그것은 관음을 반복하는 것 아닌가? 내가 쓴 남자가 관음자에서 가해자가 되었듯, 나는 독자를 관음자로 만드는 것 아닌가?
이 질문과 씨름하며 나는 하나의 원칙을 세웠다:
쾌락의 언어를 완전히 배제한다.
"기분 좋다", "느꼈다", "황홀하다", "흥분했다"—이런 언어는 한 줄도 쓰지 않았다. 대신 온도, 압력, 질감, 소리만 기록했다. 기계적으로. 해부학적으로. 마치 법의학 보고서처럼.
예를 들어 이 문장:
"그가 깊숙이 들어갈 때마다 그 젖은 살결이 뒤집히며 밖으로 말려 나왔고, 빠져나올 때는 진득한 점액이 실처럼 늘어졌다가 끊어졌다."
이것은 성적 흥분을 유발하기 위한 묘사가 아니다. 물리적 사실의 기록이다. 온도, 점도, 길이. 해석 없는 관찰.
이 전략이 완벽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감각의 구체성은 독자를 불편하게 만든다. 하지만 감각은 거짓말하지 않는다. 나는 이 위험을 기꺼이 감수하기로 했다.
다만 나는 확신한다. 추상적 언어("그는 그녀를 범했다")로는 낙인을 쓸 수 없다. 낙인은 구체적이다. 12도와 37도처럼. 플라스틱 단추의 지름처럼.
그리고 이 감각들은 시간을 넘어 작동한다.
소설은 두 개의 시간을 끊임없이 오간다.
하나는 십수 년 전 그날 밤.
지하실 룸. 눅눅한 소파. 환풍구 너머 빗소리. 타 타탁. 타타타탁. 미러볼의 빛이 회전하며 장면을 훑는다. 여자의 축 늘어진 몸. 실크 블라우스의 찢어진 단추. 게슴츠레한 눈동자. 약지의 가느다란 실반지—결혼반지라고 하기엔 애매한, 1밀리미터도 안 되는 두께.
다른 하나는 지금.
거실. 사과를 깎는 아내.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아내. 목욕 후 타월을 두른 아내. 브래지어를 착용하기 전 잠깐 드러나는 아내의 가슴.
두 시간대는 분리되어 있지 않다. 오히려 끊임없이 겹쳐진다.
아내의 따뜻한 살결 위로 그날 밤의 차가운 촉감이 투영된다. 아내가 소파 팔걸이에 몸을 기댈 때, 그는 소파 등받이의 차가운 가죽 질감과 그 위에 걸쳐진 허리의 곡선을 떠올린다.
주머니 속 플라스틱 단추를 만지작거릴 때, 그는 그날 밤으로 순간이동한다.
이것이 낙인이다.
과거는 과거로 머물지 않는다. 현재의 가장 일상적인 순간에 침투한다. 사과를 깎는 순간. TV를 보는 순간. 아내와 사랑을 나누는 순간. 그 모든 순간이 그날 밤에 오염되어 있다.
나는 이것을 서사 구조로 구현하고 싶었다. 그래서 과거와 현재를 교차 배치했다. 독자가 "지금" 장면을 읽다가 갑자기 "그날 밤"으로 끌려가고, 다시 "지금"으로 돌아오지만 이미 모든 것이 달라 보이도록.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지금, 거실에서 사과를 깎는 아내의 뒷모습 위로 그날의 서늘한 잔상이 겹쳐진다. 바닥으로 고꾸라졌던 그 여자의 상체와, 자신의 목을 감아쥐던 그 서늘하고 축축한 손길. 게슴츠레하게 자신을 바라보던 초점 없는 눈동자. 약지에 감긴 가느다란 실반지."
현재 시제("깎는", "겹쳐진다")와 과거 시제("고꾸라졌던", "감아쥐던")가 한 문장 안에 공존한다. 시제의 혼란이 아니다. 낙인의 시간성이 그렇다. 과거는 끝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 시제로만 쓸 수 없다.
하지만 더 복잡한 질문이 남는다.
이 시간의 겹침은 언제 시작되었는가? 행위의 순간? 관찰의 순간? 아니면 훨씬 이전, 그 자리에 있기로 선택한 순간?
소설은 이 질문에 명확히 답하지 않는다. 대신 여러 "순간들"을 보여준다.
웨이터가 여자를 끌고 들어오는 순간. 친구가 옷을 벗기는 순간. 주인공이 담배를 피우며 지켜보는 순간. 친구가 "네 차례"라고 말하는 순간. 주인공이 담배를 바닥에 비틀어 끄는 순간. 여자의 눈이 게슴츠레하게 그를 향하는 순간.
어느 순간이 결정적인가?
소설은 답하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는 자신의 답을 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답은 독자 자신에 대한 답이기도 할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내가 쓴 남자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는 참회하지 않는다.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 그날의 일을 "잘못"이라고 명명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날의 감각이 지금도 계속된다는 사실만을 기록한다.
왜 이렇게 썼는가?
대답은 이것이다: 낙인은 고통이 아니라 잔여이기 때문이다.
죄책감과 낙인은 다르다.
죄책감은 현재 진행형의 고통이다. "나는 지금 괴롭다." 하지만 고통은 시간이 지나면 무뎌질 수 있다. 마비될 수 있다. 용서받으면 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잔여는 다르다.
잔여는 사건이 끝난 뒤에도 남아 있는 것이다. 씻어내도 배어 있는 것. 지우려 할수록 더 선명해지는 것. 12도의 냉기처럼. 플라스틱 단추의 촉감처럼. 게슴츠레한 눈동자처럼.
낙인은 이 잔여가 몸에 각인된 상태다.
그리고 관음은 바로 이 잔여를 먹고 작동한다.
내가 쓴 남자가 십수 년 뒤에도 돌아가는 것은 "그날 밤의 의미"가 아니라 "그날 밤의 잔여"다. 아내를 안을 때마다 그 잔여가 활성화된다. 주머니 속 단추를 만질 때마다 그 잔여가 현재로 흘러넘친다.
이것이 낙인이다. 고통이 아니라 잔여. 끝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끝났는데도 남아 있는 것.
죄책감은 도덕적 주체를 전제한다. "나는 잘못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주체. "내가 선택했고, 그 선택이 틀렸다"라고 인정할 수 있는 주체. 죄책감은 행위자의 책임을 확인하고, 그 확인을 통해 도덕적 우주의 질서를 회복한다.
하지만 낙인은 그런 주체성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낙인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지각의 문제다. 내가 쓴 남자는 "잘못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의 감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세상을 보는 방식 자체가 바뀌어버렸다. 아내를 온전히 볼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조차 온전히 대면할 수 없다.
그것이 더 처절하다.
죄책감은 참회로 이어질 수 있고, 참회는 용서로 이어질 수 있고, 용서는 구원으로 이어질 수 있다. 서사적 완결이 가능하다. 하지만 낙인에는 그런 완결이 없다.
지각이 바뀌어버린 사람은 "용서받는" 것으로 원래대로 돌아갈 수 없다. 12도의 냉기를 잊을 수 없다. 플라스틱 단추의 촉감을 지울 수 없다. 게슴츠레한 눈동자를 떠나보낼 수 없다.
그래서 이 소설에는 카타르시스가 없다. 결말도 없다. 그저 이렇게만 말할 뿐이다:
"지금, 수년이 지난 지금, 그 눈빛은 여전히 그를 쫓아다닌다."
연민으로 읽힐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텍스트가 기록하는 것은 고통이 아니다. 죄책감을 느끼는 가해자는 자신을 도덕적 주체로 상정할 수 있다. "나는 나쁜 짓을 했지만, 그것을 인정한다"는 자리. 하지만 낙인에 잡힌 사람은 그 자리조차 가질 수 없다.
그는 그저 영원히 그날 밤에 묶여 있다.
그렇다면 피해자의 낙인은?
소설은 그 여자의 관점을 다루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왜냐하면 나는 그녀의 내면을 상상할 권리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엇"이 되어 있었고, 그 "무엇"의 내면을 복원하는 것은 또 다른 폭력일 수 있다.
대신 나는 가해자의 낙인만 썼다. 그리고 이것이 독자에게 불편함을 준다는 것을 안다. "왜 가해자의 고통을 쓰는가?" 하는 질문.
대답은 이것이다: 낙인은 고통이 아니기 때문이다. 낙인은 잔여다. 그리고 그 잔여를 보여주는 것은, 폭력이 어떻게 영원히 계속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이 소설을 쓰는 과정은 고통스러웠다.
특히 성애 장면을 쓸 때, 나는 손이 떨렸다.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려놓고 한참을 망설였다. 이 문장을 써도 되는가? 이 디테일을 넣어도 되는가?
하지만 지우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장면들이 없으면, 낙인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낙인은 추상적이지 않다. 12도의 냉기처럼 구체적이다. 그 구체성을 회피하면, 나는 거짓을 쓰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썼다. 하지만 쾌락의 언어는 배제했다. 흥분을 유발하는 문장 구조를 피했다. 대신 기계적으로, 해부학적으로, 법의학 보고서처럼 썼다.
하지만 이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한가?
독자가 이것을 폭력의 재현으로 느낀다면, 나는 그 판단을 받아들일 것이다. 다만 이것만은 안다:
추상적 언어로 폭력을 쓰는 것은 더 큰 폭력이다.
"그는 그녀를 범했다"—이 한 문장으로 끝내는 것. 그것은 편하다. 작가에게도, 독자에게도. 하지만 그것은 폭력의 구체성을 은폐한다.
폭력은 추상적이지 않다. 폭력은 55킬로그램의 무게이고, 100그램의 압력이고, 12도의 냉기다.
나는 이것을 외면하지 않기로 했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안다.
이 선택이 누군가에게는 견딜 수 없는 폭력일 수 있다는 것을. 특히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에게는.
그래서 나는 소설 앞에 경고를 달았다. "이 텍스트는 불편할 것이다. 어떤 독자에게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경고가 면죄부는 아니다.
나는 여전히 고민한다. 이 소설을 세상에 내놓는 것이 옳은가?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는데?
이것이 윤리적 글쓰기인지는 독자가 판단할 것이다. 나는 침묵이 더 큰 폭력이라고 믿었고, 그 믿음 위에서 썼다.
폭력을 말하지 않는 것. 낙인을 기록하지 않는 것. 불편함을 회피하는 것. 그것은 폭력이 계속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썼다. 손이 떨리면서도.
왜 지금 이 이야기를 쓰는가?
사실 이 질문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는 시대적 맥락이다.
미투 이후, 우리는 폭력에 대해 더 많이 말하게 되었다. "동의"의 개념이 확장되었다. "No means No"에서 "Yes means Yes"로. 이것은 중요한 진전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느꼈다. "동의" 담론이 포착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의식이 없는 사람. 극도로 취한 사람. 약물에 노출된 사람. 권력관계가 극단적으로 불균형한 상황. 이런 경우, "동의"를 묻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나는 이 영역을 쓰고 싶었다. 동의/거절의 프레임으로 포착되지 않는, 하지만 분명히 폭력인 그 무엇.
다른 하나는 개인적 이유다.
나는 오랫동안 관음에 대해 생각해 왔다. 내가 "본" 것들. 목격했지만 개입하지 않은 것들. 알았지만 침묵한 것들.
나는 가해자가 아니다. 하지만 방관자였던 적은 있다. 그리고 그 방관이 나를 어떻게 바꿨는지 안다.
이 소설은 그 고백이다.
물론 소설은 픽션이다. 내가 쓴 장면은 실제로 일어난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장면이 담고 있는 질문은 실제다.
나는 언제 관찰자에서 공모자가 되었는가? 내가 본 것은 나를 어떻게 바꿨는가?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이 질문들과 씨름하며 소설을 썼다.
이 소설을 읽는 독자는 어디에 서 있는가?
독자 역시 관음의 위치에 있다.
소설 속 남자가 친구의 행위를 지켜보았듯, 독자는 그 남자의 경험을 지켜본다. 안전한 거리에서. 스크린 너머에서. 책장 너머에서.
하지만 나는 그 안전한 거리를 불편하게 만들려 했다.
극도로 구체적인 감각 묘사는 독자를 그 장면 안으로 끌어들인다. 12도의 냉기, 37도의 열기. 독자는 읽고 있다고 믿지만, 어느 순간 느끼고 있음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리고 느끼는 순간, 독자는 더 이상 안전하지 않다.
관음은 잔여를 먹고 작동한다. 독자가 이 텍스트를 읽으며 느끼는 것은 사건 자체가 아니라, 사건이 남긴 잔여다.
나는 이 이동을 임시로 "관음의 전이"*라고 불러두었다.
소설 속 남자는 관음에서 시작해 가해자가 되었다. 독자는 관음에서 시작해 어디로 가는가?
물론 독자는 실제로 가해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독자는 자신에게 묻게 된다:
나는 언제 관찰자에서 공모자로 넘어가는가?
내가 '본' 타인의 고통은 어디에 남아 있는가?
시선은 언제 가해가 되는가?
이것은 소설의 질문이자, 독자 자신에 대한 질문이다.
나는 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독자가 불편해지길 바란다. 책을 덮고 나서도 그 불편함이 남아 있길 바란다. 마치 소설 속 남자가 주머니 속 플라스틱 단추를 만지작거리듯, 독자도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게 되길.
하지만 이것은 윤리적으로 정당한가?
독자에게 불편함을 주는 것. 독자를 관음의 위치에 놓는 것. 나는 확신할 수 없다.
다만 이것만은 안다. 안전한 거리에서 폭력을 소비하는 것, 그것을 "이해했다"라고 말하는 것, 책을 덮으면 끝나는 것—그런 식의 문학은 쓰고 싶지 않았다.
불편함 없이 낙인을 말할 수 없다. 안전한 거리 없이 관음을 직면할 수 없다.
이 질문을 보편화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는 모두 어떤 식으로든 관음의 경험을 한다.
뉴스에서 폭력 사건을 본다. SNS에서 누군가의 고백을 읽는다. 거리에서 다툼을 목격한다. 영화에서 폭력 장면을 본다. 소설에서 타인의 취약함을 엿본다.
그때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관찰자인가, 공모자인가?
이 경계는 명확하지 않다.
예를 들어, 미투 운동 당시 우리는 수많은 증언을 읽었다. 그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침묵을 깨는 일.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타인의 트라우마를 "소비"하기도 했다. 다음 증언을 기다렸다. 더 충격적인 이야기를 원했다.
그 순간 우리는 어디에 있었는가?
나는 이것을 판단하지 않는다. 다만 질문한다.
보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의 거리는 실제로 얼마나 되는가? 우리는 "나는 보기만 했다"라고 말하며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소설 속 남자는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다. 나는 관객이다. 나는 벽에 기대어 담배를 피우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거리는 무너졌다.
우리의 거리도 그렇게 무너지는가?
언론이 폭력을 보도할 때, 우리는 "알 권리"와 "피해자의 사생활" 사이에서 고민한다. 그 고민은 진지하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는 클릭한다. 기사를 읽는다. 댓글을 단다.
그 순간 우리는 관찰자인가, 공모자인가?
문학은 이 질문에 어떻게 응답하는가?
나는 이 소설을 쓰며 계속 이 질문과 씨름했다. 내가 이 장면을 쓰는 것, 그것은 폭력의 재현인가 아니면 폭력의 기록인가? 독자에게 이것을 읽게 하는 것, 그것은 윤리적인가?
명확한 답은 없다. 하지만 나는 이 긴장을 회피하지 않고 텍스트 안에 새기려 했다.
이 방법론이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다.
한강의 『채식주의자』에서 신체는 저항의 언어가 된다. 영혜는 말을 거부하고, 대신 몸으로 말한다. 먹지 않음으로써. 사라짐으로써. 한강은 폭력을 직접 재현하지 않고, 폭력이 남긴 흔적을 섬세하게 추적한다.
무라카미의 『노르웨이의 숲』에서 성애는 상실의 은유다. 와타나베와 나오코의 관계는 육체적이지만, 그 육체성은 끝까지 슬픔으로 물들어 있다. 무라카미는 성애를 쾌락이 아닌 애도의 방식으로 쓴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다른 선택을 했다.
한강은 시적 언어로 폭력을 우회한다. 아름다움으로 고통을 감싼다. 나는 그 반대를 택했다. 시적이지 않은 언어. 기계적이고 해부학적인 언어. 12도, 37도, 100그램.
무라카미는 감정의 언어로 상실을 쓴다. "슬프다", "그립다", "사랑한다". 나는 감정의 언어를 배제했다. 대신 감각의 언어만 남겼다.
왜 이런 선택을 했는가?
한강과 무라카미가 쓴 것은 피해자의 관점이다. 영혜의 고통. 나오코의 상실. 하지만 나는 가해자의 낙인을 쓰고 싶었다.
가해자의 낙인은 아름답지 않다. 시적이지 않다. 슬프지도 않다. 그것은 그저 영원히 계속되는 잔여일 뿐이다.
그래서 나는 시적 언어를 버렸다. 감정의 언어를 버렸다. 차갑고 기계적인 언어만 남겼다.
이것이 새로운 시도라고 믿는다. 가해의 낙인을 쾌락도 감정도 없이 오직 감각으로만, 오직 잔여로만 쓰는 것.
이제 끝으로 가야 할 시간이다.
하지만 끝을 쓰기 전에, 나는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
이 글을 읽으며 당신은 무엇을 느꼈는가? 불편했는가? 흥미로웠는가? 화가 났는가? 공감했는가?
당신이 느낀 것은 무엇이든 정당하다. 나는 판단하지 않는다.
다만 질문한다.
당신이 본 것은 당신을 어떻게 바꾸는가?
뉴스에서, SNS에서, 거리에서, 책에서 당신이 본 타인의 고통. 그것은 당신 안에 어떻게 남아 있는가?
당신은 그저 지나쳤는가? 아니면 무언가 바뀌었는가?
보는 것과 행하는 것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되는가?
당신은 "나는 보기만 했다"라고 말하며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시선은 언제 가해가 되는가?
타인의 취약함을 보는 것. 그것을 소비하는 것. 그것에 대해 말하는 것. 이것들 사이의 경계는 어디에 있는가?
이 글은 이렇게 질문한다. 우리는 언제, 어떤 방식으로 공모자가 되는가.
답은 있다. 하지만 그 답은 각자가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답은 편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보기만 했다'라고 말하고 싶어지는 순간을, 한 번쯤은 경험하기 때문이다.
완벽하게 깨끗한 관찰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보는 순간 이미 개입한다. 보지 않는 것조차 선택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는 오히려 묻고 싶다.
우리는 불편함을 어디까지 회피해 왔는가. 안전한 거리는 실제로 얼마나 안전한가. "보기만 했다"는 말은 언제부터 면죄부가 되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질문을 계속할 것.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
이 질문을 던지는 순간, 당신은 이미 다른 곳에 서게 된다.
이 글은 작품이 아니다. 작품이 만들어진 입구다.
소설 「낙인의 서사, 관음연대기」를 쓰는 과정에서 내가 고민한 것들, 선택한 것들, 포기한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왜 이런 방식으로 쓸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설명이다.
이 에세이가 다룬 소설 「1밀리미터의 실반지」는 포스타입https://posty.pe/8ctrg4에 게재되어 있다. 『낙인의 서사, 관음연대기』 연작의 다른 작품들은 순차적으로 공개될 예정이다.
그 텍스트는 이 글보다 훨씬 불편할 것이다. 12도의 냉기가 직접 피부에 닿을 것이다. 게슴츠레한 눈동자가 당신을 바라볼 것이다.
어떤 독자에게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의도된 것이다.
불편함 없이 낙인을 말할 수 없다. 안전한 거리 없이 관음을 직면할 수 없다.
이 소설은 독자에게 안전을 제공하지 않는다. 대신 질문을 남긴다.
두 개의 시간이 겹쳐지는 순간. 플라스틱 단추를 만지작거리는 순간. 아내의 몸에서 다른 여자를 보는 순간.
그 순간들이 당신 안에도 있는가?
당신의 주머니 속에도 어떤 단추가 있는가?
당신이 만지작거리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