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침묵의 질감>

<시식의 궤적> 프리퀄

by leehyojoon ARCH

[일러두기]

본 작품은 <시식의 궤적>*과 정서적 궤를 같이하는 프리퀄 작업의 연장선에 있으나, 서사 기법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문체적 실험을 시도한 작업물입니다.


그 작업이 인물 간의 감정적 파동을 밀도 있게 추적했다면, 본고는 철저히 하드보일드(Hard-boiled) 서술을 지향합니다. 인물의 내면 해석을 배제한 채 건조한 행동과 파편화된 감각만을 나열함으로써, 독자가 인과율의 틀을 벗어난 파국의 실체와 직접 대면하게끔 설계했습니다.


동일한 비극적 원형이 문체의 변주를 통해 얼마나 다른 온도로 치환될 수 있는지에 대한 기록입니다.






남자는 아내가 집을 나가던 날을 기억한다.


캐리어 바퀴 소리.

현관문 닫히는 소리.

그리고 침묵.


남자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 승희가 두고 간 머그컵이 테이블에 있었다.

컵 가장자리에 립스틱 자국이 남아 있었다.


남자는 그 자국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지워지지 않았다.


부엌으로 가 수세미에 세제를 묻혔다.

컵 가장자리를 문지르자 붉은 자국이 거품에 섞여 희미해지다 사라졌다.

남자는 물기를 닦아 컵을 찬장 안쪽, 원래 있던 자리에 정확히 맞추어 넣었다.


지워지지 않는 것은 없었다.




승희를 처음 만난 건 대학 MT였다.


그녀는 텐트 앞에서 라면을 끓이고 있었다.

불이 잘 붙지 않았다.

남자가 다가가 라이터를 건넸다.


"고마워요."

그녀가 웃었다.


3개월 후 사귀기 시작했다.

1년 후 같이 살기 시작했다.

2년 후 결혼했다.




처음 3년은 좋았다.


승희는 아침마다 커피를 내려줬다.

남자가 좋아하는 원두로.

우유를 조금만 넣어서.


저녁에는 함께 소파에 앉아 드라마를 봤다.

승희가 남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남자는 그녀의 머리카락 냄새를 맡았다.

샴푸 향이었다.


밤에는 침대에서 껴안고 잤다.




4년째부터 달라졌다.


승희는 더 이상 아침 커피를 내려주지 않았다.

남자가 일어났을 때 이미 출근하고 없었다.


저녁에도 함께 있는 시간이 줄었다.

승희는 회식이 많다고 했다.

남자는 혼자 저녁을 먹었다.


밤에도 침대에 함께 누웠지만 꺼안지 않았다

등을 돌리고 잤다.

섹스도 줄었다.


한 달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

석 달에 한 번.


남자가 먼저 시도하면 승희는 피곤하다고 했다.


"오늘은 좀..."


"알았어."


남자는 돌아누웠다.

천장을 봤다.

옆에서 승희의 숨소리가 들렸다.

이미 자고 있었다.




5년째 봄.


식탁 위에 승희의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승희가 출근하며 끄지 않은 화면 보호기 사이로 알림 창이 떴다.


메신저였다.

로그아웃되지 않은 대화창이 남자의 시선에 결렸다.


의도한 건 아니었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었고, 화면이 켜져 있었고, 메시지가 떠 있었다.


"오늘 밤 괜찮아?"

발신자 이름은 '팀장님'이었다.


남자는 마우스를 움직였다.

스크롤을 천천히 내렸다.

손가락은 떨리지 않았다.


"지난번 호텔 괜찮았어."

"응, 좋았어. 침대가 편했어.”

“오늘은 더 늦게까지 될 것 같아. 괜찮지?”

“당연히.”


남자는 창을 닫지 않았다.

최소화 버튼을 눌렀다.

창이 작업표시줄 쪽으로 작아지며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부부상담센터 홈페이지가 떠 있었다.


주방으로 가서 물을 한 컵 마셨다.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감각에만 집중했다.


이제야 손이 떨렸다.


화장실로 갔다.

변기에 토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위액만 나왔다.


다시 거실로 나왔다.
노트북 화면을 보았다.
부부상담센터 하단에 적힌 전화번호를 눌렀다.


연결음이 갔다.


한 번.
두 번.


남자는 종료 버튼을 눌러 전화를 끊었다.

통화 기록에 번호가 남아 있었다.


남자는 노트북을 닫았다.




그날 밤.


승희가 돌아왔다.

11시였다.


"회식 길었네."

"응. 팀장님이 2차까지 가자고 해서."

목소리는 평온했다.


가방을 내려놓았다.

코트를 벗었다.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검은색.

몸에 붙는 실루엣.

작년 생일 때 사준 거였다.


"샤워할게."


승희가 욕실로 들어갔다.

물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승희의 가방을 보았다.

열어봤다.

안에 호텔 카드키가 있었다.


<Grand Hyatt>


카드키를 다시 넣었다.

소파에 앉았다.


욕실 문이 열렸다.

승희가 나왔다.

머리가 젖어 있었다.

수건으로 물기를 닦고 있었다.

잠옷을 입고 있었다.

면 소재. 단추가 앞에 있었다.


침대에 누웠다.


"자."

승희가 말했다.


남자도 침대에 누웠다.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승희의 숨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었다.

이미 자고 있었다.


남자는 눈을 감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남자는 회사에 가지 않았다.

병가를 냈다.


승희가 출근한 후, 남자는 집 안을 돌아다녔다.


서랍을 열었다.

옷장을 열었다.

화장대를 열었다.


승희의 옷.

승희의 화장품.

승희의 액세서리.


하지만 그 안에 승희는 없었다.




2주 후.


남자는 승희를 미행했다.


회사 앞에서 기다렸다.

승희가 나왔다.

혼자가 아니었다.


정장을 입은 남자가 있었다.

40대쯤 됐다.

키가 컸다.


둘은 택시를 탔다.

남자도 택시를 탔다.


"앞 차 따라가 주세요."


기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따라갔다.


호텔 앞에서 택시가 섰다.

승희와 그 남자가 내렸다.

로비로 들어갔다.


남자도 내렸다.

요금을 냈다.

로비로 들어갔다.


승희와 그 남자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있었다.


문이 닫혔다.

12층에서 멈췄다.



남자는 로비 소파에 앉았다.


정면의 대리석 벽면을 보았다.

가로 줄눈 14개,

세로줄눈 8개.


남자는 그 교차점을 눈으로 훑으며 셌다.

112개.


숫자를 다 세자 1시간이 지나 있었다.

다시 처음부터 세기 시작했다.


시간이 자났다

2시간.

3시간.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승희와 그 남자가 나왔다.


승희의 머리가 약간 흐트러져 있었다.

옷은 단정했다.

립스틱은 지워져 있었다.


남자는 그녀의 입술 대신, 어깨 뒤로 보이는 로비 디지털시계 숫자가 바뀌는 것을 보았다.


21:42.



그 남자가 승희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승희가 웃었다.


남자는 소파 뒤로 몸을 숨겼다.


둘은 로비를 나갔다.

남자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집에 돌아왔을 때 승희는 이미 와 있었다.


"어디 갔다 와?"

승희가 물었다.


"산책."

"이 시간에?"

"응."


승희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샤워를 했다.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침대에 누웠다.


남자도 샤워를 했다.

침대에 누웠다.


불을 껐다.


어둠 속에서 승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당신."


"응."

"우리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남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몰라?"

승희가 다시 물었다.


"... 미안해."

"뭐가?"

"그냥... 미안해."


침묵.



승희의 숨소리가 들렸다.

규칙적이었다.

자고 있었다.


남자는 눈을 감지 못했다.




승희가 떠나기 한 달 전.


저녁 8시.

남자는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었다.

뉴스였다.

아나운서가 경제 지표를 말하고 있었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부엌에서 설거지 소리가 들렸다.

그릇이 싱크대에 부딪히는 소리. 물 흐르는 소리.


승희가 부엌에서 나왔다.

손을 닦으며 거실로 왔다.

소파 반대편에 앉았다.


"여보."

승희가 말했다.


남자는 TV를 보고 있었다.


"여보."

승희가 다시 불렀다.


남자가 고개를 돌렸다.

"응."


"우리... 얘기 좀 해야 할 것 같아."

"무슨?"

"우리 관계."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TV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또 그러네."

승희가 말했다.


"또 도망가려고 하네."

"도망 아니야."

"그럼 뭔데?"

승희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대체 뭔데? 나한테 대답 한 번 제대로 해본 적이 있어?"


남자는 리모컨을 들었다.

채널을 돌렸다. 드라마가 나왔다.

또 돌렸다.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TV 꺼."

승희가 말했다.


남자는 채널을 계속 돌렸다.


"TV 끄라고!"

승희가 소리쳤다.

일어섰다. 남자 앞으로 와서 리모컨을 빼앗았다.

TV를 껐다.


거실이 조용해졌다.

밖에서 차 지나가는 소리.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시계 초침 소리.



승희가 물었다.

"나한테... 뭐가 부족해?"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내가 뭘 잘못했어?"


남자는 천장을 쳐다봤다.


"내가 뭘 더 해야 돼?"

승희의 목소리가 떨렸다.


"말 좀 해줘. 응? 제발."


남자는 입을 열었다.

"... 미안."


"미안?"

승희가 웃었다. 웃음이 아니었다.


"그게 다야?"


남자는 일어섰다.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


"어디 가?"

"담배."

"거짓말. 그냥 나가고 싶은 거잖아."


남자는 신발을 신었다.


"이야기할 게 없어."


"없긴 뭐가 없어!"

승희가 소리쳤다.


"우리 이렇게 된 게 몇 달인데! 한 번도 안 안았잖아!"


남자가 문을 열었다.


"내일 얘기하자."


"내일도 똑같을 거 알면서!"

승희가 울었다.

목소리가 무너졌다.


"제발... 돌아와서... 제발..."


남자는 문을 닫았다.


계단을 내려갔다.

편의점으로 갔다.

담배를 샀다.

벤치에 앉아 불을 붙였다.


연기가 겨울 공기 속으로 퍼졌다.


한 시간이 지났다.

집으로 돌아갔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불이 꺼져 있었다.


남자는 소파에 누웠다.

천장을 쳐다봤다.


천장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승희가 떠나기 2주 전.


남자가 회사에서 돌아왔을 때 승희는 거실 바닥에 앉아 있었다.

2주 전 보았던 그 노트북을 펼쳐놓고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뭐 봐?"

남자가 물었다.


승희가 고개를 들었다. 눈이 빨갰다.

"아무것도."


승희는 노트북을 닫지 않고 화면을 남자 쪽으로 돌렸다.


부부상담센터 홈페이지였다.

남자의 시선은 홈페이지 하단에 최소화되어 있는 메신저 아이콘에 머물렀다.


남자는 침실로 갔다.

옷을 갈아입었다.

거실로 나왔다.


승희는 여전히 바닥에 앉아 있었다.


"저녁 먹었어?"

"응."

"뭐 먹었는데?"

"김밥."

"어디서?"

"편의점."


남자는 부엌으로 갔다.

냉장고를 열었다.

김치와 반찬이 들어 있었다.

일주일 전과 똑같았다.


라면을 끓였다.

냄비에 물을 붓고 면을 넣었다.

끓는 소리가 났다.


거실에서 승희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

"응."

"우리... 상담받아볼까?"

"뭐?"

"부부 상담."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냄비 안에서 소용돌이치며 익어가는 라면 면발의 굴곡을 보았다.

하나가 끊어져 가라앉았다.


수프를 넣었다.

저었다.


"답 안 할 거면 그냥 싫다고 해."


남자는 라면을 그릇에 담아 거실로 가져왔다.

테이블에 놓고 앉았다.


"먹어."

"난 먹었다니까."

"김밥 하나로?"

"... 응."


남자는 젓가락을 들었다.

라면을 먹었다.

뜨거웠지만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승희가 그 노트북 화면을 남자 쪽으로 돌렸다.


"이거 봐. 여기 괜찮대. 후기도 좋고."

그 상담센터 홈페이지였다.

"한 번만... 가보자. 응?"


남자가 젓가락을 놓았다.

"승희야."

"응."

"우리... 그냥 이대로 살면 안 돼?"


남자는 끝내 승희의 눈을 보지 않았다.


승희가 노트북을 닫았다.

남자를 쳐다봤다.


"이대로?"

"응."

"이게 뭔데? 이게 대체 뭔데? 부부야?"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체 우리가 뭐야?"


남자는 다시 라면을 먹었다.


승희가 일어나 침실로 들어갔다.

문을 닫았다.


남자는 혼자 라면을 다 먹었다.

그릇을 설거지했다.

소파에 앉았다.

TV를 켰다.


새벽 2시까지 TV를 봤다.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떠나던 날.


아침 9시.

남자가 눈을 떴을 때 승희는 이미 짐을 싸고 있었다.


캐리어가 거실에 놓여 있었다.

큰 것.

승희가 옷을 개서 넣고 있었다.


남자는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뭐 해?"

"보면 몰라?"

옷을 계속 넣었다.


"어디 가는데?"

"나가."

"어디로?"

"엄마 집."


승희가 캐리어를 닫았다.

지퍼를 올렸다.


"언제 돌아와?"


승희가 남자를 쳐다봤다.


"안 돌아올 수도 있어."

"... 뭐?"

"이혼하자."

목소리는 평온했다.


남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놀란 척은 하지 마. 당신도 알고 있었잖아. 우리 이미 끝났다는 거."


남자는 소파에 앉았다.


승희가 화장실로 가 세면도구를 챙겼다.

가방에 넣었다.


"승희야."

남자가 말했다.


승희가 멈췄다.


"미안해."


승희가 웃었다. 역시 웃음이 아니었다.


"그게 다야?"


남자는 대답하지 못했다.


승희가 가방을 들고 현관으로 갔다. 신발을 신었다.


"한 가지만 물어볼게."

승희가 말했다.


"네가 나를... 사랑한 적이 있긴 했던 거야?"


남자는 입을 열었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승희의 발등 옆에 떨어진 작은 머리카락 한 올을 보고 있었다.


승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모르겠구나."


문을 열었다.

"잘 살아."

문이 닫혔다.


캐리어 바퀴 소리가 복도에서 멀어졌다.

엘리베이터 소리가 넜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그다음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남자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담배를 꺼냈다.

불을 붙였다.

피웠다.


연기가 천장으로 올라갔다.


재떨이가 가득 찼다.

비우지 않았다.

가득 찬 꽁초들 위에 새 꽁초를 꾹 눌러 껐다.


재가 거실 바닥으로 흩어졌지만 닦지 않았다.


TV를 켰다.

아침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오늘은 전국이 맑겠습니다."


남자는 담배를 피우며 기상캐스터의 웃는 입 모양을 보았다

아까 닦아낸 립스틱 자국이 떠올랐다.


침묵.




한 시간이 지났다.

두 시간이 지났다.

점심때가 됐다.


남자는 일어나지 않았다.


재떨이를 보았다.

화면은 켜져 있었다.

다시 재떨이를 보았다.


저녁이 됐다.


여전히 소파에 앉아 있었다.


밤이 됐다.

TV는 계속 켜져 있었다.


남자는 계속 담배를 피웠다.


재떨이가 가득 차있었다.






[작가노트: 침묵의 질감]


1. 틀의 삭제: 왜 '이유'를 말하지 않는가

이 소설에는 서사의 관습적인 틀이 없다. 불륜이 무관심의 결과인지, 무관심이 불륜의 대가인지 밝히지 않는다. 관계의 선후 관계를 삭제한 이유는 실제 우리의 파국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무엇이 먼저였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엉망으로 뒤엉킨 상태, 그 '인과관계의 실종' 자체가 이 소설의 핵심이다. 독자는 '누가 더 잘못했는가'라는 도덕적 판단을 내릴 근거를 박탈당한 채, 오로지 고립된 두 인간의 건조한 표면만을 목격하게 된다.


2. 말없음의 폭력: 침묵이라는 선택

주인공 남자의 침묵은 무능함이 아니라 '적극적인 방관'*이다. 그는 아내의 배신을 알고 구토를 하지만, 그 감정을 동력 삼아 싸우거나 해결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로비의 줄눈 숫자를 세고, 라면 면발의 굴곡을 관찰하며, 립스틱 자국을 기계적으로 닦아낸다. 감정을 이성적인 행위나 사물 속으로 도피시키는 이 기계적 서늘함은, 뜨거운 분노보다 더 잔인한 폭력이 된다. '말하지 않음'으로써 상대를 존재하지 않는 배경으로 전락시키는 과정, 그것이 이 소설이 보여주고자 하는 침묵의 질감이다.


3. 결론 없음의 허무: 닫히지 않는 원

아내가 떠난 후에도 남자는 울지 않는다. 재떨이는 넘치고, TV에서는 내일의 맑은 날씨를 예보한다. 비극은 완성되지 않고 그저 '지속'된다. 독자는 남자가 각성하거나 무너지기를 기대하지만, 소설은 남자를 여전히 그 소파 위에 방치한다. 립스틱 자국을 닮은 기상캐스터의 입 모양을 보며 새 담배를 피우는 마지막 장면은, 이 고통스러운 무미건조함이 앞으로도 무한히 반복될 것임을 암시한다.


4. 독자에게 건네는 '불편함'

이 글은 독자를 위로하거나 카타르시스를 주지 않는다. 오히려 독자의 손등을 차가운 금속으로 문지르는 듯한 불쾌감을 의도했다. 노트북이라는 동일한 매개체를 통해 불륜의 언어와 상담의 언어가 교차하는 지점, 그 소름 끼치는 괴리감을 독자가 함께 견뎌내길 바랐다. 결국 이 소설이 남기는 것은 명확한 결론이 아니라, '지워지지 않는 립스틱 자국'처럼 마음 한구석에 남은 찝찝하고 서늘한 잔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