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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눈 Jul 21. 2019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좋은 약도 과하면 독이야

 지방의 작고 한적한 도시의 동네 약국은 곧잘 동네 사람들의 사랑방이 되곤 했다. 아직 젊던 약사는 종종 한참 걸음이 신기하고 말이 재미있던 어린 자매를 데려오곤 했는데, 덕분에 두 딸은 동네가 키운 자식이나 다름없이 자랐다. 동네 어른들이 파스나 영양제를 사며 아이들이 요 앞 사거리에서 놀고 있다고 약사에게 넌지시 알려주고, 놀다가 배가 고파질 시간이 되면 약국 옆의 제과점 아저씨가 갓 구운 빵을 쥐어주고, 우연히 마주친 길 건너 슈퍼마켓의 주인 아주머니가 젤리를 건네던 일상을 겪으며 자랐다는 뜻이다.


 아직 막내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의 기억이다. 둘째와 내가 한글을 익힌 곳은 아빠의 작은 약국의 약 진열장이었고, 어려운 외국의 약 이름들 덕분에 보통은 성인도 발음할 일이 없는 이상한 발음과 글자까지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아직 의약분업이 제대로 실행되지 않던 시기인지라 동네 사람들은 좀 떨어진 병원보다 아빠의 작은 약국을 먼저 찾았는데, 덕분에 온갖 따뜻한 사람과 온갖 이상한 장면을 마주해야 했다.


 우리가 살던 동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던 제지 공장에서 일하시던 아저씨는 일을 하시던 도중 손가락이 잘렸지만 병원 응급실이 아닌 아빠의 약국을 먼저 찾았다. 뜻밖의 방문에 아빠는 뒤에 있던 어린 딸의 시야를 가려주기 위해 애를 쓰셨지만, 안타깝게도 어린아이의 시야는 성인의 생각보다 훨씬 낮고 넓었다. 또 술 드시면 안 된다는 아빠의 말에 정말 딱 한 잔도 마시면 안 되냐고 특이한 곳에서 협상을 요구하는 아저씨도 계셨고, 비가 오기 전에는 무릎이 시리다며 어떤 기상학자보다 정확한 확률로 날씨를 맞추는 할머니도 계셨다.


 그래도 아직은 나름대로 인정이 넘치던 시대였다. 간혹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으신 분들이 약을 살 돈이 없어 기르시던 닭이 낳은 달걀이나 직접 짠 참기름 등을 건네곤 하셨는데, 아빠는 그런 물물교환에 가까운 거래도 곧잘 받아주셨다. 그리고 약국 앞 평상에 모여 계시던 동네 어르신들께 잔소리도 잊지 않았다. 지난번에 받아가신 약 집에 뒀다가 나중에 드시지 말고 버리시라고. 그리고 다른 분들도 약 서로 나눠 드시지 말라고. 유통기한 지난 약은 제발 버리고, 안 아프다고 해서 마음대로 약 끊지 마시라고.


약은 약사에게. 먹기 전이나, 먹은 후나.




 귀찮거나, 알지 못하거나. 수많은 이유로 약은 강이나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가장 큰 원인은 하수처리장의 시설로는 약물의 화학 성분을 모두 걸러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남은 약을 종량제 봉투에 버리거나 변기나 하수구에 버리거나 약을 먹은 사람의 배설물의 형태로 하수처리장에 각종 화학물질이 유입되게 되는데, 많은 화학물질들이 하수처리 과정에서 제대로 처리되지 못하고 강이나 하천으로 유입된다. 그리고 강은 바다로 흘러간다는 자연의 섭리에 따라, 이 약물은 결국 바다까지 흘러가게 된다.


 이 과정은 하천 생태계와 해양 생태계 모두에게 치명적인 일이다. 어떤 약물이 어떤 종의 체내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 완전히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항생제 성분에 내성을 가진 슈퍼 박테리아가 등장하거나, 피임약 성분 때문에 수컷 물고기가 암컷 물고기가 되는 문제는 이미 잘 알려져 있지만, 이 외에도 문제는 많다. 가축을 기르기 위해 사용되는 진통제 성분 때문에 난데없이 독수리가 날벼락을 맞았고, 일부 항우울제에 포함된 성분은 조개의 산란 행동을 교란시킨다.


 게다가 인류가 소비하는 화학물질의 종류와 양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도 문제가 된다. 꼭 약물에 한정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하다는 의식주만 따져봐도 엄청나다. 음식이야 말할 것도 없고, 커피, 담배, 술 등의 기호식품에 포함된 카페인, 니코틴 등의 온갖 화학물질은 덤이다. 옷 역시 합성 섬유인 폴리에스테르나 나일론, 스판덱스 등의 재질이 포함된 옷을 입고, 현대인의 집 역시 각종 화학물질로 만들어져 있다. 화장품은 또 어떤가. 화장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도 치약이나 샴푸 등은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가 인간이기에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보통의 상황에서 우리는 최상위 포식자라는 것이다. 각종 화학물질은 먹이사슬을 거치며 축적되는데, 이를 생물농축이라 한다. 배출이 어려워 체내에 지속적으로 축적되거나, 체내에서 다른 성분과 대사반응을 일으켜 축적되기 쉬운 형태로 변화하는 등 방법도 다양하다. 그리고 생물농축의 결과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최상위 포식자이다. 일반적으로 먹이사슬에서 상위 포식자로 갈수록 생물농축은 더 심각해지고, 그 차이는 몇만 배에 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종 알약. 사진 속 약과 글의 내용은 무관합니다.




농어. 연구에 따르면 농어의 행동은 옥사제팜의 농도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물이 오염된다면 가장 큰 피해를 입는 생물은 당연히 물에 사는 물고기를 비롯한 수서생물이다. 그들의 체내에서 우리가 눈에 보이지 않아 제대로 신경쓰지 않던 사이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미 이들의 체내에는 화학물질이 행동양식까지 바꿀 정도로 축적되어 있다. 2013년 세계적인 과학 잡지『Science』에 발표된 논문에서는 항불안제의 성분인 옥사제팜의 농도에 따른 농어의 행동 변화를 관찰했는데, 이 연구에서는 현재 실제로 도심의 하천에서 검출되는 옥사제팜의 농도 역시 실험 조건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연구진은 일반적으로 조용하고 무리를 지어 활동하는 농어가 도심 하천 수준의 약물이 포함된 물에서는 더 용감하게 행동하고, 사회성이 떨어지며, 먹이를 빠르게 소비한다는 놀라운 결과를 도출한다. 옥사제팜은 신경 안정제에 주로 포함되는 성분으로, 불안증을 해소하게 하는 약물이다. 그러니까, 농어가 항불안제를 복용한 것과 같은 효과를 낸 것이다. 특별히 고농도로 설정한 환경이 아닌, 일반적인 도심 하천의 환경에서.


 이 외에도 항우울제 성분에 오염된 게가 포식자에 대한 회피 행동을 하지 않고 눈에 잘 띄는 바위나 시야가 탁 트인 곳에서 활동하는 것도 관찰되는데, 이러한 행동에 의해 약물에 오염된 게는 더 높은 확률로 갈매기 등의 상위 포식자의 먹이가 된다. 그리고 이 상위 포식자의 체내에 축적된 약물은 또다시 더 높은 상위 포식자의 체내로 유입되고, 결국 최상위 포식자인 인간의 체내에 유입된다. 생물농축으로 이미 높은 화학물질의 농도가 더욱 높아진다는 의미이다. 애초에 축적의 시작점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다행히 2015년 개최된 유엔환경프로그램 주최 국제화학물질관리회의(International Conference on Chemicals Management, 이하 ICCM)에서 처음으로 국가, 비정구기구, 제약회사가 인간과 생태계를 약물오염으로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결의안에 공식적으로 서명했고, 이에 대한 대책이 논의되었다. 지금까지 제약회사들은 근거를 제시하며 책임을 묻는 목소리와 시선이 부당하다고 주장했지만, 글쎄. 이런 상황에서 비록 강제성은 없다지만 이런 국제기구의 출범은 반길 수밖에 없다.


 물론 이제 막 출범한 만큼 제대로 모니터링 가능한 장비나 인력이 부족하고 법적 장치도 마련되어 있지 않은 ICCM에서 통과된 결의안인 만큼 얼마나 큰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ICCM은 큰 지원을 받을 수 있는 중량급 조직이다.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국제적인 규모의 조직이 등장했고, 거기에 각국 정부들은 이에 호의적이다. 그렇지만 제약회사와 하수처리업체의 경우 비용 증가를 우려해 규제를 최소화하기 위해 어떻게든 노력할 것이므로, 일단은 목표로 내건 2020년까지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을지 지켜보자.




폐의약품 처리는 약국으로. 사진은 슬로바키아의 어떤 약국의 로고.


 현재 한국에서는 폐의약품을 약국이나 보건소에 가져다주면, 약국과 보건소에서 회수해 처리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환경부의 시행 지침에 따르면 폐의약품은 약국과 보건소에서 회수하고, 회수된 폐의약품은 전량 소각해서 처리해야 한다. 그러나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약국이나 보건소에 폐의약품을 반환하는 비율은 8% 정도로 매우 낮다. 반면 쓰레기통이나 하수구에 흘려보내는 비율은 55% 이상으로 과반수 이상이다.


 참고로 해당 설문조사는 2018년에 시행된 설문조사로, 폐의약품 회수율이 많이 떨어지는 추세를 보여주는 결과이다. 2017년 조사 결과 2016년에 비해 폐의약품 수거율이 60% 정도 감소했는데, 이는 2015년 8월 환경부의 쓰레기 종량제 규정이 개정되어 시행되면서 일부 지방에서 폐의약품을 반환이 아니라 종량제 봉투에 버리도록 안내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종량제 봉투에 담긴 쓰레기를 전부 소각하는 지방도 있기 때문에 큰 관계는 없다지만, 시럽 등 액체로 된 약물을 제대로 처리하기 위해서는 약국 반환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약국과 보건소에 무작정 반환을 요구하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다. 특히 동네 작은 약국의 경우 큰 문제가 된다. 언제까지나 이 폐의약품을 쌓아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공간도, 인력도, 시간도 턱없이 부족한 동네 약국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다. 집 앞의 작은 편의점에서 보관할 수 있는 편의점 택배의 양이 정해진 상황을 생각해보자. 비슷한 문제다. 이에 일부 지자체에서는 수거함을 설치하고, 대한약사회에서 만든 '불용의약품 등의 관리에 관한 조례 제정안'을 부분적으로 수용하는 등 대책을 마련하려고 하지만, 아직은 부족하다.


 사실 근본적으로 접근하면, 버려지는 의약품을 줄여야 한다. 약은 의사의 처방에 따라 약사가 조제한 약을 정확하게 정량, 정해진 시간만큼 복용해야 한다. 다 나았는지 아닌지에 대한 판단은 내가 할 수 있지만, 약을 더 이상 먹지 않아도 괜찮은지에 대한 판단은 의료진의 몫이다. 또한 마트나 편의점 등에서 복약 지도 없이, 지식 없이 약을 사는 것도 자제해야 할 것이다. 모르면 물어보자. 의사와 약사는 어떤 상황에서 어떤 약이 필요한지 정확하게 알고 올바른 약을 추천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전문 인력 아닌가.




 기억을 돌이켜보면 아빠가 처음 약국 유리창에 노란색 폐의약품 반환 배너를 붙인 것은 내가 대학에 막 입학했을 무렵이었던 것 같다. 찾아보니 폐의약품 수거 정책은 2008년에 시범적으로 수행된 뒤, 2009년 4월에 본격적으로 시행된 정책이란다. 약국에 불쑥 놀러 갔더니 처음 보는 노란 뭔가가 붙어 있어서 물어봤더니, 이런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고 알려 주시더랬다. 사실 부끄럽게도,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막 버린 폐의약품의 위험성을 잘 몰랐다. 대학교에서 생명과학을 전공했고, 아빠가 약사인 나조차도, 그랬다.


 그러고 10년이 지났다. 아빠에게 물어보니, 체감상 확 느껴지는 비율은 아니라고 한다. 주위에 물어보면,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런 정책이 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하는 이들도 꽤 있다. 물론, 우리 아빠는 위에서도 말했던 것처럼 작은 지방의 도시의 작은 동네 약국의 약사이고, 따라서 서울에 있는 거대한 기업형 약국들과는 상황이 조금 다르겠지만, 어쨌든 경력 40년의 베테랑 약사의 말에 따르면, 그렇단다.


 과거 아빠 약국에서 일을 도와드리고 있을 때, 어떤 분이 제법 큰 종이 가방을 가지고 약국에 찾아오셨다. 약사를 찾으시기에 아빠를 불렀는데, 그분이 대뜸 그 종이 가방을 아빠에게 건네셨다. 가방을 본 아빠는 침묵하셨고, 얼핏 그분의 눈물을 본 것도 같다. 나중에 알았다. 그 가방에 가득 들어있던 의약품은 비싼 항암제였다는 사실을. 그러니까, 그분은 더 이상 항암제가 필요하지 않은 곳으로 소중했던 누군가를 떠나보낸 것이다. 약을 반환하며, 누군가의 치열했던 삶의 흔적도 함께 반환되었다.


 그렇게 누군가에게는 치열하고, 또 누군가에게는 별 의미 없이 버려진 10년이 지났다. 두루미에게, 붕어에게, 그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강제로 의약품을 복용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한 시간이 10년. 얼마나 쌓였는지, 어떤 영향을 미칠지, 체내 뿐 아니라 변화된 그들의 행동양식이 생태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지 아직은 알 수 없다.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고, 생각보다 별 것 아닌 상황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난 약국에 돌려주고 있다. 아픔과 싸운 우리의 흔적 때문에 또 다른 누군가를 아프게 하는 것은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한가로운 조개의 몸에 먹지도 않았고, 필요하지도 않은 약물이 쌓여있을 지도 모르니까.




T. Brodin, J. Fick, M. Jonsson, J. Klaminder, "Dilute Concentrations of a Psychiatric Drug Alter Behavior of Fish from Natural Populations", Science, 2013, 339(6121), 'p. 814-815'


한겨레 물바람숲, 2013. 02. 15 '물고기들에게 약 먹였습니까?'

http://ecotopia.hani.co.kr/68828


BRIC 동향, 2015. 10. 14 '약물오염을 막아라: 국제 화학물질관리회의(ICCM) 출범'

https://www.ibric.org/myboard/read.php?Board=news&id=265684


히트뉴스, 2019. 03. 26 ''폐의약품' 수거·처리, 지자체 '환경과'도 고민할 차례'

http://www.hit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7286


매일경제, 2019. 03. 06 '年 2천억 폐의약품 처리 논란… 종량제봉투 넣어 쓰레기 처리'

https://www.mk.co.kr/news/it/view/2019/03/135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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