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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크 Jan 24. 2022

단상의 잔상 #2 산책하며 느낀 것들

미세하게나마 나 자신으로 더 채워진 마음을 풍족하게 들고 집에 왔다


도시의 불빛들이 남기는 잔상을 좋아한다. 형형색색의 빛 번짐은 도시 안의 피로감이 일렁이다 넘친 것 같은 모양이기도 하고, 보고 있노라면 도시가 가진 번잡스러움과 적막함의 경계가 흐려지는 느낌도 좋다.
나의 단상들도 잔상을 남긴다. 쓸 수밖에 없는 마음이 넘친 탓에 흐릿하지만 *'지워지지 아니하는 지난날의 모습'임은 분명하다. 나에게 떠오르는 많은 단상이 어떤 색의 잔상이 될지 궁금하다.



단상의 잔상 #2 산책하며 느낀 것들 


그런 날이 아닌 데에도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재택을 끝내며 퇴근 아닌 퇴근을 하고 저녁을 먹는 데 기분이 이상하다. 그럴만한 일이 없었는데 왜 기분이 안 좋지? 이럴 때는 마냥 눕고 싶어 지기 때문에 얼른 옷을 챙겨 입고 쓰레기를 챙겨 밖으로 나섰다. 지난주에 비해 훨씬 유해진 날씨가 먼저 몸에 닿았다.


유선 이어폰을 오랜만에 끼고 공원으로 향했다. 사람이 없는 듯 듬성듬성 있다. 털 슬리퍼가 아니라 운동화를 신고 나오길 잘했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공원을 걸었다. 예전에 저장해둔 아이유의 플레이 리스트를 처음부터 재생하며 느리게 걸었다. 어제부터 온종일 화면만 바라봤던 탓인지 걸으며 내 시야에 들어오는 풍경이 낯설었다. 나무를 보고 두꺼비 장식물에 흠칫하고 은행나무의 유래를 읽고. 이맘때 저녁 하늘은 마냥 검은색이 아닌 짙은 자주색을 띠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뻗어진 나뭇가지들의 앙상함이 그림같이 어색했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은행나무의 유래 글에서는 '가을 무렵 단풍은 아름답다'고 써져있었다. 아름답다는 단어가 무척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빠르게 걷는 사람들에게 부딪히지 않도록 끄트머리에서 걸었다. 아이유가 전하는 가사말이 귀에 생생히 꽂혔다. 어쩌면 가사를 이렇게 지을 수가 있을까. 익숙한 노래인데도 어떤 노래들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하루 종일 내가 스치듯 봤던 글과 영상과 누군가의 소식이 스쳤다. 업무를 하며 들었던 자잘한 고민과 안 좋은 방향으로 예측하는 버릇과 내가 써 내려간 문장들이 떠올랐다. 아주 작고 사소한 자극은 생각보다 많은 영향을 미치는구나. 무의식 속에 소비했던 에너지들이 쌓이고 쌓여 지금의 감정이 만들어진 것만 같다. 새삼스럽게 신기하고 놀랐다. (진짜 인용하긴 싫지만)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나를 흔들고 있었구나. 그 자체로는 구체적인 형태를 만들 수 없는 조각들이 모여 한 덩어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아 그때 그런 생각을 했지. 그때 조금 박탈감을 느꼈지. 그래 그때는 서운했던 것 같기도 하다. 아주 잠시일 뿐 금세 접었던 느낌들이 오래도록 머무르고 있었다. 그러나 자각하니 그리 무거운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만큼 예민하니, 잘 돌봐줘야지.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다.


내가 아닌 것에 너무 몰두하지 말자. 오늘 산책에서 두 번째로 만든 문장이다. 그냥 요즘 그랬던 건 아니었나 싶어서. 엄청나게 애써서 내가 아닐 필요는 없으니까. 내가 나만의 방식과 다정함으로도 충분히 헤쳐나갈 수 있는 일에는 기꺼이 그렇게 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의심보다는 정진. 나를 정의하는 향기로운 단어들만 골라서 간직하기도 벅차다.


미세하게나마 나 자신으로 더 채워진 마음을 풍족하게 들고 집에 왔다. 미뤄둔 다이어리와 일기를 쓰고도 모자라 노션을 켜서 오늘의 일기를 길게 한번 더 써본다.


나는 조금씩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이 문장을 굳이 굳이 오늘 남기고 싶은 날이다.


부지런히 산책하는 고양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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