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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우 김윤후 Jun 21. 2020

간장게장과식혜

 

어렸을 적 나는 스무 평 남짓한 작은 연립주택에서 살았다. 그때 우리 식구는 아버지와 어머니, 할머니 그리고 나와 동생, 두 명의 삼촌 등 일곱 명이었다. 소설가이자 야간고등학교 국어 교사였던 아버지는 낮에는 글을 쓰고 저녁에는 학교로 출근을 했다. 빠듯한 살림이었지만 어머니는 허리띠를 졸라매면서도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다.

나는 유치원에 다녀오면 친구들과 집 근처에 있는 공원에서 축구를 했다. 해가 저물고 땅거미가 질 때쯤이면 어머니가 공원으로 찾아와 내 이름을 부르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하던 축구를 멈추고 친구들에게 내일 다시 만나자며 헤어졌다. 그리고 바지에 뭍은 흙을 털어주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집으로 향했다.  

저녁시간이 되면 집집마다 새어나오는 요리 냄새로 그날 저녁의 메뉴들을 알 수 있었다.  쌍둥이 친구인 상일이 상혁이네는 유난히도 청국장을 자주 먹었고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는 재웅이네는 카레를 자주 먹었다. 다른 집과 비교하면 우리 집은 주로 계란찜을 많이 먹었다. 큰 냄비에 담긴 계란찜은 식구가 많은 덕에 금세 동이 나곤 했다. 아주 가끔 상일이 상혁이네가 삼겹살을 먹는다고 자랑을 하면 나도 부모님에게 삼겹살을 먹고 싶다고 졸랐다. 동네 정육점에서 엄마와 함께 삼겹살 오천 원어치를 사들고 집으로 향하는 날은 여느 때보다 내 발걸음은 힘찼다.

외할머니댁에서 동생과 함께

그런데 삼겹살을 먹는 그런 날보다 더 특별한 날이 있었다. 인천에 살고 계신 외할머니가 집에 오시는 날이었다. 외할머니는 오실 때마다 연안부두에 들러 게를 사서 직접 간장게장을 만들어 가지고 오셨다. 항상 한 손에는 직접 만든 간장게장이 담긴 통과 식혜가 담긴 통을 양손에 지고 계셨다. 외할머니가 오신다는 연락을 받으면 나는 몇 시간 전부터 길목을 서성이며 목이 빠져라 외할머니를 기다렸다. 그러다가 멀리서 외할머니의 모습이 보이면 외할머니를 부르며 달려가 안겼다. 외할머니를 향해 달려가다 개똥을 밟은 적도 있었고 슬리퍼를 신고 뛰다 넘어져서 무르팍이 깨진 적도 있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외할머니는 많이 먹으라는 말씀을 하시며 내 밥숟갈 위에 주황색 빛이 나는 게알을 얹어 주셨고 게딱지에 밥도 비벼 주셨다. 그럴 때면 나는 어린 나이에도 항상 두 공기 넘게 밥을 먹었다. 그리고 아무리 배가 불러도 후식은 식혜로 마무리를 했다.

외할머니가 나이를 드시면서 자연스럽게 외할머니가 우리 집에 오시는 날보다 우리가 외할머니 댁에 가는 일이 잦아졌다. 나와 동생은 어머니와 함께 지하철을 타고 인천으로 가는 내내 할머니가 만드신 간장게장과 식혜를 먹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외할머니 댁은 역에서 멀지 않았지만 약간 높은 언덕에 위치해 있었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외할머니는 늘 언덕 아래까지 내려와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나와 동생은 역 입구에 나오자마자 할머니를 향해 달려가 안겼다. 목소리가 더 우렁차졌고 전처럼 개똥을 밟거나 넘어지는 일은 없었다. 어머니는 다리도 좋지 않으신데 왜 나와 계셨냐는 걱정을 했지만 외할머니는 빨리 게장과 식혜가 먹고 싶다는 나와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으실 뿐이었다. 나와 동생은 외할머니의 손을 잡고 힘차게 언덕을 올랐다. 훗날 어른이 되면 외할머니를 업고 이 언덕을 오르겠다고 말씀드리자 건강하게만 자라 달라고 대답하셨다  

집안에서 뛰어다니며 장난을 칠 정도로 넓게 느껴졌던 외할머니 댁도 언제부턴가 겨우 앉아서 밥을 먹을 정도로 좁아보였다. 그럼에도 할머니가 해주시는 간장게장과 식혜의 맛은 변하지 않았다. 스무 살이 넘어서도 외할머니 댁에 가는 날은 체중관리는 잊어버리고 마음껏 밥을 먹었다. 늘 그랬듯이 외할머니는 내 밥숟갈 위에 게살을 얹어 주셨고 나는 후식으로 식혜를 마셨다.

돌잔치 때 할머니와 함께

시간이 흘러 나는 서른 살이 넘은 청년이 되었다. 그 동안 아버지는 대학교수가 되셨고 우리는 사십 평이 넘는 아파트로 집을 옮겼다. 아흔 살이 넘으신 외할머니는 지금 내 옆방에 살고 계신다. 어느 날 외할머니에게 소원이 뭐냐고 여쭤보았다. 두 가지를 말씀하셨는데 하나는 당신 고향인 황해도에 가보고 싶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젊었을 때 자주 만들었던 간장게장과 식혜가 먹고 싶다는 것이었다. 첫 번째 소원은 내가 이루어 드릴 수가 없었지만  두 번째 소원은 군 시절 간부식당 취사병이었던 나로서는 이루어 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인터넷에 간장게장을 만드는 레시피와 식혜를 만드는 방법을 검색해 보았다. 둘 다 생각보다 까다롭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요리였다. 그때서야 할머니의 수고스러움을 모른 채 먹는 즐거움만 알았던 어린 시절의 내가 한참 철이 없었다는 생각을 했다.

음식을 만드는 동안 양손에 간장게장과 식혜를 들고 오시던 외할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맛있게 음식을 만들어 드리고 싶었지만 그 맛이 나지 않았다. 새삼 외할머니가 만들어 주셨던 간장게장과 식혜가 대단하게 느껴졌다.

과거 외할머니께서 내게 해주셨던 것처럼 외할머니 밥숟갈 위에 게 알과 살을 얹어드렸다.  입을 오물거리며 게장을 드시는 동안 외할머니는 몇 번이나 맛있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식혜를 드시면서는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도 하셨다. 나는 건강하게 오래 사셔야 자주 드실 수 있다고 말씀드렸지만 죄송한 마음이 더 컸다. 아무리 노력해도 할머니가 해주셨던 간장게장과 식혜를 만들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간장게장이나 식혜를 먹을 때마다 외할머니가 해주시던 음식들이 그리워지곤 한다. 외할머니는 지금도 내가 외출을 할 때면 서른네 살인 손자에게 일찍 집에 들어오라고 말씀하신다. 아직도 할머니에게 나는 사랑스러운 손자인 것이다. 그럴 때마다 귀가 잘 들리지 않는 할머니를 향해 큰 소리로 외친다.

"할머니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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