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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양 Jan 16. 2023

나는 왜 쓰는가

어릴 적부터 무언가를 쓰고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초등학교 때는 전학 간 친구와 꽤 오랫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중학교 때는 농구를 소재로 소설을 쓰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는 아예 노트 한 권을 정해서 친구들과 교환 일기를 썼다. 아무튼 머릿속에 있는 생각들을 종이로 옮겨 쓰는 것이 좋았다.


어릴 적 우리 집은 시골에서 작은 가게를 했다. 한글을 빨리 깨치고 셈이 빠른 나는 바쁜 부모님 대신 가게 일을 도와야 했다. 집과 가게가 붙어있으니, 온전한 나만의 공간이 없었다. 내 방에 앉아 숙제하다가도, 손님이 오면 바로 응대를 해야 했다. 할 일 없는 시골 할아버지들이 대낮부터 평상에 앉아 막걸리는 마시며 시끄럽게 떠드는 것도 싫었고, 논이나 들에서 흙 장화를 신고 물건을 사러 오는 손님도, 그 손님이 사 간 것을 외상장부에 일일이 적는 것도 귀찮았다. 어떤 때는 솔직히 아무도 오지 않았으면 했다. 특히 혼자서 조용히 책을 읽거나, 나만의 글을 쓰면서 온전히 집중해서 그 세계 안에 들어가 있을 때 방해받는 것이 너무 싫었다. 책을 읽으면 그 세계에 들어가 이야기를 따라가고 마치 내가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을 느끼는 것이 좋았다. 나는 그 안에서 세상을 상상하고 미래를 꿈꿨다.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때로는 시련을 겪는 주인공을 대신해 화를 내기도 했다. 그런 감정을 오롯이 나 혼자서 조용히 느끼고 싶었다. 하지만 손님이 오면 자꾸만 현실로 돌아와야 했다.


나는 가게 일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공부나 책 읽기를 열심히 했다. TV를 보고 있으면 핑계를 댈 수 없지만 책을 보거나 숙제를 하는 등 책상 앞에 앉아있으면 가게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 중학생이 되면서 집 옆에 있던 창고를 방으로 만들게 되면서 그곳이 나의 공부방이 되었다. 밤에 나 혼자 뚝 떨어져서 자는 것이 조금 무섭기도 했지만, 온전한 나만의 공간이 생긴 것은 기뻤다. 누군가가 물건을 사러 와도 내 방에 앉아있으면 잘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서 숙제하거나 글을 쓰거나 책을 읽었다. 책을 읽다가 좋은 문장을 발견하면 일기장에 옮겨 적으며 나도 언젠가는 이런 멋진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을 품었다.


중학교 때 우연히 '타자기'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손으로 한 자 한 자 쓰는 것과는 달리, 손가락을 움직여 무언가를 탁탁 누르면 글자가 되는 것이 신기했다. 한 줄을 다 쓰면 촤르륵 하며 레버를 밀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구조도 마음에 들었다. 가정 형편상 부모님이 선뜻 타자기를 사 줄 것 같지 않았다. 동생과 달리, 나는 부모님에게 무언가를 사달라고 조르는 타입의 아이가 아니었다. 그래도 타자기만은 어떻게 해서든 가지고 싶었다. 어린 마음에 타자기가 있으면 금방이라도 소설가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기회를 봐서, 아버지에게 타자기를 사달라고 말했다. 참고서도 아니고 학용품도 아닌, 타자기라니. 아버지도 갑자기 듣게 된 '타자기'라는 세 글자에 적잖이 당황하는 것 같았다. 평소에 뭘 사달라고 해봐야, 대게는 학용품이나 책 같은 것이었고 그것도 엄마에게 말하고 돈을 받아서 샀었다. 하지만, 나는 직감적으로 타자기는 왠지 아버지에게 말해야 할 것 같았다. 나의 간절함이 느껴졌는지, 아버지는 조건을 하나 걸었다. 중간고사에서 1등을 하면 사주겠다고 하셨다. 1등이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동네에서 똑똑하기로 유명하고 학교 공부도 상위권인 나였지만, 교통상의 이유로 학원도 다니지 못하고 혼자 공부를 하는 나인데. 아무리 타자기를 사주기 싫어도 그렇지, 1등은 무리였다. 게다가 당시 우리 반에는 전교에서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이 몰려있어 1~2점 차이에도 등수가 몇 등이나 밀리기 일쑤였다. 그리고 나는 중학교에 들어와서 한 번도 1등이란 걸 해본 적이 없었다. 속이 상했다. 어느 정도 가능한 조건을 제시해야 말이라도 통할 텐데. 나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 아버지가 미웠다.


나는 보란 듯이 이를 악물고 시험공부를 했다. 시험 기간 동안 가게 일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두고 보라지, 학원이나 과외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1등을 해 보이고 말 테다. 그리고 당당히 타자기를 사달라고 요구해야지. 그래도 1등이라는 높은 장벽을 생각 하며, 혹시나 1등을 하지 못해도 열심히 공부하는 모습을 보이면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타자기를 사 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도 했던 것도 같다. 드디어 성적표가 나왔다. 웅성웅성 아이들은 내 책상 주위로 몰렸다. 반 아이들도 선생님도 놀랐지만, 가장 놀란 사람은 바로 나였다. 성적표의 ‘1’이라는 숫자는 나에게 ‘타자기’라는 글자로 보였다. 언제쯤 타자기를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하며, 한껏 들떠서 성적표를 고이 책 사이에 끼워 넣었다. 집으로 가면서 나는 이미 타자기를 가진 기분이 들었다. 타자기를 사면 멋진 작품을 써서 소설가로 이름을 날리고 싶었다. 돈도 많이 벌고, 세계여행도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성적표를 내밀며 타자기 이야기를 꺼내자 아버지는 발뺌했다. 평소에 '남아일언 중천금'을 생활신조처럼 내세우던 아버지는 온데간데없고, 한 입으로 두말하는 아버지만 있었다. 배신감에 한 동안 아버지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항암을 하러 서울에 올 때마다 내가 병원에 함께 갔다. 아침 일찍 병원에 도착해서, 접수하고 순서를 기다려, 채혈하고 엑스레이를 찍는다. 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카페에서 간단히 우유와 샌드위치로 아침을 먹는다. 의사와 면담을 하고 주사실에서 항암 주사를 맞는다. 주사는 6시간 동안 맞아야 한다. 그 시간을 아버지 침대 옆에서 보낸다. 아버지가 잠을 주무시면 나는 책을 보거나 스마트 폰을 한다. 아버지가 깨어있으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병원에서 아버지는 평소와 달리 말이 많아진다. 정치이야기, 동네 사람들 이야기, 예전에 선거일 돕다가 쫓기던 이야기, 도둑 술 마시던 이야기, 새마을 운동하던 시절 이야기. 아버지에게는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많았다. 시골에 살 때, 아버지는 경제적인 책임을 엄마에게 지우고 자유롭게 살았다. 엄마가 힘든 것이 모두 아버지 탓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 아버지를 오랫동안 원망하고 미워했었다. 아버지가 조금만 더 일찍 가정 경제에 충실했었더라면, 조금 덜 힘든 학창 시절을 보냈을 텐데. 사회초년생 시절,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겪을 때마다 그런 생각을 많이 했었다. ​


링거 병에서 주사액이 똑똑똑 떨어졌다. 주사액은 줄을 타고 아버지의 팔에 꽂힌 주삿바늘을 통해 몸속으로 퍼지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6시간을 맞고 나면, 3주 후에 다시 항암을 하러 와야 한다. 어쩌면 그사이 체력이 더는 버티지 못해서, 이마저도 받지 못하는 상태가 될 수도 있다. 이미 아버지의 팔은 혈관을 찾기 힘든 상태였다. 나는 한참을 말없이 아버지의 팔에 꽂혀있는 주삿바늘을 쳐다보다가, 입을 뗐다.


“아부지, 그때 왜 나한테 1등 하면 타자기 사준다고 하고서는 안 사줬어?”


“······내가? 내가 그랬나······”


아버지는 기억하지 못하는 걸까,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걸까. 먹고살기 힘들어서 초등학교도 제대로 마치지 못한 아버지는 언제나 배움에 한이 있었다. 공부 잘하는 딸 자랑을 늘 안주 삼아 술을 드셨다. 딸자식을 대학은 보내서 뭐 하냐는 동네 사람들의 말에 보란 듯이 대학 공부까지 시킨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딸이 1등을 해왔는데, 타자기가 아니라 그보다 더 한 것도 해주고 싶지 않았을까. 그저 사 줄 형편이 되지 못했던 것뿐이었을 텐데, 물어놓고도 미안했다. 그래도 묻고 나니 속은 시원했다. 비록 원하는 답은 듣지 못했지만, 나는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질문을 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항암 횟수가 찰수록 힘들어했다. 이미 4기에 발견된 암은 몸 곳곳에 퍼져있었다. 의사도 적극 권하지 않는 항암치료를, 아버지는 받고 싶어 했다. 가족 누구도 치료를 말릴 수는 없었다. 하루는 항암 주사를 맞던 아버지가 혼잣말처럼, 선우가 군대 가는 것을 볼 수 있을까, 하는 말을 했다. 시선은 TV를 향해 있었지만 아마 아버지는 그 너머 어딘가를 보고 있었던 것 같다. 미처 대답할 말을 머릿속에서 찾지도 못했는데, 목이 먼저 메어왔다. 6살 외손자가 내후년에 초등학교를 들어가는 것이 아닌, 군대 가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디쯤에 가 있을까. 건강한 상태라도 그것은 무리일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도 이미 답을 알고 있으면서 질문을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버지의 항암 치료 동안 나는 아버지와 화해의 시간을 가졌다. 무수히 많은 시간 동안 내 안에 담긴 응어리들이 이제는 조금씩 녹아 글로 옮겨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버지와의 이별을 준비하면서, 나는 언젠가는 내 안에 있는 것들이 글로 바뀔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막연히 했었다. 그러나 그것들은 쉽게 꺼내지지 않았다. 눈물이 줄줄 흘러 글은 써지지 않고, 가슴만 먹먹했었다. 그래도 이제는 조금의 눈물만으로도 쓸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은 익숙한 것을 낯설게도 하지만 익숙한 것을 낯설게도 한다. 시간이 더 지나면 아버지를 미워했던 마음은 낯설어지고 그리움과 애틋함이 남는 날이 올 것이다. 그날까지 나는 계속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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