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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양 May 10. 2023

모두를 위한 이동권(移動權)

2020년에 시작한 코로나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마스크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거렸던 때가 언제였던가 싶다. 이제는 분홍, 노랑, 하다못해 무지갯빛 색까지. 이제는 마스크가 몸의 일부인 양 또는 패션의 아이템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이마저도 권고 수준이 되었고, 병원과 약국처럼 특별한 경우에만 의무이니 종종 마스크를 잊고 외출하기 일쑤이다. 코로나로 인해 발이 묶여 외출이 자유롭지 못한 것이 불과 3~4년 전이다. 나는 직장에 다니지 않았고, 아이의 유치원도 휴원 상태였다. 아들과 나의 유일한 외출은 일주일에 한 번, 마스크를 사는 날 뿐이었다. 그마저도 사람들의 줄이 길면 집으로 발길을 돌렸었다. 원래도 한국 사회는 배달 문화에 익숙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배달업은 더욱 성행했다. 오늘 주문한 물건이 다음날 문 앞에 배송되는 시스템에 놀라기를 여러 번, 이것도 금세 익숙해졌다. 이렇게 코로나는 우리 생활 전반에 여러 변화를 몰고 왔다.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갈 수 없었다.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어도 참아야 했다. 비대면, 언택트, 줌 화상회의 등 새로운 용어들에 맞게 살아가고 있었다.


끝이 날 것 같지 않던 코로나는 그 끝을 보이는 듯하다. 어쩌면 너무 익숙해져 버려서 위기의식이 조금 무뎌진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이제 우리는 마스크를 사려고 긴 행렬 속에서 불안에 떨지 않아도 되고, 비대면보다는 대면으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쌓아두었던 마일리지를 쓰려고 해외여행을 가는 사람들도 적잖이 눈에 띈다. 나의 생활권도 동네에 국한되지 않고 점차 넓어졌다. 몇 년 만에 친구를 만났고, 지하철을 갈아타고 강의를 들으러 다니고 있다. 전에는 일주일에 하루 정도 외출했다면, 요즘은 일주일에 하루 정도 집에 있는 것 같다. 내가 사는 곳에서 강의를 들으러 가려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2호선으로 환승을 해야 한다. 출근 시간이 아니어도 환승역은 유동 인구가 많다. 아이를 등교시켜 놓고, 서둘러 출발해도 도착시간은 빠듯하다. 그날도 시간에 쫓겨 플랫폼으로 내려가는 계단을 뛰다시피 했다. 삐리리리- 플랫폼으로 열차가 들어오는 신호가 울렸다. 마음이 급했다. 저 열차를 타야 하는데……. 그때 안내방송이 나왔다. 열차가 들어오는 소리와 겹쳐서 신경 써서 듣지 않았더라면 놓쳤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열차가 사정으로 2호선 환승역에서 정차하지 않을 수도 있으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며칠 전, 우연히 지역 커뮤니티에 올라온 짧은 글을 읽었던 것이 떠올랐다. ‘왜 4호선에서만 하는지 모르겠다. 너무 불편하다. 출근 시간에 늦어서 애를 먹었다.’ 대충 이런 내용의 글이었는데, 무슨 소린지 궁금했던 나는 포털 사이트에서 기사를 찾아 읽었었다.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서 ‘전국장애인연합’이 이동권 보장을 위한 시위를 한다는 내용의 기사가 검색되었다. 함께 검색된 몇몇 사진 속에는 사람들이 몸싸움하는 듯 한 장면이 펼쳐졌고 그 속에서 익숙한 얼굴이 하나 보였다. 작년에 지역 여성 센터에서 ‘생애 구술사 인터뷰 글쓰기’ 강좌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강사가 읽어보라고 링크해 준 인터뷰 글에서 본 얼굴이었다. 2001년부터 장애인 이동권 투쟁을 하는 박김영희 씨에 관한 글이었다.



​ 밤마다 울었어요. 나는 낮달 같은 존재였죠. 떠 있는데 아무도 내가 거기 떠 있는지 몰랐어요. (중략) 베란다에 앉아 창밖의 코스모스를 바라보던 날이었어요. 아, 예쁘다, 하면서 생각해요. 나는 작년에도 이걸 보고 있었는데 올해도 이러고 있네. 내년에도 그러겠지?

-출처: beminor.com [박김영희] 나는 커서 뭐가 되지/ 홍은전 -


십 년 전 일본의 한 지하철역에서 무거운 캐리어를 들고 이동하느라 고생한 적이 있다. 그곳은 오래된 역이라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가 없었다. 친구와 둘이 낑낑거리며 캐리어 하나를 맞잡고 저만큼 옮겨놓고, 다시 돌아와 다른 캐리어를 옮기기를 몇 번 하고 나서야 겨우 지상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둘 다 땀을 한 바가지나 흘렸고, 시큰해진 손목을 주물러야 했다. 수 없이 이어진 계단을 오를 때 생각했었다. ‘아, 캐리어를 버리고 싶다.’ 여차하면 캐리어쯤이야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버리고 싶은 것이 내 신체의 일부라면?

이십 년 전 호주의 한 시골 마을에서, 휠체어를 탄 이를 버스에 태우는 것을 지켜본 적이 있다. 운전기사와 승객들, 휠체어에 탄 사람마저도 모두가 차분하고 묵묵히 그 과정을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승차하는 시간치고는 다소 긴, 5~6분 동안 누구 하나 급함이나 짜증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기계가 느릿느릿 작동되는 중간에 휠체어를 탄 이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던 운전기사. 그의 모습이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어쩌면 그 버스 안에서 마음을 졸이고 조급증이 들었던 건 나 하나였을 것이다.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건물 입구에 경사로가 없는 곳이 많다. 이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지 전에는 몰랐었다. 유모차로는 두세 개의 계단도 오르기가 쉽지 않다. 들어가고 싶어도 단 몇 개의 턱만으로 ‘방해’가 된다. 말로는 거창하게 배리어프리라고 하며 바뀐 듯하지만, 아직도 해결해야 할 것들이 많다. 경사로가 없는 건물 입구, 울퉁불퉁한 보도블록, 기울어진 인도. 인도 가운데 떡하니 세워놓은 오토바이나 킥보드.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이동을 방해한다.


우리는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가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집안에만 갇혀 지낸다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는 것도 절실히 깨달았다. 오늘과 같은 일상이 내일도 이어지고, 언제 끝이 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눈물을 흘렸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당연하지 않게 된 일상에서, 우리는 모두 괴로웠다. 이제 우리는 그 긴 터널의 끝에 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아직도 그 터널 안에 누군가 있다는 사실, 어쩌면 영영 터널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삶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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