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마지막 주 금요일, 아버지의 첫 기일이었다. 아이 하교 시간에 맞춰 영주로 출발했다. 도착해 보니 음식 준비는 거의 끝났고, 거실 가득 제사에 필요한 물건들이 늘어져 있었다. 내가 결혼하고 나서는 할머니나 할아버지 기일에 참석하기 어려웠고, 명절에는 시댁에 먼저 다녀오느라 오후에 도착하니 14년 만에 보는 제사 풍경이었다. 친정은 종갓집이라 일 년이면 제사가 아홉 번, 설날과 추석 차례까지 더하면 한 달에 한 번꼴로 상을 차려야 했다. 그때마다 엄마는 커다란 국솥 가득 탕국을 끓이고, 대여섯 가지의 나물을 산더미처럼 삶았고 무쳤다. 밥과 국, 산적, 나물류, 전류, 생선구이, 과일류, 떡....... 제사상을 볼 때마다 나는 죽은 사람을 위한 밥상치고는 너무 과하다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차리는 격식이 따로 있어서 밥상치고는 무척 까다로운 밥상이다. 역시 첫 기일이라 그런지 준비한 음식 가짓수나 양이 대단했다. 어른 머리보다 더 큰 수박에 떡도 세가지나 하고, 최상급 조기에 문어까지. 준비한 음식을 다 올리자니, 교자상이 세 개나 필요했다. 이 많은 음식 중에 아버지가 좋아하는 음식은 몇 가지나 될까. 생전에 양이 많은 분이 아니라 조금 드시다 말 것인데. 모든 것이 허례허식이라는 생각이 들어 고생한 엄마나 숙모들의 마음도 모르고 짜증이 울컥 치밀었다.
“간단하게 차리지 뭘 이렇게 많이 했어. 나물도 열 가지나 했네. 아이고, 이걸 누가 다 먹 는다고.......”
제사나 명절에 고생스럽게 요리하고 뒷설거지하는 것은 모두 여자들의 몫이다. 엄마는 가게 일과 밭일을 하면서 그 많은 제사를 다 챙겼었다. 없는 살림에 때마다 돌아오는 제사는 부담스러운 행사였다. 집안일을 거들 나이가 되면서부터 으레 명절 설거지는 내 차지가 되었다. 어릴 적 살던 동네는 의성 김의 집성촌이었다. 한 집 건너 한 집, 모두 가깝거나 먼 친척들이었다. 차례를 지내러 오는 사람들이 3, 40명은 족히 되었다. 그 많은 사람이 휩쓸고 간 후의 설거지는 오후가 되어야 겨우 끝이 났었다. 동네 아이들이 곱게 설빔을 차려 입고 세배하러 다닐 때, 나는 커다란 고무 들통에 산처럼 쌓인 설거지를 해야 했었다. 그것이 속상하고 억울해서 제사나 명절 상차림에 부정적인 인상이 더해진 것 같기도 하다.
나도 신혼 초에는 된장찌개를 한 솥 끓일 정도로 손이 컸다. 종갓집 맏며느리인 엄마를 보고 자란 영향이 있었던지, 밥도 국도 반찬도 넉넉하게 해야 마음이 놓였다. 반찬을 만들 때도 한번에 서너 가지를 해서 냉장고에 쟁여두었다. 두 명이 다 먹지 못할 만큼이어도 푸짐하게 상을 차려내고 싶었다. 아무거나 해줘도 맛있게 먹는 남편이 내가 요리하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6, 7년을 지내다 임신하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우리 집 식탁 풍경은 확연히 달라졌다. 처음에는 입덧 때문에 그 후로는 이유식을 하다보니 요리하는 양이 적어지고 그때그때 바로 해서 먹는 습관이 들게 되었다. 그러면서 반찬 가짓수가 줄어들었고, 어떤 때는 카레나 짜장 같은 덮밥류의 한 그릇 음식으로 식사할 때가 점점 늘어났다. 지금도 우리 집은 많아야 반찬이 서너 가지를 넘지 않고 국이나 찌개 없이 볶음류 한 가지로 밥을 먹을 때가 많다. 이것도 저녁 식탁이고, 아침에는 국과 반찬 한 가지 정도로 간단하게 먹는다. 최근 몇 년은 미니멀라이프를 시작하며 냉장고에 음식을 쟁여두지 않으려고 하면서 더욱 간소해졌다. 적게 만드니 힘도 덜 들고, 식비도 아낄 수 있다. 게다가 음식물쓰레기로 나가는 양이 줄어드니 버리는 데 드는 비용과 그에 따른 죄책감도 덜 수 있어 좋다.
“수박도 그 집에서 제일 큰 걸 루 샀어. 수박은 씨가 많아서 자손이 번성한단다. 나는 이때까지 제사음식은 젤로 좋은 거, 젤로 큰 거로 샀어. 제사 음식에는 돈 아끼면 안 돼. 너희들 잘 되게 해달라고 제사만큼은 성심성의껏 차렸어.”
평소 나는 미니멀을 강조하며, 음식도 적당하게 하라고 잔소리를 해왔다. 그래서 엄마는 내가 오기 전에 미리 냉장고 정리를 하며 내 눈치를 봤었다. 그런 엄마가 이번에는 아무 말도 말라는 듯, 내가 음식에 대해 불평하자 단호하게 말했다. 엄마에게 제사상은 자식들, 산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아무리 먹고살기 어려워도 제사 음식만큼은 정성을 들여 최선을 다 해 차려내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있었다. 허례허식이라고, 다 먹지도 않을 거 뭐하러 차리느냐고 하지만 엄마 나름대로 제사에 대한 철학이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내 생일달인 2월 한 달 동안은 내 생각을 하며 새벽마다 물을 떠놓는다는 엄마에게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 같은, 미니멀이나 맥시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도 있는 것이다.
친척들에게 떡과 과일, 생선을 나누어주고도 우리는 며칠 동안 같은 탕국과 나물에 밥을 먹어야 했다. 그랬는데도 떡과 나물은 쉬어버려 조금 버려야 했다. 나는 서울 올 때 남은 음식을 일부 싸 왔다. 가지고 온 고기를 볶아, 밥과 김치로 간소한 식탁을 차렸다. 나의 미니멀과 엄마의 맥시멀은 여전히 틈이 좁혀지지 않고 있지만,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삶을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