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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선양 Jan 05. 2024

엄마라서

“엄마, 나는 엄마가 너무 좋아. 별로 예쁘지도 않은 거 같은데 말이야. 이상해.”     

 등교시키려고 깨워놓은 아들은 다시 거실 바닥을 뒹굴며 말한다. 내가 예쁘지 않다는 말이 기분 좋게 들리지는 않지만, 아들 표정이 너무 귀엽다. 자기가 볼 때 엄마는 예쁘지 않은데 엄마가 너무 좋으니 의아한 표정이다. 나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그 생각이 재미있어 크게 웃었다.  


   

 서른둘에 서른여섯 살의 남자와 스노우보드 동호회에서 만나 6개월 만에 결혼했다. 주변에서는 다들 속도위반해서 서두른다고 오해했다. 결혼한 지 7년이 지나서야 아들을 어렵게 만날 수 있었다. 때로는 속도위반이 오해가 아니었으면 좋았을 텐데, 생각했다.


 난임 병원에 다녀도 임신이 되지 않았다. 해가 갈수록 임신 가능성은 자꾸 줄어들었고 나이만 먹었다. 가족과 친척들의 걱정하는 말들도 진심으로 들리지 않았다. 세상에 나 빼고 모두가 임신하고 출산하는 것 같았다. 임신한 여자가 아이 손을 잡고 외출하는 모습을 볼 때면 괜히 심사가 뒤틀리기까지 했다. 인간극장 같은 프로그램에서 아이를 열 명씩 낳고 사는 모습을 볼 때면 ‘하나만 나에게 오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냥, 둘이 행복하게 살자. 애 없으면 어때, 응?”


 내가 힘들어하자 남편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노산 기준 서른여섯을 훌쩍 넘겨서 나도 ‘안 되는 일은 안 되는가 건가’하고 받아들여야 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둘만의 삶을 계획했다. 시어머니도 ‘애 없으면 어떠니?’라며 둘만의 삶을 적극 찬성하셨다. 하지만 인생은 모를 일이다. 그토록 바라던 아이를 ‘포기’했더니 자연임신이 되었다. 운명론을 믿지는 않지만 어쩌면 운명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무수히 많은 기대와 실패와 절망 끝에 얻은 한 줄기 빛과 같은 아이였지만, 육아는 힘들었다. 인내와 노력이 필요했다. 노산이라 체력적으로도 힘들었지만, 한 인간을 오롯이 키워내야 하는 책임감이 부담스러웠다. 내 말과 행동이 혹여 아이의 인생에 나쁜 영향을 미칠까 봐 걱정되었다. 살면서 내가 받은 마음의 상처를 내 아이가 겪지 않기를 바랐다. 아이의 성향이 나와 비슷해서 걱정은 커지기만 했다. 아이를 이해할수록 내 모습 같아서 불편했다. 이렇게 예민하게 굴면 앞으로 사회생활 하기 힘들 텐데, 친구들한테 따돌림당하면 어쩌지, 애들한테 무시당하거나 치이면 상처 입을 텐데. 나는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걱정했다.



나 역시 엄마를 8년이나 기다리게 하고 태어났다. 엄마 딸이라 어쩔 수 없는지 걱정이 많은 건 엄마를 닮았다. 사십이 훌쩍 넘은 내게 무슨 일이 생기지 않을까, 엄마는 아직도 걱정하신다. 내 생일 달이면 매일 물을 떠 놓고, 초파일에는 절에 가서 등을 달거나 초를 켠다. 엄마는 자식들의 미래를 위해, 자식들의 교육을 위해 자신의 삶은 희생하는 사람이다. 우리 남매의 일이라면 그 어떤 일보다 우선이다. 나는 엄마의 수고로움을 당연하게 여겼다. 아침 일찍 싸주는 도시락도, 깨끗하게 빨아주던 운동화와 교복도 모두 엄마의 시간과 노동력이 들었는데, 고마운 줄 몰랐다. 아니, 모르지는 않았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엄마니까, 엄마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이를 낳았다고 다 ‘엄마’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조그마한 아기를 산후조리원에서 데리고 집에 왔을 때 막막하고 먹먹했다. 한동안 남편이 아기를 씻겨야 할 만큼 나는 아기 돌보기가 힘들었다. 손과 발이 너무 작아서 세게 잡으면 부러질 것 같았다. 목을 가누지 못하는 아기를 제대로 안기조차 힘들었다. 악을 쓰며 우는 아이에게 무엇을 해줘야 할지 몰라 함께 울음이 터진 적도 많았다. 그런 내가 남편과 주변의 도움으로 ‘엄마’가 되어갔다. 아이에게 젖을 물리고 기저귀를 갈아주면서 아이의 살을 비볐다. 고열로 아이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밤새 뜬눈으로 지켜보며 누군가를 진심으로 걱정하게 되었다. 뛰어가다 넘어져 무릎에 상처가 나면 내 무릎이 더 아팠다. 선생님에게 혼나서 억울해할 때, 친구와 다퉈 울 때, 쌓았던 블록이 무너져 속상해할 때, 그때마다 나는 아이 옆에서 마음을 달래주었다. 아이의 모든 힘든 시간을 같이 견뎌 주었다. 나도 엄마는 처음이라, 때로는 함께 울고 상황을 회피하고 싶을 때가 많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아이의 편이 되어주려고 애썼다.

       

 시간 덕분에 낯선 것이 익숙해졌다. 처음에는 기저귀도 제대로 못 갈고 이유식 만드는 것도 재우는 것도 서툰 초보였다. 아이가 크는 동안 나도 엄마로서 성장했다. 씻기고 입히고 먹이고 재우는 일상을 통해 서로를 알아갔다. 책을 읽어주고, 따뜻한 말들을 해주고, 아이의 마음을 보듬어 주면서 서로에게 소중한 존재가 되었다. 아이도 나도, 아들로서 엄마로서 서로에게 삶의 에너지를 주고받았다. 이제는 아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제일 잘 안다. 아들은 내가 한 음식을 최고라고 해준다.  

   

 아들이 한 말에서 좋아한다는 말에 방점이 찍혀있다는 것쯤 나도 안다. 엄마가 왜 좋은지 의아해하는 그 마음도 잘 안다. 그래도 예쁘다고 해주었으면 기분이 더 좋았을 텐데. 나는 웃으며 아침을 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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