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을 잊지 말기
얼마 전 올린 '젊어지기 공사'의 마지막 경과를 보기 위해 병원에 다녀오는 길, 집으로 출발하려는데 근처 백화점 크리스마스 장식이 눈에 띈다. 아, 크리스마스 시즌이구나. 유튜브에서 '크리스마스 캐럴'을 검색해 아무거나 틀고 집으로 출발했다. 요즘 그리 신나는 일상이 아닌지라 흘러나오는 캐럴은 금세 흩어지고 마는데 갑자기 한 노래가 귀에 머문다.
바로 WHAM! 의 LAST CHRISTMAS.
응답하라 1998 세대인 내가 중학생이었던 시절, 큰 방의 TV는 할머니 차지였고 국민학생이었던 동생과 정신연령의 세대차를 느끼며 조용한 사춘기 소녀였던 나는 작은 라디오와 친구가 되었다. 공테이프를 넣어두고 좋은 노래가 나오면 잽싸게 녹음 버튼을 누르는 기억이 있다면, 그대도 응팔 1998 세대!
아니, 세상에 이렇게 좋은 노래가 있다고?
영어를 잘 못하기에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제목인 'LAST CHRISTMAS' 뿐. 마침 연말이라 그 노래는 자주 나왔고 'WHAM!'의 노래라는 것까진 정보를 수집했다.
녹음한 노래를 또 듣고, 또 듣고...
다음 해 2월의 내 생일날이었다. 책상 위에 '책꽂이를 보시오' 같은 미션이 담긴 메모를 하나하나 따라가 마지막 장소인 책상 서랍을 열자 곱게 포장한 'WHAM!'의 테이프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국민학생이었던 동생의 깜짝 선물인 것. 글을 쓰며 동생에게 이런 낭만적인 면도 있었구나 싶다. 지금 동생은 뭐랄까, 츤데레의 표본?
녹음한 테이프를 계속 들으며 이름만 아는 가수인 'WHAM!'에 대해 너무나 궁금해하던 언니에게 용돈을 모아 테이프를 선물하고 나름의 이벤트까지 준비했던 동생의 그 마음이 두고두고 생각난다. 참 따뜻한 기억이다.
그렇게 나는 'WHAM!'의 모습도 알 게 되었고 유명한 히트곡 외의 노래들도 들을 수 있었다. 테이프 커버의 한글로 적힌 가사는 보너스다. 영어를 잘 읽지 못해도 한글로 적힌 가사를 따라 부르며 참 행복했다. 테이프가 늘어졌다고 느껴질 때까지 들었으니 30년이 지난 지금 'WHAM!'에 노래에 온 신경이 반응하는 게 당연하다.
WHAM! 을 시작으로 팝송을 참 많이 들었다. 아빠의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팝송 중 좋은 노래는 테이프를 구해 들으며 그렇게 팝송은 빠질 수 없는 나의 10대의 추억이 되었다.
팝송을 그렇게 좋아했음에도 영어를 잘 못하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성인이 돼서도 가요보다는 주로 팝송을 들었다. 지금에야 워낙 기분, 장소, 상황에 따라 리스트가 잘 만들어져 있지만 mp3 시절에는 나만의 목록을 만들어 다운로드하여 들었었다. 게다가 내 리스트는 인기도 있어 공유해 달라는 요청도 많았다.
그러던 언젠가 내 삶에 음악이 멈췄다. 운전할 때 습관적으로 음악을 틀지만, 알고리즘이 들려주는 음악은 내 귀에 남지 않고 가끔은 찔러대기까지 한다. 음악 듣는 걸 참 좋아했던 나는 이제 음악을 듣지 않는 게 더 편해져 버렸다. 졸릴까 봐 틀어놓을 뿐이다.
오늘 'LAST CHRISTMAS'는 나에게 다시 음악을 가져다주었다. 팝송 듣는 걸 참 좋아했던 소녀였던 시절의 추억과 함께. 좋아하는 가수의 테이프만으로도 행복했던 순수했던 그 시절, 다시 돌아갈 순 없겠지만 그때의 낭만을 즐길 순 있겠지.
다시 나만의 목록을 만들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