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희준 May 14. 2019

홍상수, <강변호텔>

드라마와 코미디 사이

처음 보았던 홍상수 감독 작품은 생활의 발견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아버지의 서재에 꽂혀있던 DVD 중 액션 영화나 어른들의 일이 나올 것 같은 것을 하나씩 가져다 자기 전 기숙사 침대 위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보았다. 킬빌과 펄프 픽션 DVD를 대학에 입학하고서야 열어보았으니, 아마 후자에 더 관심을 두었던 모양이다.



첫 감상은 실망감과 허무함, 뭐 이런 영화가 다 있나. 일단 DVD 케이스의 사진과 설명으로 짐작하던 것과 거리가 멀었으니 속았다 싶었다. 이런 관계가 실재하는지, 어른들의 세계는 진정 이런 것인지 의심이 들기보다, 추잡한 판타지의 실패한 영화화 정도로 단정하며 서둘러 잠을 청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청소년은 본인 영화를 보지 않는 편이 낫다는 인터뷰를 하셨더라. 무엇을 느끼겠냐는 것이다. 이 인터뷰를 보고 고등학생 때 한 편이라도 봐놓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16세의 나는 결코 어른이 아니었음을 수긍하기에 이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여전히 내게 홍상수 감독 작품은 극사실주의 드라마이기 이전에 코미디이다. 유머의 실체가 얼굴을 들지 못할 부끄러움인지, 혹은 천박한 웃음이 팽배한 시대를 계몽하려는 지적인 제스처인지 알 턱이 없다. 무엇이 되었든 이토록 진지한 자기 성찰과 웃음을 하나로 엮는 것은 기막힌 재능이다.



코미디로 느껴지는 것이 아직 나이가 충분히 차지 않아서라면, 힘써 부인할 생각은 없다. 영화 내내 웃지만, 아직 이 웃음의 정체에 대한 확신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영화의 인물과 그를 감각에 솔직한 이라 여기는 관객 중 스스로 후자에 가깝다며 안도할지, 혹은 온전히 진지하게 이입할 수 없으니 나이가 들어 다시 보겠노라고 다짐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어느새 이렇게 홍상수의 사슬에 묶여 있다.



구태여 사슬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다. 사회의 일면을 향해 돌을 던지는데 능숙한 감독은 몇 있지만, 돌을 감독에게, 혹은 관객 자신에게 던지라는 이는 흔치 않기 때문이고, 한없이 얕은 일상에서 볕을 충분히 받지 못했던 깊이를 찾아 드러내는 예술가에게 기대하는 것이 더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결코 긍정적이지 못했던 첫 대면 이후 10대 막바지부터 그의 영화를 계속 찾았던 것은 작품들이 곧 발 디디게 될 세계의 훌륭한 예습 자료 이상의 가치를 지녔다는 막연한 확신이 들었기 때문일 테다. 어느새 그의 스물세 번째 영화를 보았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