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하마구치 류스케의 무려 3시간짜리 영화 <드라이브 마이카>를 보았다. 원래 조조로 보려했지만, 전날 늦게까지 술을 마시다 늦잠을 잤고(...) 결국 5시 15분 영화로 예매했다. 보고 나니 저녁과 잘 어울리는 영화였다고 생각한다.
요즘같은 숏폼 시대에 까무러칠 러닝타임을 보고 긴장했지만 다행히 졸지 않았다. 배만 좀 고팠다. 그 긴 시간동안 한 장면도 허투루 찍은 게 없다고 느낄 만큼 연출이 세심한데, 사운드도 그러했다. 배경음악도 많이 들어가지 않을뿐더러, 들어간 것마다 잔잔했다. 어느 시퀀스에는 음악과 공간음을 모조리 빼버려 영화관 안이 진공처럼 고요해졌다. 만들어진 침묵은 어떤 사운드보다 압도적이었다. 몇십 명의 사람들이 이 침묵을 깨선 안된다는 긴장감을 공유하고, 함께 숨을 참았다. 영화가 이렇다 보니, 중간중간 뛰쳐나간 사람들도 많았다. 꼬르륵거리는 소리도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이동진 평론가는 이 영화가 "이야기가 이야기를 들어주는 구조"라고 말했다. 주인공 가후쿠의 삶과 그가 연출하는 체호프의 연극 <바냐 아저씨>가 영화 내내 중첩되기 때문이다. 인물 간의 관계에서도 대화는 중요한 포인트다. 영화의 가장 핵심인 오토의 비밀은 그 흔한 플래시백 하나 없이 오로지 가후쿠와 다카츠키의 대화를 통해서만 전달된다. 가후쿠와 운전기사 미사키의 유대도 특별한 사건이 개입되기보다 소소한 대화를 통해 쌓아나간다.
그런데 여기서 드는 의문 하나. 오토는 왜 가후쿠를 배신했을까? 그들 사이에 대화가 부족해 보이진 않았는데 말이다. 차 안에서도, 잠자리를 끝내고 나서도, 출장 때문에 떨어져 있어도, 시시때때로 그들은 대화를 나눈다. 그들의 대화만 듣고 있어도, 서로를 진심으로 존중하고 사랑한다는 게 느껴질 정도다.
그러나 어떤 대화는 혼잣말이 되기도 한다. 상대방과 지나치게 깊이 연결되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가후쿠와 오토처럼 너무 똑같은 아픔을 공유한 사람들은 1+1=1의 관계는 될지언정, 2는 될 수 없다. 나는 어떤 종류의 아픔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다고 믿는다. 나와 다른 생각과 아픔을 들려줄 상대방이 필요하다. 오직 그들만이 고여있는 내면을 환기시키고 새로운 가능성을 떠올리게 하므로.
가후쿠는 미사키로 인해, 오랫동안 놓지 못했던 핸들에서 해방된다. 뒷자리로 물러나 낯선 풍경과 낯선 아픔을 들여다본다. 미사키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이야기도 들려주면서 그들은 서로를 치유한다.
그리하여 대화라는 건 어쩌면 같은 언어일수록 불리할지도 모르겠다. 잘 알수록 다 안다고 넘겨짚게 되니까. 영화 속 <바냐 아저씨> 대본 리딩 장면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연극에서 배우들은 서로 다른 언어로 연기한다. 어떤 배우는 수화를 쓰기도 한다. 당연히 서로의 대사를 알아듣지 못해, 대사가 끝나면 책상을 두드려 알려야 한다. 불편하고 번거롭다. 하지만 마침내 완성된 연극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감동을 준다. 언어를 초월해 마음이 오고 가는 것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위로의 방식이 좋았다. 함부로 이해하려 들지 않고, 함부로 희망을 말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기에 생겨나는 거리감을 존중한다. 동시에 그것을 좁혀보려 온 마음을 동원한다. 무수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몇 번의 도약을 거듭하며, 우리는 고통 속에서도 분명 조용히 앞으로 나아가는 것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