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이제 직장에 출근한다
새해 1월 1일부터 나는 직장인이 된다.
프리랜서로서 프리(free)를 즐겼는데 코로나를 겪고 보니 직장인이 부러웠다.
글을 썼다.
시정뉴스 대본 작업도 하고 SNS 기자단도 하고 여기저기서 원고 요청도 받았다.
1월부터 3월까지 비수기라 통장 잔고가 바닥을 보이지만 4월이 지나면 통장에는 정해진 월급날이 아니라 수시로 입금이 된다.
물론 금액이 적다는 게 함정이지만 필요한 만큼 들어온다.
내년 비수기를 위한 예비비를 모으는 통장도 있다.
지난해는 활동이 적었던 겨울에 책 쓰기도 했었다.
나름 마감의 스트레스는 좀 있지만 예상하지 않았던 원고 요청이 들어오면 고마운 것이 현실이다.
보통 급한 작업 요청이라 일정이 꼬이기도 한다.
매번 다시는 안 한다 하지만 연락이 오면 또 고맙다고 넙죽 받는다.
그런데 올해 우리는 누구나 힘들었다. 지금도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다.
나도 그랬다.
한 달 활동을 쉬거나 야외활동 원고는 받지 않는다고 해서 집에서 요리를 하고 베란다에서 채소를 키워 원고를 만들었다. 시정뉴스는 코로나 여파로 행사는 없는데 연말까지 계약한 횟수를 맞추기 위해 코로나 관련 소식만 다룬 적도 있다.
글 쓰는 프리랜 서였는 올해는 코로나라는 거대한 바람 앞에서는 힘을 쓰지 못했다.
물론 인정받는 작가라면 상황은 다르겠지만 나는 그냥 일반인일 뿐....
도서관 파견 강사였던 친구는 점심도 햄버거로 때우며 강의를 다닐 정도로 바빴는데 올해 단 세 건만 했다.
전반기 강의가 전혀 진행되지 않았고 후반기는 1월에 계획된 강의 일정만 소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심을 했다.
취업을 하자.
그런데 가진 자격증도 글쓰기 관련뿐이고 흔한 컴퓨터 자격증조차 하나 없으니 자괴감이 들기도 했다.
나이 제한은 한번 더 사람을 소심해지게 했다.
시청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채용공고란을 확인했다. 나에게 맞거나 혹은 내 조건에 맞는 일자리를 구하는 게 쉽지는 않았다. 여행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런 여유시간을 가질 수 있는 일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찾았다.
11월이 되면 CCTV 관제요원을 모집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채용공지가 뜨기만을 기다렸다.
공지가 뜨자 바로 서류를 준비해서 제출했다.
그런데 경쟁률이 4:1이다. 이런..
세 명씩 면접실로 들어갔다.
얼핏 봐도 내가 제일 고령이다.
떨리기는 또 왜 그리 떨리는지 대답은 했는데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첫 도전에 먹구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전한다는 게 중요하지. 기다려봐라 아마 열일곱 번째으로 합격하지 싶다"
축 쳐진 내 기분을 위로한다고 신랑이 옆에서 한마디 한다.
"몸무게로 하거나 키로 하면 내가 될 텐데" 했더니
"얼굴도 그만하면 괜찮다"한다. 무거운 마음에도 웃게 하는 신랑이다.
일주일 후 드디어 합격자 공지가 뜨고 어렵지 않게 나는 내 번호를 발견했다.
그게 뭐라고 남편, 딸, 친구들한테 자랑을 했다.
코로나19만 아니었다면 시끌벅적하게 축하자리를 만들었을 것 같다.
근로계약서를 쓰고 왔다.
이제 며칠 후면 드디어 나는 출근을 한다.
기대 반, 설렘 반이다.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다 보니 아마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한 상항이 닥칠 수도 있을 것이다.
내게 주어진 또 다른 기회를 나는 잘 잡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