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바라바'를 읽고
당신께 내 영혼을 바칩니다
책이름: 바라바
글쓴이: 페르 라게르크비스트, 한영환 옮김
출판정보: 문예출판사, 1999년
아마도 예수만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도 없을 것이다. 그는 다른 무엇보다 십자가에서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사건을 통해 고유하고도 막대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는 극적인 장면을 상상해보자. 십자가형이 집행되던 골고타 언덕에는 예수 말고도 두 명의 죄수가 더 있었다. 그들은 각각 예수의 왼편과 오른편에서 십자가에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 사실, 그 두 죄수 말고도 십자가형을 받아야 하는 한 명의 죄수가 더있었다. 군중들의 요청에 의해, 예수는 그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매달렸다. 그 죄수의 이름은 바라바였다. 이 책은 바로 그에 관한 이야기다.
성경에는 그가 흉악한 정치범이라는 것과, 원래 예수 대신 십자가에 매달렸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 외에는 언급된 것이 없다. 그러나 사실 그는 성경의 그 어떤 인물보다도 예수와 특별한 관계로 맺어진 사람이다. 그는 예수라는 사람을 알지도 못하고 일체의 종교에도 관심이 없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난데없이 구세주라고 불리는 허약하고 초라한 인간이 나타나 자기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죽었다. 바라바는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리는데 그 어떤 영향도 주지 않았다. 그는 말 그대로 '그냥' 풀려났다.
그렇게 기적적으로 살아난 바라바는 이후에 어떤 삶을 살았을까? 작가는 바라바의 시선으로 그의 행적을 재구성한다. 풀려난 바라바는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라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을 것이다. 죄를 지을 힘도 없어보이는 저사람은 누구길래 나를 대신하여 죽었을까? 신분을 숨긴 채 예수의 추종자들을 만나고 그들의 믿음을 알게 되면서, 바라바의 의구심은 더욱 더 커진다. 그 사람이 나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죽은 구세주라고?
왜 그 사람을 구세주라고 부르는가? 왜 그분이 우리의 영혼을 구원하려 한단 말인가?
예수는 어느모로 보나 구세주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그 자신도 구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따른다는 이유만으로 고난을 받는 추종자들의 고통도 덜어주지 못한다. 바라바는 그런 구세주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가 그의 가슴 속에 남긴 무수한 질문들을 떨쳐낼 수도 없었다. 한때 자신이 품었다가 버린 장애인 여성이 예수를 따랐다는 이유만으로 돌에 맞아 죽는 형벌에 처했을 때, 그는 그 질문을 남긴 예수에게 보란듯이 대답을 내놓는다.
그 사람이 구세주라면 왜 그녀가 돌에 맞아 죽을 때 돕지 않았을까?
바라바 자신은 첫 돌을 던진 사람을 칼로 찔러 죽였다. 바라바는 적어도 그정도는 했다.
구세주라면 적어도 무언가를 보여줘야 하지 않는가? 그럴 힘을 가지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바라바의 눈에 보이는 것은 또 하나의 시신과 밤의 어둠 뿐이다. 이 죽음들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어둠의 끝에 무엇이 있기는 할까? 예수가 남긴 질문은 끈질기게 살아남아, 바라바의 가슴 속에서 하나의 인격이 되어 그의 곁에 자리잡는다. 그는 처음으로, 보이는 곳 너머를 상상하고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그의 힘을 아주 특수한 방법으로 사용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힘을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힘을 사용한 것이다.
노년에 그는 광산 노예가 되어 다른 노예와 짝을 지어 노역을 하게 된다. 바라바와 짝을 이룬 사하크라는 노예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바라바가 예수와 맺은 독특한 관계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바라바는 그의 권고에 따라 함께 기도를 하기도 하고, 노예 표찰에 그리스도교의 비밀스러운 문양을 새기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완전히 그리스도교에 귀의했기 때문이 아니었음이 곧 드러난다. 노년에 이르러서도 그는 예수가 남긴 질문에 대답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질문은 그의 안에 그대로 남아있던 것이 아니라, 그를 어떤 방향으로 '이끌어'왔다. 비밀스런 신앙 행위가 발각되어 사하크와 함께 로마의 총독 앞에 섰을 때, 그는 담대하게 고백한다.
"나는 신이 없습니다." 드디어 바라바가 대답했다.
"이상하군. 그렇다면 왜 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새긴 표를 달고 있지?"
"믿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의 고백이 독실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고싶다는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바라바를 따라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종교적 신심에 대해 가질 법한 의문들을 쏟아내며 여기까지 온 독자들은 '믿고 싶다'는 말에 담긴 무게를 짐작할 수 있다. 그 말은 이해를 넘어서는 신념과 그에 따르는 희생이 주는 알 수 없는 자극이 가진 무게요, 그 자극으로 알게 되는 인간 내면의 어떤 공간의 무한한 깊이를 알게 될 때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과 경건함의 무게인 것이다. 바라바는 자신의 존재가 예수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없음을 어느 순간 깨달았을 것이다. 그 질문들은 항상 그에 앞서 있었다. 그는 그 앞에 무엇이 있는지는 잘 몰랐으나, 눈을 들어 자신이 그동안 생각지 못했던 지평에 시선을 둘 수는 있었다. 그것은 그리스도교라는 종교의 신자가 되느냐 아니냐 하는 일차원적인 문제가 더이상 아니었던 것이다. 요컨대, 그는 실존과 초월의 경계에 서 있었다.
소설 속에서 바라바와 관계를 맺는 사람들은 마지막에 공통된 고백을 한다. '그에 관해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는 것이 그것이다. 그와 함께 산적질을 하던 동료들도, 사하크도, 노예 바라바를 부리던 주인도, 그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던 예수의 추종자들도 모두, 한때 산적이었던 바라바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후 지금 무엇이 되어있는지 모른다. 믿고 싶다고 고백하는 바라바는 이제 누구인가? 총독 앞에서 그에 관해 증언하는 사하크의 말이 아마도 적절할 것 같다.
"같은 믿음이라고? 저 사람도? 그러나 저 사람은 한 번도 당신처럼 무릎을 꿇지 않았는데!"
"기도를 하지 않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저 사람은 다른 방법으로 주님 곁에 아주 가까이 있었습니다."
그가 순응했든 저항했든, 예수가 그를 대신하여 죽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바라바는 예수와 가까이 있다. 그는 이제 예수를 떠나있는 자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
바라바처럼 다른 사람한테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바라바는 자의는 아니지만 다른 사람한테 얽매여왔다. 더구나 그는 쇠사슬에서 풀렸는데도 아직 어떤 의미에서 쇠사슬에 얽매여 있었다. 분명히 그는 쇠사슬이 없으면 오히려 불안한 듯 했다.
그즈음 로마제국은 방화범을 고용하여 도시에 불을 지르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그 죄의 누명을 씌워 붙잡아들인다. 바라바는 이 방화의 원인을 모른 채, 그것이 옛 세상이 지나간 뒤 새로운 세상이 오는 그리스도교 종말의 때로 알고 방화에 동참한다. 드디어 대답을 들을 수 있는 때가 왔다! 이제 예수와 그 추종자들이 꿈꾸던 세상이 올 것이다!
그들의 주님은 인간의 영혼에 불을 지른 것이지 사람이 사는 도시에 불을 지른 것은 아니다.
다시 범죄자로 전락하여 십자가형을 기다리는 바라바는 부끄러움과 수치심에 눈물을 흘릴 뿐 달리 말이 없다. 그렇게 그는 또다시 십자가에 매달린다. 첫 번째 매달렸다가 살아난 이후로 그가 가진 질문은 그를 어떻게 이끌어 왔는가? 그는 어떻게 다시 십자가에 달리게 되었는가? 그는 어떻게 달라졌는가? 아마 바라바 자신도 그 변화를 다 이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의 고백이 다시 하나의 질문이 되어 독자들에게 남는다.
"당신께 내 영혼을 바칩니다."
아마 대부분의 독자들이 그리스도교에 대해 바라바가 가진 의문들을 똑같이 지니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순간 우리는 제3자의 시선이 아니라 바라바 그 자신의 눈으로 예수와 그 추종자들을 따라간다. 그러나 주인공 바라바가 죽는 순간까지도 그 많은 의문의 어느 하나도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다. 바라바에게 예수가 그러했듯, 독자들에게는 바라바가 하나의 물음으로 남는다. 작가가 재구성한 그의 삶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바라바라는 한 사람의 인간은 지워지고 그의 가슴속에서 불타는 질문들만이 남아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바라바는 그 자신이 하나의 질문이 되어 신과의 대화를 시도한다. 횔덜린이 그의 시에서 아름답게 표현한 것처럼, 존재가 하나의 대화가 된다.
나는 이 책을 소개함으로써 그리스도교를 옹호하거나 포교하려는 것이 아니다. 질문으로서의 한 인간 존재가 향하는 지평을 함께 더듬어 보고 싶을 뿐이다. 많은 사람이 불가해한 것들의 의미를 찾고, 스스로의 오감과 이해의 폭에 만족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지점을 궁구한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고 입증할 수 없지만, 없다고 단언할 수도 없는 어딘가를 바라본다. 깊고 잔잔한 우물에 물 한방울이 떨어졌을 때처럼, 우리는 문득 그 갈증의 깊이를 알게 된다. 초월을 향한 지향은 인간 내면의 가장 깊숙한 어딘가를 건드린다. 그리고 그 때에서야 우리가 누구이며 어디로 가고 있는가 라는 철학의 유구한 질문이 의미를 가진다. 그 지평은 그렇게 존재 전체를 이끈다.
두 번째 매달린 십자가에서, 바라바는 그가 헤쳐나오려 했던 바로 그 어둠에 대고 고백한다. 그가 어둠이 걷힌 사후세계에 들었는지, 헛된 것을 쫓았는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그렇게 우리 앞에도 그가 마주한 어둠이 짙다. 우리는 그 어둠 앞에 어떤 질문으로서 존재하는가? 그 질문이 우리를 어디로 이끌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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