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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별로 Nov 14. 2020

너의 결혼식

<내 친구 이야기>

-다시 태어나도 친해지고 싶은-



*

숙대입구역의 술집에서 일성이에게 청첩장을 받았다. 결혼이 임박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바쁘다는데 굳이 술 약속을 고집한 모양새로 봐서 청첩장을 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은 했다. 실제는 생각과 달랐다. 영화 <캐스트 어웨이>에서 윌슨이 바닷물에 떠내려갈 때 주인공 심정이 그랬을까. 자연스럽게 축하해줘야 하는데 상실감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조난당한 무인도에서 둘이 지내다가 일성이 혼자 뗏목을 구해 탈출하는 기분이었다. 가장 큰 스트레스 중에 하나가 친한 친구의 성공이라고 하던데, 베프의 결혼도 내가 솔로부대 전역을 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순도 100퍼센트의 기쁨일 수는 없었다.     


“나는?”

“형은 뭐?”

“이제 누구랑 술 마시냐?”

“나랑 마시면 되지. 내가 무슨 이라크 파병이라도 가?”

“우울하다, 오늘 술은 네가 사라!”     


소주를 한 병 넘게 마셔도 취기가 돌지 않았다. 정신은 말똥말똥했고, 세상은 흑백영화였으며, 일성이가 서먹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내 속도 모르고 싱글벙글 청첩장을 주던 일성이는 평소보다 빨리 취하는 것 같았다. 잔뜩 취해서 3차로 빈대떡에 막걸리를 마실 때였다. 일성이가 영화 <결혼은 미친짓이다>의 주인공 친구 흉내를 냈다.     


“결혼이 안 내켜.”

“나를 위로해주겠다고 기껏 생각해낸 멘트가 그거냐?”

“농담 아냐! 지금이라도 물릴 수 있으면 물리고 싶어.”

“그럼 물려!”     


메리지 블루는 섬세한 여자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수더분하고, 연애시절에 한 번도 한눈 판 적 없고, 듬직한 나무 같은 일성이가 결혼 일주일 전에 흔들리는 모습이 의외였다. 신부가 성에 안찬다거나 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갑자기 짊어져야 할 막중한 책임감이 버거워서 그런 것 같았다. 일성이가 진지한 고민에 빠져있을 때, 나는 일성이가 뱉은 말을 평생 놀림감으로 써먹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

결혼식이 열리는 장소는 부산 시내에 있는 평범한 예식장이었다. 나는 일성이도 같이 아는 친구와 전날 밤에 내려가 짧은 부산여행을 병행할 셈이었다. 일성이는 타지에서 미리 오는 하객들을 위해 비즈니스 호텔방 몇 개를 예약했다고, 가서 자기 이름을 대면 공짜로 투숙할 수 있다고 했다. 일성이가 알려준 호텔에 주차를 하고 저녁이 되어 부산에서 유명하다는 곱창집에 술을 마시러 갔다. 친구와 술을 마시다 결혼 전날 밤의 신랑은 뭘 하는지 궁금해 일성이에게 연락을 해봤다. 그리고 일성이를 불러내 술을 마셨다.     


“결혼식 전날에 새신랑이 술 마셔도 되냐?”

“안되지.”

“그런데 왜 나왔냐?”

“불러낼 땐 언제고 왜 나왔냐니!”

“기분이 어떠냐?”

“결혼 준비하느라 폭풍 같은 일주일을 보냈더니 빨리 끝났으면 하는 마음밖에 없네. 나 먼저 들어갈게. 내일 바쁠까 봐 미리 인사하는데 와주셔서 감사하고 적당히들 마시고 들어가셔!”     


나는 일성이가 돌아간 후 친구와 해운대로 이동해 캔맥주를 마시며 밤바다를 바라봤다. 멀리 윌슨이 떠내려가는 것 같았다.     


*

결혼식은 하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소박한 결혼식장을 빌린 이유도 있지만, 내가 가본 결혼식 중에 손꼽힐 정도로 하객들이 많이 왔다. 거래처 사람들, 초중고 및 대학교 동창들, 광고계 선후배들까지, 일성이가 사회생활 하나는 기가 막히게 했구나, 란 생각이 들었다. 자리가 모자라 결혼식이 열리는 홀 뒤쪽까지 사람들이 서있었고, 홀에 들어가지 못해 밖에서 결혼식이 진행되는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사람들도 많았다. 나는 뒤쪽에 서서 결혼식을 조금 보다가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웠다. 식이 끝난 건지 사람들이 우르르 피로연장으로 몰려가는 분위기였다. 일성이가 황급히 나를 찾았다.     


“형! 신부 쪽 친구 분들이 형 차 웨딩카로 꾸며줄 거거든. 같이 가서 좀 도와줘.”

“내 차를? 모냥 빠지게 투싼으로 무슨 웨딩카야? 벤츠나 비엠더블유, 하다못해 그랜저 급은 돼야지.”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난 형 차가 좋아. 주차장에서 신부 친구들 기다리고 있을 거야. 나 폐백하러 가니까 부탁 좀 할게!”     


내 차 번호를 알려준 건지 주차장에 갔더니 신부 친구 두 명이 웨딩카를 꾸미기 위한 소품을 들고 수다를 떨고 있었다. 울산 사투리가 귀엽게 들렸다. 혹시 서울말을 쓰면 나에게 호감을 가질까 싶어 일부러 발음에 신경 쓰며 인사를 건넸다. 그녀들도 웃으며 나에게 인사를 했다. 그게 다였다. 보닛과 트렁크, 손잡이 네 개, 와이퍼에 웨딩카용 장식을 일사천리로 설치한 그녀들은 ‘용건만 간단히’ 마치고 사라졌다. 나는 담배 한 대를 더 꺼내 피웠다. 


*

편의점에서 샴페인 한 병을 사 와 뒷좌석에 종이컵과 함께 뒀다. 내가 운전을 하는 동안 결혼식을 방금 마친 신혼부부가 축배를 드는 장면을 상상했다. 차에서 한참을 기다려도 일성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두세 시간쯤 지났을까. 친구들로 보이는 수십 명의 사람들과 함께 일성이 부부가 나타났다. 일성이는 취해서 구영탄 눈을 하고 있었고, 제수씨는 신부 화장은 그대로 옷만 갈아입은 상태로 부축하듯 일성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일성이가 사람들에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들 잘 살겠습니다!’라고 크게 외치고, 90도로 꾸벅 인사를 건넨 후 차에 올라탔다.      


“제수씨, 얘 상태가 왜 이래요?”

“에휴, 친구들이 주는 술을 다 받아마셨어요. 소주를 서른 잔도 더 마신 것 같아요!”

“헤헤, 형, 출발! 서울로 출발! 끄윽. 아, 죽겠다.”     


출발하고 5분도 지나지 않아 일성이는 곯아떨어졌고, 제수씨는 일성이 손을 꼭 쥐고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혼여행은 덕소의 신혼집에서 자고 아침 일찍 떠난다고 했다. 덕소를 목적지로 한참을 달리다 내비게이션에서 휴게소 도착 안내 음성이 떴다. 일성이가 잠에서 깨 짜장면을 먹고 가자고 했다. 술을 받아 마시며 고기 안주도 많이 먹었다고 들었는데, 짜장면이 당기는 일성이가 신기했다. 나는 해장국도 아니고 뜬금없이 무슨 짜장면이냐고 타박했다. 술이 덜 깬 건지 일성이가 계속 짜장면을 먹어야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때는 몰랐고 나중에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이사를 하거나 입학식, 졸업식 등 좋은 날의 특별한 단골 메뉴였던 짜장면이었기에, 생애 최초의 결혼식 날에 먹고 싶었던 건 아닌지. 나에게 짜장면은 밸런타인데이에 초콜릿을 못 받아 4월 14일에 먹는 메뉴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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