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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연수 Sep 28. 2024

<나의 트랜지션 일기> 73장: 트랜스 앨라이 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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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장: 트랜스 앨라이 되기]



앨라이(ally)의 사전적 의미는 동맹국,협력자로서, 성소수자 관련으로 쓰이면 성소수자인권을 지지하는 사람을 말한다. 굳이 성소수자 앨라이라는 말이 있다는건 그만큼 우리 사회에서 성소수자의 인권이 탄압받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앨라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아주 다양하다. 성소수자 인권 관련 행사나 집회에 참가하는 것 뿐만 아니라 관련 단체에 후원을 하거나 관련 의제에 관심을 갖고 목소리를 내는 것, 성소수자인 사람이 안전하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가는 것, 주변에 있는 성소수자 지인들을 응원하고 돕는 것 등이 있다.

성소수자 당사자 뿐만 아니라 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앨라이들도 우리 사회 곳곳에서 목소리를 내주고 있기 때문에 더디지만 세상은 조금씩이라도 진보하고 있다.

그렇다면 앨라이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쉽지는 않을 수 있지만 그렇다고 어렵지도 않다.

주류 기득권 세력이 상정한, 소위 ‘정상’이라는 범주에 벗어나있는 사람은 단지 그 이유만으로 사회적 소수자가 된다. 성소수자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성별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있어서 그 주류의 기준에 벗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비정상이라는 낙인이 찍혀 차별과 혐오를 받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성소수자도 동등한 존엄과 권리를 가진 같은 사람이고 같은 동료시민이라는 것을 인식하는게 우선 매우 중요하다.


같은 사람이고 같은 동료시민인데, 정말 ‘같게’ 대하는건 저절로 되는게 아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구조적 차별이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에서 단지 “우리는 같은 사람이야” 라는 선언만으로는 우리의 관계가 동등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성소수자를 지지하기 위해서는 그 동등함이라는 인식의 토대 위에, 성소수자들이 실제로 이 사회에서 겪고있는 차별과 혐오의 맥락을 이해해야 한다. 그래야 성소수자인권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혹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알 수 있으니까.     


나는 내 글을 읽어주는 모든 분들이 다 트랜스젠더 앨라이가 되어주셨으면 좋겠다. 트랜스젠더가 사회에서 받는 억압에 비해 그 억압의 내용이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성별이분법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사회의 모든 공간들이, 사람의 성별을 남자와 여자로만 나누려고 하는 이 사회의 모든 순간들이 다 트랜스젠더에게는 억압으로 작동한다.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이미 다들 너무 힘겨운 싸움을 해나가고 있다. 그러니 이 사회의 거대한 성별이분법 구조에 균열을 내고 트랜스젠더들이 받는 억압을 해체하려면 이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시스젠더인 사람들의 지지가 필요하다. 시스젠더는 트랜스젠더와 달리, 자신이 태어났을 때 지정받은 성별과 자신이 인식하는 성별이 일치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자신의 성별에 대해 의심해보거나 고민해본 적이 없었고, 시스젠더라는 말조차 몰랐다면 본인은 시스젠더인 것이다.

트랜스젠더를 동등한 인간으로 존중하고 싶고, 트랜스젠더가 받는 억압을 줄여나가고 싶다면 그 누구든 트랜스젠더 앨라이가 될 수 있다. 그러면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방법을 몇 가지 소개해보도록 하겠다.


첫째, 누군가의 성별을,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으로 함부로 판단하지 않는다. 지금까지 얘기했듯이 사람의 성별은 둘로 나눠지지 않고 다양한 종류와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또한 신체나 복장, 목소리 등은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 그 사람의 실제 성별을 반영하지 못한다. 따라서 누군가가 스스로 자신이 정체화하고 있는 성별을 소개하기 전까지는, 함부로 그 사람의 성별을 판단하거나 동의없는 성별호칭을 사용하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물론 우리가 일상에서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매순간 모든 변수를 고려하며 대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굳이 그 사람의 성별을 알아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보이는대로 단정짓거나 혹은 경솔히 질문하는 행위는 하지 않아야 한다. 누군가의 민감한 신체적 특성이나 개인정보를 함부로 언급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치이다.


둘째, 적절한 호칭을 사용한다. 트랜스젠더 안에서도 다양한 범주가 있는데, 트랜스여성이나 트랜스남성이라면 당연히 성별로 호명하는 상황에는 여성/남성으로 호명하는 것이 맞다. 트랜스젠더를 마치 제3의 성으로 취급하며 트랜스여성에 대해 “여자분인줄 알았는데 트랜스젠더분이셨군요” 라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많다. 트랜스여성이면 당연히 여성이므로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 자신의 인생을 걸고 성별정체성을 확립한 사람을 예외적인 제3의 성으로 취급하거나 무성적인 존재로 취급하는 것은 매우 무례하고 몰지각한 행위이다. 남성이나 여성으로 정체화하지 않은, 성별이분법 범주 안에 들어가지 않는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의 경우에는 그를 남성이나 여성으로 호명해서는 안 된다. 사실 우리가 일상에서 굳이 상대방의 성별을 알아야 하거나 성별호칭을 써야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써야하는 상황이 생기면 성중립적인 호칭(00님, 00씨, 선생님 등)을 쓰면 된다.  


셋째, 일상에서 성별이분법적인 표현을 지양하도록 한다. 이미 사람을 남성/여성으로 구분해놓고 있는 이 사회에서 우리가 아예 그 표현을 안쓸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줄일수는 있다. 굳이 남자는 어떻다, 여자는 어떻다는 식의 말이나,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는 방식의 말하기는 지양하는 것이 좋다. 물론 성별위계에 따른 사회현상이나 어떤 성별집단을 호명해야 될 때는 부득이 그런 언어적 구분이 필요할 수는 있지만 우리의 일상이나 개인간의 관계에서는 그런 성별이분법적인 표현이 필요한 경우가 잘 없다. 그리고 만약에 사용해야 한다면 그냥 남성,여성이 아닌 그 앞에 ‘시스젠더’라는 말을 꼭 붙여줬으면 좋겠다. 장애인의 반대말이 ‘사람’이나 ‘정상인’이 아니라 ‘비장애인’ 인것처럼, 트랜스여성과 트랜스남성의 반대말은 여성과 남성이 아닌 시스여성과 시스남성이다. 시스젠더가 사회에서 너무나 당연한 기본값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동안 생략되어왔던 것인데, 그 당연함에 균열을 내기 위해서 의식적으로 시스젠더라는 말을 계속해서 사용할 필요가 있다.   


넷째, 트랜스젠더 이슈에 관심을 가지고 사회운동에 동참한다. 거창해 보일 수 있지만 그렇게 대단하거나 어려운게 아니다. 트랜스젠더들이 겪는 문제는 조금만 관심을 갖고 찾아보면 쉽게 접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는 성중립 화장실, 성별정정 요건 완화, 주민등록번호 난수화(성별정보 폐기), 차별금지법 제정, 그리고 학교,직장,병원,은행,관공서,대인관계 등 일상 전반에 걸쳐서 겪는 숱한 차별과 혐오 문제 등이 있다. 동성혼 법제화나 생활동반자법 같은 경우는 트랜스젠더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고 보일 수 있지만, 남녀간 이성애 커플만의 결합만 가족으로 인정하는 가부장제와 이성애중심주의도 ‘사람의 성별은 남자와 여자밖에 없다’라는 성별이분법에 근거하고 있으므로 이런 법안들이 통과되는 것 역시 트랜스젠더인권과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슈들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집회나 행사에 참여하는 것, 관련 단체에 후원을 하는 것, 온라인이나 오프라인 상에서 공개적으로 지지 표명을 하는 것 등도 트랜스젠더 앨라이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주변에 있는 트랜스젠더들을 돌아보고 살핌으로써 외롭게 혼자두지 않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겠다. 정체화하고 트랜지션하는 과정에서 숱한 고생을 하고, 그럼에도 사회에서 끊임없이 존재를 부정당하는 트랜스젠더들은 정신질환에도 취약하고 사회적으로 고립되기도 쉽다. 그렇게 때문에 주변에 트랜스젠더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성별정체성을 최대한 존중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하며 그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과 공간만큼은 최대한 안전함을 느낄 수 있도록 신경쓰면 좋다. 내가 이렇게 적는 이유는 바로 내가 그런 것들을 필요로 하기 때문도 있다. 트랜지션을 시작한 이후, 나는 언제나 어디서나 소수자였고, 누구를 만나든 그 사람에겐 내가 최초의 트랜스젠더였다. 나를 낯설어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항상 나를 설명해야 했고 나의 존재를 납득시켜야 했다. 외계인을 보듯 위아래로 훑어보는 시선, 무례하거나 성희롱적인 질문, 나를 거부하거나 부정하는 말들에 늘 노출되며 혼자서 싸워왔다. 페미니즘과 관련된 활동을 할 때조차 트랜스혐오자들을 피해 다니느라 전전긍긍하고, 노골적인 혐오를 발견할 시에는 직접 문제제기 해서 바로잡은 적도 종종 있었다. 물론 트랜스젠더를 존중하고 지지해주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있고 그런 분들에게는 항상 고마움을 느낀다. 하지만 외롭고 지치고 두려웠던 순간들도 많았기에, 나는 감히 조금 더 많은 분들에게 지지를 부탁드리고 싶다.      


애니 <귀멸의 칼날>을 보면서 감정이입이 되는 장면이 있었다. <귀멸의 칼날>은 인간을 잡아먹는 혈귀와, 그 혈귀에 처절하게 대항하는 인간들의 이야기다. 혈귀는 모종의 경로로 전염이 되기도 하는데, 어느 날 주인공 탄지로의 가족들이 혈귀에게 몰살당하고 여동생인 네즈코는 혈귀가 되어버린다. 하지만 네즈코는 예외적으로 혈귀가 되었어도 인간으로서의 의식을 유지한 채 탄지로와 함께 혈귀들과 싸워나간다. 탄지로도 오빠로서 변함없이 동생 네즈코를 아끼고 사랑한다. 그러나 혈귀에 대항하는 인간사회에서 네즈코는 그저 인간의 피와 살을 탐하는 혈귀일 뿐이다. 탄지로가 소속되어 있는 전투집단인 귀살대에서는 절대로 혈귀를 동료로 인정할 수 없다며 네즈코를 죽이려고 했고, 탄지로는 그런 동생을 필사적으로 옹호한다. 귀살대에서 네즈코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혈귀의 공격성. 아무리 인간의 의식이 있다고한들 혈귀인 이상 인간의 피만 보면 달려들지 않겠냐며, 네즈코에게 피를 보여주며 테스트를 했고, 네즈코는 어떤 상황이라도 인간을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몸으로 직접 증명했다. 그에 더해 탄지로는 네즈코도 같이 혈귀와 싸워왔음을, 네즈코도 충분히 인간처럼 살 수 있음을 적극적으로 어필하여 겨우겨우 인정받게 되었다. 나는 이런 네즈코를 보면서 굉장히 트랜스젠더서사 같다고 느꼈다. 몸(혈귀)과 정체성(인간)의 불일치성, 인간에게 해롭지 않음과  인간사회에 잘 어울릴 수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이 트랜스여성으로 살아가는 나의 처지와 너무도 비슷하게 느껴졌다.


트랜스여성은 자신이 여자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남자라서, 여자공간에 들어가서 여자들한테 해코지하면 어떡하냐는 시선 때문에, 나는 그렇지 않다는걸 보여주고 싶어서 언제든 어디서든 몸을 사리며 조심해야 했고, 정신에 문제가 있거나 성도착증 변태가 아니라 당신들과 다를바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는걸 보여주고 싶어서 항상 언행을 똑부러지고 바르게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있다. 나의 처지를 네즈코에 비유한다면, 트랜스젠더 앨라이는 네즈코를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지지해준 탄지로나 네즈코를 인정해준 주변의 귀살대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누가 인간의 자격이 있는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로 싸워야 한다. 우리가 서로 연합하여 한 개인이 아닌,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사회 구조에 대해 함께 싸워나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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