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는다는 것
어느 날,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금 우리 회사가…”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친구는 되물었다.
“잠깐만, 그런데 왜 묻지도 않았는데 이런 얘기를 하는 거지?”
그 말에 속이 싸늘해졌다.
마치 내 말이 아직 도착도 하기 전에
이미 ‘판단’이라는 장벽에 부딪혀 튕겨나간 느낌이었다.
그 친구는 분명 나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왜 그 한마디가 그렇게 벽처럼 느껴졌을까.
그건 바로, 나는 말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그 친구는 들을 준비 대신 이미 ‘해석할 자세’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친구는 자신의 경험으로 만들어진 세계를
‘선글라스’처럼 쓰고 있었다.
내 말은 그 안경을 통과해 색이 바래졌고,
그 색으로 판단되었고,
그렇게 오해로 변질됐다.
우리는 흔히 ‘친구라면 내 이야기를 들어줘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들어주는 것’이 때로는,
상상 이상으로 어렵고 무거운 일일 수 있다는 걸
살아가면서 조금씩 알게 된다.
친구가 내 고민을 잘 듣지 못하는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그중 하나는 ‘투사’다.
내가 겪는 고통이, 친구의 비슷한 상처를 자극하는 경우.
그러면 친구는 나의 이야기를 듣는 게 아니라
자신의 고통을 떠올리며 방어적으로 변한다.
또 하나는 ‘무력감’이다.
“내가 뭘 해줄 수 있을까?”
“들어봤자, 해결해 줄 수도 없는데…”
이런 생각이 친구를 점점 조용하게 만든다.
그리고, 조금 더 현실적인 문제는
‘부담감’이다.
‘부담감’은 두 가지 얼굴을 하고 찾아온다.
내 이야기를 듣는 것 자체가 친구에게는 감정적 소모일 수 있다.
그 친구도 지쳐 있고, 삶에 여유가 없을 때는
누군가의 아픔을 함께 들어주는 일조차 버겁다.
그럴 땐 ‘미안하지만 지금은 네 이야기를 받아들일 힘이 없어’라는 말 대신,
“그냥 긍정적으로 생각해.”
“그런 건 누구나 겪어.”
와 같은 공감보단 조언 반응이 돌아오곤 한다.
공감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공감할 여유가 없어서다.
특히 내 어려움이 ‘돈’과 관련된 이야기일 때는
더욱 조심스러워진다.
“나 요즘 경제적으로 너무 힘들어…”라고 말하는 순간,
친구는 머릿속으로 복잡한 계산을 하기 시작할 수 있다.
‘혹시 돈을 빌려달라는 건가?’
‘내가 뭔가 도와줘야 하나?’
이런 부담이 생기면 대화의 온도는 차갑게 식는다.
또, 친구 스스로의 상황과 나를 비교하면서
괜히 위축되기도 한다.
‘나도 빠듯한데…’
‘나는 제대로 못 살고 있는데, 어떻게 위로하지?’
그 불편함은 때때로 ‘회피’라는 방어기제로 이어진다.
“돈은 벌면 돼.”
“다 그렇게 살잖아.”
아주 현실적인 대답이지만, 아쉽게도 그 말은 위로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는 안다.
모든 친구가 ‘내 얘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어떤 친구는 함께 웃기에 좋고,
어떤 친구는 깊은 대화를 나누기에 좋다.
모든 귀가 따뜻하진 않지만,
모든 마음이 나쁜 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누군가의 귀에 내 무게를 얹기 전에
그 사람의 오늘은 어떤지 먼저 물어보는 것.
“요즘 너는 어때?”
그 한마디가,
진짜 대화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그날 나는 나의 말을 끝까지 할 수 없었다.
그는 과연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