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를 오랫동안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싶어요.
저는 어린 시절을 잘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언제부터 축구를 좋아하게 되었는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가끔 운동장에서 넘어져서 무릎이 까지고 꺼이꺼이 울던 기억이 떠오르는 걸 보면 아주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좋아했었던 것 같습니다.
지난 6월, 2002년 월드컵 4강에 버금가는 U-20 월드컵 준우승이라는 성과를 낸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이 화제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우리를 설레게 했던 선수라면 단연 이강인 선수 그리고 그 선수의 플레이일 텐데요. 화려한 플레이를 돌려 보고, 꺼내 보고, 다시 보면서 감탄과 함께 문득 든 생각은,
내가 나이가 들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2001년생, 저와 무려 16살 차이... 축구 잘하면 형이라고 하는데, 그냥 "강인이 형"이라고 부를게요.
10년 전까지만 해도 국내, 외 유명 선수와 나이를 비교하면 비슷하거나 아주 쬐끔 많았는데요. 이제는 차이가... 큰 걸 새삼 느꼈습니다.
그리고 문득 축구와 함께 지내온 지난 시간을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오늘은 축구와 함께 나이 들어온 소소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 축구를 했습니다. 동네 놀이터에서 공 가지고 노는 것 말고 초등학교 축구부의 정식 선수였죠. 물론 어렸을 때 공 한 번 안 가지고 놀았던 꼬맹이가 어디 있겠냐만은 저는 소위 엘리트 축구 그러니까, 축구를 직업으로 하는 프로 선수의 꿈을 가지고 있었죠. 때마침 초등학교 5학년 때 저희 학교에 축구부가 생겼고 저는 그 팀의 창단 멤버로 축구를 시작하게 됩니다.
어머니한테 무진장 혼났습니다. 그리고 엄청 징징댔죠. 축구하게 해 달라고, 너무 하고 싶다고. 살면서 부모님한테 뭐 사달라고 졸랐던 적이 거의 없었는데 저 때만큼은 너무 간절했었나 봐요. 일주일 내내 "축구공 사달라", "축구화 갖고 싶다", 쉬지 않고 얘기했던 것 같아요.
결국 최신 장비를 갖추고 축구부에 입단! "명색이 축구부라면 집부터 학교까지 드리블을 하면서 등, 하교해야 한다"는 당시 축구부 감독님의 지금 생각하면 요상한 가르침부터 차근차근 축구를 배웠습니다. (참고로 당시 축구화는 아스팔트에서 신으면 바로 스터드(일명 뽕)가 다 갈려버리는...그런 친구였거든요)
하지만 선수 생활은 2년도 채 가지 않았어요. 축구부가 클럽 활동 CA라고 했었나요? 으로 바뀌었거든요. 사실 그전부터 축구부 감독님의 말도 안 되는 훈련 방식이 싫었는데, 어찌 보면 잘 된 것 아닌가 싶어요. 결국 저의 축구 선수 생활 공식 기록은 1996년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열린 축구부 창단 기념 경기 20분이 전부였어요. 그래도 그때 배웠던 몇몇 기술과 이론은 아직까지 쏠쏠하게 쓰고 있으니 수확은 있었던 것 같아요.
중, 고등학교 시절이 저의 축구사? 에서 가장 왕성하게 활동했던 시기였던 것 같아요. 이때부터 진정으로 축구를 즐기기 시작했거든요. 중학교 2학년 때 축구 동아리를 만들고 체계적으로 잘 운영이 되었어요. 뭐 제가 회장이라서 그런 건가 싶기도 하고(후훗), 당시에는 지역 신문에도 소개될 만큼 유명한 클럽이면서 후배 기수까지 총 50명 정도 활동한 모범 동아리였어요. 동아리가 유명세를 타면서 축구를 잘하는 친구들도 많이 가입해서 다른 팀이 쉽게 이기기 어려운 팀이 되기도 했었죠.
그리고 때마침 제가 살던 용인의 인접 도시 수원에 수원 삼성 블루윙즈가 창단하면서 동아리 친구들과 수원 종합 운동장과 수원 월드컵 경기장(a.k.a 빅버드)을 제 집 드나들 듯 하기 시작합니다. 축구를 직접 하는 것뿐만 아니라 보는 재미에도 눈을 떠서 수원 삼성의 홈경기가 있는 날이면 계절, 날씨 가리지 않고 직관을 갔습니다.
직관했을 때의 쓸데없는 '무용담'도 많은데요. 언젠가 한 번은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축구장 옆 편의점에 있는 파라솔을 몰래 훔쳐 와 7명이 단체로 쓰고 경기장에 들어갔던 적도 있었고,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수원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프랑스와의 마지막 평가전에서 현장 판매 표가 갑자기 VIP 티켓으로 바뀌면서 마치 시위대처럼 의경과 대치하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왔던 날도 기억이 나네요.
사춘기를 어렵고 힘들게 보낸 기억이 전혀 없는데, 아마도 축구에 미쳐서 빠져서 지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네요^^
성인이 되면서 축구 인생에 큰 전환점 두 가지가 생겼는데요. 먼저, 다리를 크게 다쳤어요. 군 전역 이후 처음으로 공을 차던 날 왼쪽 무릎인대를 심하게 다쳤고, 이후 6개월은 보호대를 하고 한의원을 다녔죠. 물론 공은 만지지도 못했고요. 다행히 회복은 되었지만 이전처럼 빨리, 오래 달리기가 어렵더라고요. 새삼 큰 부상 이후 이전처럼 활약하는 선수들이 부럽고 대단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취업이었는데요. 아주 운이 좋게도 대학교 졸업 직후 바로 취업에 성공했지만 아주 운이 나쁘게도 정신 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바쁜 회사였어요. 주말에는 공 차는 시간보다 잠자는 시간이 좋았고, 그렇게 점점 축구를 하는 횟수도 줄어들었죠.
그리고 지금은 축구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글 쓰는 것과 축구를 포함한 여러 스포츠에 관심이 많아 실제로 고등학교 때까지는 스포츠 기자가 장래희망이기도 했었는데, 비록 많은 사람은 아니더라도 축구에 대한 저의 생각과 경험을 나눌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재미를 느낍니다. 그리고 제가 그동안 알게 되었던 지식과 경험, 정보를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어졌죠. 그래서 저로 인해 축구를 알고, 새롭게 즐기게 되는 사람이 많아진다면, 거기서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아요.
비록 이전처럼 많이 뛰지 못하고, 함께 직관을 했던 친구들을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축구를 즐기는 새로운 방법을 찾은 것 같아, 글을 쓸 때마다 마치 경기를 하고 있는 기분이 듭니다.
이런 글을 쓰고 있으니까 마치 늙은이가 된 것 같지만, 아직 축구를 '즐길' 시간이 저에게는 많이 남아 있어요! 그게 너무 설레는 일이죠. 지금까지의 인생에서도 쉽게 하지 못할 소중한 경험을 이미 많이 했으니까요.
월드컵 4강, 월드컵에서 독일을 이기는 순간, FIFA 주관 대회에서 결승전을 치르는 순간, 우리나라 선수가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그라운드를 누비는 순간을 경험이 그렇고요. 박지성, 손흥민, 이강인처럼 우리나라에서 쉽게 나오지 않을 선수들의 플레이를 마음만 먹는다면 매주 볼 수 있죠. 이 뿐인가요? 축구 동아리 회장으로 참가한 대회에서 준우승도 했고, 대학 동아리 대표로 나간 대회에서는 최우수선수상을 타기도 했으니 보는 것 말고도 '할'만큼은 하 한 것 아닐까요^^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저는 기대합니다. 앞으로 10년, 20년 후에는 어떤 새로운 '축구' 경험을 하게 될지. 뭐... 동네 학교 운동장에서 주말마다 공 차는 조기축구회 아저씨가 되어 있을 수도 있어요. 그래도 좋습니다. 제가 그 나이에 축구를 즐기는 방법일 테니까요.
축구와 함께 나이 들어간다는 것. 앞으로의 시간을 더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