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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축머치토커 Feb 01. 2019

벤치 워머의 가슴도 뛰고 있습니다.

키보드 위의 독단적 스트라이커


벤치 워머(bench-warmer)를 아시나요?

 벤치 워머? 단어 그대로 벤치를 달구는(?) 사람들을 말하죠. 벤치가 뜨끈뜨끈해질 정도로 오래 벤치에서 대기하는 선수들. 우리는 그렇게 그들을 부르곤 합니다.

 축구, 농구, 야구와 같은 단체 경기에서는 교체를 준비하는 대기 선수들이 필요합니다. 이들은 항상 언제 투입될지 모른 채 벤치에서 기다리고 있죠. 더욱이 축구는 교체 인원이 경기 당 3명으로 적은 편이고, 교체 아웃된 이후에는 다시 경기에 참여할 수 없기에 다른 종목에 비해 상대적으로 출전 기회를 잡기 어렵습니다.

(참고 : 농구는 경기 중 인원, 횟수에 상관없이 자유롭게 교체가 가능하며 야구는 약 25명의 엔트리 전원이 경기에 출전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종목보다 교체 선수의 역할이 중요하며, 이를 결정하는 감독의 역할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물론 후보 선수가 필요한 것은 전술적인 이유 때문만은 아니죠. 부상처럼 경기 중 발생할 수 있는 돌발 상황에 대비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어쨌든 대기 선수는 꼭 필요한 존재인 거죠.



경기 감각과 경기를 뛰고 싶은 마음 중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2014 브라질 월드컵 최종 엔트리 발표 후, 당시 홍명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은 소속팀에서 출전 기회를 잡지 못하던 박주영을 엔트리에 포함(등번호도 무려 10번으로)시키며 언론의 질타를 받아야 했습니다. 소속팀에서의 꾸준한 경기 출장을 대표팀 선발의 대원칙으로 수 차례 이야기했기 때문이죠. 당시 박주영의 발탁을 두고 "본인이 세운 원칙을 무시했다.", "이전 지도 경험만을 토대로 한 편향적인 선수 선발이다." 등 언론의 혹평이 이어졌습니다. 불행하게도 월드컵 본선에서 대표팀과 선수 모두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활약으로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죠. 정말로 경기 감각이 선수 선발의 첫 번째 이유인 것 같네요.


 90년대 후반 전성기를 누렸던 이원식 선수를 아시나요? 10여 년이 넘는 선수 생활 동안 이원식에게 붙은 수식어는 '특급 조커'였습니다. 항상 교체로 출전해서 경기의 흐름을 바꾸는 플레이와 골을 연거푸 성공시켜 게임 체인저(game changer)의 역할을 톡톡히 했죠. 경기에 꾸준하게 선발로 출전하지 못하는 대기 선수 중 한 명일 텐데, 경기 감각은 누가 알려준 거죠? 꼭 90분을 온전히 소화할 수 있어야만 경기 감각이 있는 걸까요?


 최근 2019 아시안컵에서 이승우 선수의 '물병 논란'이 있었습니다. 경기에 교체로도 출전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자 물병을 걷어차며 화를 참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죠. 며칠 후 언론 인터뷰를 통해 본인의 행동을 정중하게 사과했지만, 대표팀 동료들의 인터뷰에도 자주 언급되며 언론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후 이승우는 바레인과의 16강전 후반, 동점 상황에서 경기에 출전하며 스스로의 아쉬움을 털었을 뿐만 아니라, 울분을 토하는 듯한 적극적인 움직임과 슈팅으로 경기의 흐름을 바꿨습니다. 그리고 경기에서 이겼죠. 이승우는 원래 아시안컵 최종 엔트리에 포함되지 못했습니다. 대회 직전 나상호의 부상 이탈로 급하게 엔트리에 포함되었으며 소속팀에서도 많은 출전 시간을 부여받지 못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기에 투입되어서 좋은 활약을 펼친 것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감각이 선수에게 있었기 때문일까요?



경기에 뛸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벤치에도 앉을 수 없다.

 저는 2018 러시아 월드컵 최종 엔트리 발표를 앞둔 시점에 공개된 한 축구인의 언론 인터뷰에 주목했습니다.

"경기에 뛸 준비가 되지 않았다면 벤치에도 앉을 수 없다." 인터뷰의 내용입니다. 언제 경기에 투입될지 모른 채 벤치에 앉는다고 해서 경기에 나설 준비가 되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경기의 결과에 모든 책임을 지는 감독 또한 그런 선수를 벤치에 앉힐 수 있을까요? 가끔 우리는 대기 선수라고, 출전 시간이 짧다고 그 선수의 가치를 과소평가하기도 합니다. 물론 맞습니다. 메시나 호날두가 벤치 워머인 모습을 아직 상상할 수 없으니까요. 그렇다고 벤치에 앉아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평가하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그들도 경기에 출전하는 선수들과 똑같은 노력과 간절함이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준비할 테니까요.

 벤치에 앉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미 경기에 뛸 준비가 되어 있는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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