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글에 이어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그 중에 내 다음 회사는 없었다.
(지난 글: https://brunch.co.kr/@mimemy/27)
1. 첫번째 회사는 크고 잘 나가는 곳이었다. 전사 원격근무를 한다는 곳인만큼 모든 면접은 화상으로 진행되었다. 면접 전에 과제가 주어졌고 그 과제를 면접 자리에서 발표한 후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이었다. 오랜만에 보는 면접인 데다, 꼭 가고 싶은 마음에 긴장 가득한 상태로 면접을 보았다. 면접이 끝나고, 충분히 잘 답변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망했다'고 확신했지만 의외로 합격했다. 하지만 이때는 내쪽에서 거기 가고 싶은 맘이 식은 후였다. 면접자리에서 회사에 대해 조금도 끌림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첫째로, 면접관분들은 정중했지만 그저 사무적이고 오만하다는 느낌을 주었다. 미소지으며 지원자를 배려하거나 대우하는 모습은 간데 없고, 지원자가 그들 회사에 오고 싶어 안달났을 거라고 상정하고 일방적으로 평가하려고 하는 모습이었다. 둘째로, 스타트업이라기엔 너무 커버린 것인지 다른 포지션과 유기적으로 협업하여 서비스의 성장을 도모하기보다는 퍼포먼스 마케터로서 주어진 일-광고 관리-에나 집중해야 할 거라는 걸 짐작할 수 있어 정이 뚝 떨어졌다. 종합해서 말하면, 이 회사에 들어가면 소중한 팀원으로 대우받으며 서비스를 키워내기보다는, 이미 잘 커버린 회사의 한쪽 톱니바퀴를 굴리는 부속품에 지나지 않겠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그런 회사라면, 조금도 끌리지 않는다. 결정적으로, 면접에 합격한 후 확인해보니 전사 원격근무를 하는 곳이라고 해도 내가 원하는 해외 원격근무는 다른 얘기였다. 어차피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니었군, 하며 미련없이 보내주었다.
2. 두번째 회사는 한창 무섭게 성장 중인 스타트업이었다. 평소 관심 있게 보던 곳이라 리쿠르터가 링크드인으로 제안을 보냈을 때 들뜬 마음으로 응했는데, 알고 보니 잡플래닛 평가가 무서우리만치 형편없었다. 일단 가벼운 맘으로 리쿠르터분과 만나 티타임을 가져보았다. 이번에는 엄한 곳에 에너지 낭비를 하지 않고자, 이러저러해서 3개월 정도 해외 원격근무를 희망한다는 점을 미리 밝혔다. 리쿠르터분은 지금 바로 확답을 드릴 순 없지만 해외에서 근무하는 팀원도 있는 회사 분위기상 불가능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만남은 화기애애했지만, 면접 전 사전과제를 전달 받고 나니 의욕이 떨어졌다. 다른 면접도 잡혀 있는 마당에, 합격해도 갈지 안 갈지 모를 회사의 과제를 하느라 시간을 쓰고 싶지 않아 고민 끝에 정중히 거절 메일을 보냈다. 그러자 리쿠르터분이 혹시 과제가 버거워서 그런 거면 과제 전형을 생략할 수 있도록 해보겠다더니 정말로 과제를 스킵하고 면접을 진행할 수 있게 해주는 게 아닌가? 아니, 내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괜히 과제 열심히 해서 냈으면 억울할 뻔했다.
그렇게까지 배려해준 마당에 면접을 안 갈 수도 없고, 다소 내키지 않지만 1차 실무 면접을 갔다. 들어가면 함께 일하게 될 팀원 두 분과 함께 한 면접은 무척 정중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고, 즐거웠다. 그분들이 날 맘에 들어한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2차 면접을 진행하자는 연락을 받았다. 하지만 역시 잡플래닛의 냉혹한 평가와, 대표 인터뷰에서 엿볼 수 있는 빡센 업무 문화가 어른거려 이곳에 가도 될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결정을 위해 내 중요한 조건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해외 원격근무 가능한 게 맞는지, 그리고 내 입사 가능일이 2개월 뒤인데 가능할지. 그러자 해외 원격근무는 여전히 확실히 답해줄 수 없고, 입사가능일은 더 빨라야 한다고 한다. 아니 나 스웨덴 가야한다고 미리 말했잖아요!
그래서 2차 면접은 가지 않았다.
3. 세번째 회사도 꽤 이름을 들어본 재밌는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는 회사였다. 이곳도 링크드인에서 제안을 받아, 사전에 COO와 티타임을 가진 후 면접을 보았다. 어디선가 자기네들은 사람을 까다롭게 뽑기 때문에 면접을 3차까지 본다고 인터뷰한 걸 봤는데, 내게 처음 컨택한 사람이 대표 본인이어서인지 한 번의 면접으로 모든 게 결정되었다. 이번에도 면접 전부터 내가 해외 원격근무를 바란다는 점과, 입사가능일이 2개월 후라는 것도 분명하게 말하고 면접에 임했다. 젊고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는 이 회사 대표님은 그 어떤 면접보다 심도 깊고 집요한 질문을 던졌다. 이런 것까지 물어볼 거라곤 상상도 못한 데까지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며 내 의견을 물었다. 다른 어디서도 본 적 없는 질문의 깊이를 보며, 이런 사람이 대표라면 뭘 해도 제대로 해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시간에 걸친 면접을 마무리하며 그분은 같이 일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언급했고, 바로 다음날 나는 3개월의 해외원격근무 조건까지 포함하여 오퍼를 받았다. 오예!
현직장에서 작년에 3개월이나 해외원격근무를 수용해준 것은 놀라운 일이고, 또 스웨덴에 가려면 꼭 현 회사에 붙어 있어야만 할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회사에 가더라도 내 힘으로 원격근무 조건을 쟁취해낼 수 있단 걸 확인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무척 고무적이었다. 제일 가고 싶었던 회사는 아니었지만, 대표님의 투지도 믿음직스럽고 마케터로서 성장하기에 좋은 회사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마침내 구직 프로세스를 마무리하고, 현 회사에도 이직 소식을 전하기로 결심했다.
나머지 두 회사는 떨어졌다. 난 원래 면접 때의 느낌으로 결과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그냥저냥 나쁘지 않아서 결과를 모르겠다고 생각되는 면접은 못 본 거고, 상대방이 날 맘에 들어하면 면접 때부터 딱 느낌이 온다고. 그런데 잘 봤다고 생각한 면접에서도 떨어졌다. 첫번째 회사 면접은 망했다고 생각했는데 붙고, 면접 잘 봤다며 룰루랄라 나온 회사에서 떨어지는 걸 경험하면서 면접 때의 직감이 꼭 맞진 않단 걸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그 회사에 가려고 생각하다보니 무언가 찝찝했다. 새로운 회사에 가는 건데 시작만큼은 기쁘고 설레야 마땅하거늘, 어쩐지 기대되는 마음보다는 어딘가 걸렸다. 그 회사의 서비스가 이제부터 나아가려고 하는 방향이, 현 회사의 서비스 성격과 너무 겹쳤던 것이다. 나는 소셜 카테고리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건데, 또 그 시장에서 똑같은 경쟁사들을 벤치마킹하며 지금까지와 비슷한 메시지를 만드는 마케팅을 수행해야 할 것 같았다. 이게 내가 생각했던 이직 조건에 맞나? 나는 이 서비스의 타겟이 아닌 것 같은데.
그래도 해외 원격 근무 조건까지 오케이해준 곳이고, 현재 지원한 곳 중에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으니 일단 가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새 회사의 채용담당자가 갑자기 딴소리를 했다. 분명히 입사가능일자를 처음부터 못 박았고, 그곳 대표님도 알겠다고 한 바 있는데 내 입사가능일을 한 달 정도 앞당기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것이다. 한 3주만 온보딩을 거치고 스웨덴 원격근무하게 해주겠다며.
나는 한 달 정도 현 직장을 정리하고, 한 달은 스웨덴에서 휴식 시간을 가진 후 이직할 생각이었다. 새 회사에서 괜찮다고 해도, 입사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원격근무를 하는 건 내가 부담스럽다. 그리고 무엇보다, 입사가능일에 대해선 면접 때 대표님과 직접 협의를 마쳤는데 왜 갑자기 빨리 안 오면 곤란하다고 말을 바꾸는 거야?
그러잖아도 여길 가는 게 맞는지 불편했던 마음에 그것은 트리거가 되었다. 조금 불쾌하고, 신뢰도가 떨어지면서 이직할 마음이 사라졌다. 마침 그날 현직장에서 새로운 마케팅 프로젝트에 대한 회의를 거치면서, 애정도 있고 즐거운 이곳에서 조금 더 일하고 싶다는 마음이 솟구쳤기 때문이기도 하다.
현직장에 조금 더 머물기로 했다. 이직은 다음 턴으로 미루고. 지금같은 찝찝함이 아니라 확실한 기대감이 드는 곳으로 신중하게 이직을 결정해도 늦지 않으니까.
현직장에는 이직 얘기를 하는 대신 다시 한 번 스웨덴에 가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 5월 말, 작년에 이어 여전히 코로나로 텅텅 빈 핀에어 비행기를 타고 나는 스웨덴으로 날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