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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웨지니 Sep 19. 2021

이십대 초반의 일기를 다시 읽어보았다

우연히 옛날에 쓴 블로그에 들어가보았다. 10대 후반부터 20대 초중반까지의 자질구레한 사건과 생각들을 적어놓은 일기들이 거기 모여있었다. 몇 개 넘겨보다가, 그만 새벽 세시가 넘게까지 빠져들고 말았다. 이게 이렇게 무섭다니까.


지금은 좀 덜한데, 나는 일기를 쓰면 항상 너무 자세하게 적는 것이 문제였다. 나중에 보면 의미도 없을 대화 내용 하나하나를 기억나는 대로 다 적느라고 하루 일기 쓰는 데 몇 시간이 걸렸다. 어차피 조금만 지나도 다시 보지 않을 대화 내용이나, 내가 관심 있던 남자와의 시간 같이 그 당시의 내게 의미있는 것들을 작은 행동까지 낱낱히 기록했다. 일기와 멀어져서 상당기간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은 시기들도 있지만, 일기를 가까이하던 때는 정말 모든 것을 적어두었더라. 


그게 고치려 해도 잘 고쳐지지 않는 병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제 그 지난 날들의 기록을 읽다보니 무척 재미있어서 과거의 나를 칭찬해주고 싶었다. 




1.


스물한살, 그리고 스물세살적의 이야기를 읽어보았다. 연애를 무척 하고 싶었지만 도무지 좋은 인연이 나타나지 않던 시절이었다. 지금보다 어리고 아주 순수할 적의 내 주변에는 참 여러 사람들이 스쳐지나갔었다. 그리고 관심과 사랑도 많이 받았더라. 이런저런 사람들과 있었던 일들을 그 시간 속으로 되돌아간 것처럼 생생하게 들여다보고 있자니 소설을 읽는 것처럼 설레는 기분까지 들었다. '와, 이런 때가 있었구나. 나 이 때 잘 나갔네~'하면서 다시 그런 기분을 느껴보고 싶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사실 그 때 나는 그리 기쁘지 않았던 걸 안다. 남들 다 있는 남자친구를 사귀는 게 내겐 너무 어려웠다. 의미없이 지나갈 얕은 관심들, 누군가 나를 좋아해주더라도 내 마음에 차지 않거나, 타이밍이 어긋나거나, 내가 원하는 상대는 나에게 관심 있지 않거나... 모처럼 좋은 사람과 마음이 맞아 연애를 시작하나 했더니만 허무할 만큼 금방 끝나버리거나. 솔로일 때는 늘 느끼지만, 서로 끌리고 또한 잘 맞기까지 한 한 사람을 찾는 건 무진장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지금은 그 막막한 과제 속에 놓여 있지 않고, 좋은 짝꿍을 찾아 함께 하고 있단 것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실감했다. 물론 완벽하진 않지만, 일기 속에서 호감이 스쳤던 그 많은 사람들 중 누구도 아쉽지 않을 만큼 괜찮은 사람과 함께하고 있다는 게 감사하다.




2.


그리고 또 느낀 건, 내가 참 많은 인연을 흘려보냈구나 하는 것이었다. 


살면서 내가 속한 곳, 내가 있을 자리는 몇 번이고 바뀌었다. 그 때 함께 했고 감정을 나눴고 가깝게 지냈던 사람들과 자연스레 멀어지고 나면 금세 생각도 나지 않게 된다. 다시 만나고 싶지도 않고,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지도 않고. 나는 가까운 친구가 아니면 먼저 연락하는 편이 아니다. 그렇게 대부분의 인연들을 그저 흘려보냈다. 더 이상 볼 일도 없을 거라 생각한 과거의 인연이 불쑥 연락와서 안부를 묻거나 만나자고 하면 부담스럽게 느낄 때도 많다.


그런데 일기장 속에는 그렇게 내가 과거의 인연으로 묻어버린 사람들이 생동감있게 살아서 나와 시간을 보내고, 같이 웃고, 내 고민에 함께해주기도 하며, 내 마음을 따뜻하게 채워주고 있었다. 그들이 나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줬을 때 나는 기분이 좋아서 그걸 일기장에 적기도 하고, 내게 마음 써주는 것을 느낄 때 솟아나는 고마운 마음을 또한 일기에 적었다. 지금은 그 친구의 존재만 기억할 뿐 함께 나누었던 대화나 있었던 일들은 다 기억에서 지워져 있었는데. 그 일기를 읽는 동안 다시 그들은 내 친구가 되어 있었다. 문득 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하고, 연락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오랫동안 연락을 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은 내 카톡에서 '숨김 친구'에 들여보내곤 한다. 그들은 당연히 모두 '숨김 친구'들이었다. 일기를 한창 읽다가, 카톡을 열어 숨겨진 친구들의 목록을 쭉 내려보았다. 그 중에는 이름을 보면 또렷이 기억나는 사람도 있고, 이제는 누군지 모를 사람들도 많았다. 그곳에서 일기장 속 인물들의 프로필 사진을 하나씩 눌러보았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이렇게 혼자 추억에 잠겨 오랜만에 연락해 안부를 물었는데 상대가 나를 전혀 반가워하지 않고 귀찮아하는 기색이면 씁쓸하겠다. 내게 아주 오랜만에 연락을 줬던 사람들을 난 지금껏 그런 식으로 대했구나. 매정하던 내 모습을 반성했다. 




3.


또 한 시절의 나는 지독하게 H를 생각하고 있었다. 대학시절 딱 2주를 사귀었던 남자애다.


당시 그애가 내게 준 충격은 정말 강렬한 것이어서 지금도 꽤 선명하게 기억한다. 그래서 그 시절 내 일기가 온통 그애 얘기인 건 새롭지 않지만, 그때의 모든 대화와 생각들을 다시 들여다보자니 기분이 묘했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작은 세상에서 살아온 나는 정말 순진하고 건강한 마음으로 나 자신을 깊이 신뢰하고 있었다. 그애가 자기 너덜너덜하고 가난한 모습을 꺼내서 보여줬을 때 나는 온 마음으로 그애에게 사랑을 주고 싶어했고,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줄 수 있는 사랑하고 그애가 기대한 사랑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갓 사귀기로 한 사이였기에 나는 아직 그 애에게 빠져있지 않았는데, 그애는 내가 여자친구로서 자신을 세상 끝까지 사랑해주면서 자기 모든 것을 품어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래서 우린 아주 금방 헤어졌었다. 


그 때 그애는 자기가 바라는 말을 도무지 해주지 않는 나를 비난했다. 


"넌 따뜻해 보이지만 속이 차가워. 너무 이성적이야. 그래서 말할수록 나만 상처받아." 


나는 그애를 온 마음으로 생각하고 매일 같이 그앨 위해 기도하고 있었는데. 내 말과 행동이 그애에게는 따뜻함이나 위로로 전달되지 않고 오히려 차갑게만 비춰졌다는 게 허무했다. 그래서 내 친구들에게도 나에 대해 많이 물어보고, 내가 표현이 부족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차갑거나 무관심한 느낌을 주지는 않았던지 돌아보기도 했었다.


그게 2014년의 끝물이다. 그런데 2021년 오늘날까지도 나는 여전히 표현이 부족한 츤데레로 살아가고 있구나. 대체 왜 그런 거니?


끊어져버린 오랜 인연들에게 안부라도 묻고 싶다고 느꼈던 것도 잠시, 그럴 게 아니라 지금 곁에 있는 사람들에게나 잘하자고 생각했다. 나에게 다가와주고 따뜻하게 살펴주는 사람들, 나는 충분히 살피고 있던가. 지금처럼 시간이 있을 때, 미루지 말고 내 사람들에게 마음을 전해야겠다.




4.


기억에서 아예 없어져버린 일들이 참 많더라. 


참, 이런 사람도 있었지!

이런 일도 있었어?

얘랑 이때까지도 연락했었다고?

얘랑 내가 만나서 밥을 먹었다고?

내가 이런 행동을 했었어? 

얘가 나한테 이런 말을 했어?


이런 충격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재미있었고, 이 일기가 값졌다. 꼭 남의 얘기 같기도 한 내 일기들. 


기록하지 않으면 이렇게나 많은 것들이 그저 잊혀지는구나. 기억의 한켠에조차 남지 않고 당사자에게조차 까맣게 잊혀져서 없던 것과 같이 되는 것이구나. 이 때 정성스레 일기를 적어준 그때의 나에게 고마웠다. 반대로 이 다음 일기가 궁금한데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으면 그게 퍽 아쉬웠다. 좋았던 시간들을 일기로 옮기지 않은 것도 많은데, 그건 다 아까워서 어쩌나.


또 하나 일기를 읽으면서 놀랐던 건, 내가 입대를 앞둔 후배를 만나서 편지 써주겠다며 주소를 알려줬다는 대목에서다. 편지를 받았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그 후배는 날 좋아하던 애였기 때문에 틀림없이 보냈을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답장을 써줬던가? 설마, 썼겠지? 호기롭게 주소도 알려줘놓고 군인 후배의 편지에 답장하지 않았을까봐 걱정되었는데 그 후의 이야기는 어디에도 적혀있지 않았다. 나중에 편지들을 모아둔 박스를 열어볼 일이 있으면 이 후배의 편지도 한 번 찾아봐야겠다.


정말이지, 나는 얼마나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살고 있을까? 


물론 모든 것들을 다 기억할 필요는 없다. 이 일기에 적힌 많은 일들도, 이렇게 시간이 지나 우연히 일기를 다시 열어보았기에 수면 위로 떠올랐을 뿐이다. 열어보지 않았다면 이 기록도 그저 묻혀 있었을 거다. 그렇더라도 현재를 사는 나에게 아무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또한 그 때 열심히 적어놓은 일기들, 재미있게 읽은 것도 많지만 다시 읽기도 싫을 만큼 무의미한 기록들도 많았다. 그래서 모든 걸 잊지 않으려고 기록으로 남길 필요는 없다. 기록하는 것도 시간이 들어가는 일이고, 그 시간 역시 기회비용이니까. 


그렇지만 내가 푹 빠져들었던 시간과 생각들은 역시 기록하고 싶다. 사랑 받았던 순간들, 내가 사랑했던 아이들과 친구들, 남자들. 그 때의 치열했던 고민들, 지금의 나를 만든 사건들. 자주 들춰보지는 않아도, 원하면 꺼내서 그때를 다시 되살려볼 수 있게. 


올해도 참 좋은 일이 많았는데, 잘 기록해두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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