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곁에 있으면 편안해졌다.
그에 대한 미안함이 마음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미 끝난 일이었다. 예전보다 더 열심히 새벽수영을 하고 테니스 레슨을 받았다.
내가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 스펙 좋은 나의 직장동료들은 잘도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내게 결혼은 아주 먼 얘기가 될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또 한 번 패배자가 된 것만 같았다.
친구를 만나서 맛있는 것도 먹고 수다도 떨었다.
기분이 좀 풀리자 자연스레 그와 있었던 일을 떠들게 되었다.
이미 결혼한 친구는 내가 얼마나 '안정'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 결혼은 온전히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그래도 (내가 그토록 원하는) '안정'은 선물한 것 같았다. 그녀는 그의 배려 가득한 선물꾸러미 얘기에 설레어했다. 드디어 착한 사람을 만난 것 같다고 했다.
우리는 이제 그만 만나기로 한 그에 대해 좀 더 진지한 생각을 나누었다.
그가 싫었던 것이 아니라 많이 좋아하지 않을 것 같기에 헤어졌다는 말에 친구는 한참을 웃었던 것 같다.
언니는 이제 이십 대가 아니라는 말도 함께였다.
마음은 참 간사하다.
헤어지자고 말한 지 2주가 지나가는 중이었다.
그를 다시 한번 만나보고 싶어졌다.
그와 나는 둘 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이었다.
새벽 수영 가는 길, 그에게 문자를 보냈다. '출근하셨나요?' 시간은 5시 35분경으로 기억한다.
떨리던 순간이었다.
그가 문자를 확인하고 답장이 오는 데에 채 5분도 걸리지 않았던 것 같다.
'아니요. 아직 안 갔어요.'
그에게 물었다. '통화 가능할까요?'
곧 전화를 걸어온 그에게 솔직하게 물었다. '우리 다시 한번 만나볼까요?'
자존심이 상했을 법도 한데 그는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그리고 바로 무엇을 하며 데이트를 할지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마치 나를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해 둔 것처럼 그는 꾸준히 이것저것 제안했다.
평소 같으면 새벽수영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주말에 혼자서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 궁리했을 나는 아침부터 나들이 길에 나섰다. 나를 데리러 온 그의 손에는 그의 어머니가 아침부터 챙겨준 과일이 가득했다. 한입 베어문 과일은 달콤했다. 부모님이 모두 일하시는 내게는 쉽지 않은 배려였다.
백운호수에 가서 매운탕을 먹고 배를 탔다.
어린아이처럼 신이 난 그의 얼굴을 보는 일도, 난생처음 쏘가리 매운탕을 먹어보는 일도 즐겁기만 했다.
내 앞에만 오면 멈춘 것만 같던 시간이 언제 그랬냐는 듯 그와 함께 있는 동안은 하늘의 구름처럼 산들산들 잘도 흘러갔다.
어떤 말을 나누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웃고 있는 내 얼굴은 사진으로 남았다.
그의 곁에 있으면 편안해졌다. 가족끼리 외식을 온 듯 스스럼없이 편안하게 있어도 괜찮았다.
계획 세우기를 귀찮아하는 나 대신 그는 계획을 세우고 추진력을 발휘했다.
주말에 속초에 있는 영랑호를 보러 간 것도 그의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그는 장거리 운전을 능숙하게 했다. 수줍어하던 모습과 달리 차분하게 운전대를 잡았다.
말 그대로 평온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그에게 장난을 걸기도 하고 그가 피곤해 보이면 대신 운전대를 잡기도 했다.
세상의 복잡하고 어둡고 해결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던 일들이 그의 앞에만 가면 단순하고 명료해지는 것 같았다. 어두웠던 내 머릿속 한편에 전구가 환하게 켜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의 만남은 시작되었다.
건조하고 진지하기만 했던 나는,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세상에 비하면 한 없이 밝고 편안한 한 사람의 곁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의 따뜻한 세계는 조용히 그를 뒷바라지하고 챙겨준 어머님의 보살핌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도 조금은 알고 있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었다. 너그러운 엄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사람... 내게 그는 그렇게 보였다. 그래서 그간의 지친 내 삶을 이해해 줄 것만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