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플 번역 결과 기다리기, 필력 운동의 시간.
이번 주 월요일에 제출한 샘플 번역 결과가 아직도 나오지 않았다. 물론 경험상 다음날까지 연락이 없으면 거의 불합격인 건 알지만, 왠지 불합격이라는 도장이 꽝 찍힌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을 해야 마음속에서 완전히 떠나보내줄 수 있을 것 같다. 불합격 도장을 받을 때까지는 휴대전화를 곁에 두고 혹시라도 전화(합격일 경우 전화를 해주신다)를 놓칠까 봐 스마트워치를 찬 상태로 계속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다. 정말 간절했던 책일 경우 불합격 메시지를 보고도 한동안 계속 아쉬워하기도 한다.
퇴사를 한지 이제 벌써 3년이 다 되어간다. 지난 3년 동안 출판번역가라는 타이틀을 달기 위해서 정신없이 달려온 것 같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이 애매한 시간 동안 바깥세상에서 많은 일이 일어났고, 내 인생에도 많은 일이 일어났고, 매일이 정신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유롭게 보내지도 못했던 것 같다. 감사하게도 에이전시에서 계속 일감을 주셔서 벌써 역서가 5권이 되어 '신입 번역가'라는 이름을 떼고 이제는 '초급 번역가' 정도의 이름은 붙일 수 있는 레벨이 되었다(고 나 혼자 생각한다^^).
역서, 리뷰, 샘플 작업을 하고 있을 때는 뭔가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이 몽롱한 기분이다. 해야 할 일이 있고, 쉬는 동안에도 내게 주어진 일이 머릿속, 마음속 한편에 웅크리고 앉아있는 것이 느껴진다. 일을 할 때의 의외의 장점은 남편에게 잔소리를 덜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유는 내가 집안일을 대충 하기 때문이다. 일감이 없을 때는 외부 환경에 더 예민해지기 때문에 남편에게 잔소리를 많이 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남편이 아침에 마시고 난 커피잔을 싱크대 옆에 그냥 둘 경우, 일이 있을 때면 자기 전까지 방치해뒀다가 내가 그냥 조용히 치우거나 남편에게 치워달라고 하는데, 일이 없으면 마신 즉시 치우길 바라는 마음이 생긴다. 정신이 관심을 쏟을 곳이 없어 헤매다가 지저분한 것을 포착하면 신경이 쓰이기 때문인 것 같다. 실제로 우리 집은 내가 일을 하지 않을 때 훨씬 깨끗하다. 사실 의뢰받은 번역일이 없어도 할 일은 많다. 일을 할 때 일 끝나면 해야지 하고 미뤄둔 일도 많다. 우선 1순위는 전자책이다. 지금 거의 3년째 붙들고 있다. 그나마 이번에 새 역서를 맡기까지 텀이 조금 길어지고 있어서 (이제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다) 수정 작업을 많이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획부터 편집까지 내가 다 맡은 작업이기도 하고 또 이 책은 내가 가장 처음 읽었다고 기억하는 영어 소설책이기 때문에 잘하고 싶다는 욕심도 크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걸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확실히 소설이 자기 계발서나 경제경영서보다 손이 많이 가더라. 특히 대사 처리가 어렵다. 존댓말/반말을 등장인물의 관계를 잘 살펴서 사용해야 하고, 이 책에는 요크셔 사투리까지 등장해서 더 어렵다. 처음에는 요크셔 사투리를 살려서 한국어로 번역하기가 어려워 (어느 지방 사투리로 쓸 것인가? 게다가 내가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사투리도 없다) 그냥 표준어로 번역하고 '00가 짙은 요크셔 억양으로 말했다.' 식으로 덧붙여주려고 했는데 다 해놓고 보니 뭔가 내가 소설을 너무 많이 훼손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약간의 사투리를 더해줬다. 하지만 여전히 어색하다... 언제쯤 마음에 드는 문장이 될까.
이번에 샘플을 지원한 책 역시 소설인데, 마침 동일한 책을 예전에 인강으로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어서 강의 내용을 복습하면서 샘플을 작성했다. 확실히 소설 번역이 재미있는 것 같다. 첫 소설 역서는 언제 맡을 수 있을까? (지금까지 내가 번역한 역서들은 전부 경제경영서이거나 자기 계발서였다) 소설 번역을 하다 보니 문장력과 어휘력이 떨어진다는 것이 더 확 와닿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나는 언젠가부터 쓰는 건 좋아하는 데 읽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초등학생 때까지는 책 읽기도 좋아했던 것 같은데, 영상을 보는 것에 너무 익숙해진 걸까, 아니면 쓰는 일을 직업으로 하다 보니 남이 쓴 글까지 읽는 게 싫어진 걸까. 아무튼 읽기를 매우 매우 소홀히 하고 있으니 실력이 늘지 않는다. 내가 아는 문장, 내가 아는 단어 안에서 번역을 하려고 하니 문장이 좋아질 리가 없다. 사실 읽고 싶은 책은 많은데, 요즘 다시 운동에 빠져서 책에 쏟을 힘이 부족하기도 하고 내가 읽고 싶은 책은 남도 읽고 싶은지 도서관에서 빌리려면 책이 없거나, 대기가 너무 길어서 책을 받을 때쯤이 되면 이 책을 왜 빌리려고 했었지? 하면서 흥미가 떨어진다. 그렇다고 책을 사자니 이제 곧 이사를 가야 하는데 집에 짐이 많아지는 것도 싫고 돈도 들고 해서 책을 새로 사기도 왠지 부담스럽다. 하지만 공짜는 없는 법. 운동 실력을 늘리려면 그 모든 귀찮은 과정 (운동복 갈아입기, 헬스장/학원 까지 걸어가기, 선생님하고 시간 맞추기 등)을 거치고 비용도 지불해야 하는 것처럼 글쓰기 실력도 늘리려면 귀찮은 과정을 거치고 돈도 써야 할 수밖에.
그래서 오늘 오랜만에 도서관에서 <내 문장이 그렇게 이상한가요?>라는 글쓰기 책을 빌려왔다. 글쓰기 코칭을 하는 분이 운영하시는 블로그에서 추천한 책인데 도움이 될 것 같다. 최근에 네이버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의 블로그를 살펴봤다. 글을 쓰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단지 상업적인 블로그가 아닌, 자기만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구독자와 방문자를 모으고 있었다. 앞서 말한 글쓰기 코치 분은 유료 에세이도 연재하신다고 했다. 문득 내 블로그의 세계관은 뭘까 고민해보았다. 블로그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긴 했지만, 본래 '문학/책'이란 카테고리로 묶어놨던 블로그에는 글이 13개 있었는데 '독서' 폴더에는 글 0개.. 가장 많은 글이 있는 폴더는 '음식'이었다. ㅋㅋ 요즘 일이 없어서 밥을 잘 챙겨 먹은 덕분인 듯하다. 일이 있을 때는 아무래도 온 힘을 일에 쏟다 보니 음식 챙겨 먹을 에너지가 부족하다. 이런 면에서 일이 없는 시간은 나에게 영양보충의 시간인 것 같기도 하다. 음식 포스팅을 줄여야 하나 잠시 고민했지만, 이 글들을 쓰면서 즐거웠고, 각 잡고 쓰지 않아도 술술 포스팅이 완성되는 점이 장점인 것 같아서 이 공간은 일단 이대로 좀 더 두다가 글이 한 50개쯤 쌓이고 나서 그때 어떤 글이 제일 많은지 확인해보고 컨셉을 다시 잡기로 했다. 나는 글을 쓸 때도 아웃라인을 잡고 쓰기보다 일단 머릿속에 있는 말들을 쭉 쓰고 그걸 정리해 나가는 방법이 더 잘 맞는 것 같다. 이런 의식의 흐름 기법이 좋다. 언젠가 내 책을 쓰게 되더라도 아웃라인을 뙇 잡고 끝까지 쓸 자신이 없다. 어느 정도의 플롯은 있어야겠지만 일단 뭐라도 좀 쓰다가 잡게 될 것 같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네이버 블로그에는 제대로 된 글(제대로 된 글이 뭔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렇게 브런치에 쓰는 글처럼 분량이 좀 길고 사진이 없는 글)을 쓰기가 힘들다. 실명으로 운영돼서 그런 것도 있고, 네이버 블로그라는 플랫폼의 성격 때문도 있다. 플랫폼에 '성격'이 있다는 게 참 재미있다. 플랫폼 마케터 분들이 열일한 덕분이겠지. 브런치에 있을 때 확실히 이런 줄줄이 글이 더 잘 써진다.
아무튼 샘플 결과가 빨리, 그리고 '잘' 나왔으면 좋겠고 (웬만하면 합격으로...^^) 근력 운동도 열심히 하고 (어제 인바디를 했는데 살을 빼는 것보다 근육을 늘리는 게 더 시급한 상태였다 띠로리), 쉬는 타이밍에 책도 많이 읽고 내 글도 많이 쓰면서 필력 운동도 열심히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