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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원사계 Jan 02. 2024

개근거지

성실이 무기가 아닌 시대.

요즘처럼 밈이 날개를 달고 있는 시대가 있을까 싶다. 인터넷에 밈이라고 검색만 해봐도 처음 보는 것들이 수두룩하다. 스무 살 무렵에 '찐찌버거'라는 단어가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다. 찐따, 찌질이, 버러지, 거지를 줄인 말인데 저 단어가 내겐 너무나도 충격이었다. 친구들끼리 '야 이 찐찌버거야!'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회가 기이하다고까지 생각했다. 어떻게 버러지, 거지라는 말을 공기처럼 내뱉을 수가 있지? 지금 생각해도 너무 가슴 아픈 유행이다. 사회의 어딘가가 병이 든 게 확실하다고 생각되었다. 그로부터 약 10년이 지났다. 찐찌버거의 충격을 잇는 새로운 유행어를 만나게 되었는데.. 바로 '개근거지'이다.


개근거지? 개근하는 사람들이 왜 거지야? 개근이야말로 최고의 덕목이자 미덕인 시대에 초등학교를 다녔던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개근거지라는 말의 뜻이 더 충격적이었다. 여유 있는 집의 아이들은 학기 중에 체험학습보고서를 내고 국내나 가까운 해외로 놀러 간다는 것이다. 반면 맞벌이를 하거나 집안에 여력이 없으면 빠짐없이 학교를 나와야만 하는데 그걸 보고 개근거지라고 한단다. 찐찌버거가 우리 사회의 피멍 정도였다면 개근거지는 어디 하나 부러진 수준의 병이 아닐까? 어떻게 저런 단어를 만들 수가 있는 것일까.


초등학교 6년에 중고등학교 6년 도합 12년을 개근해야만 나의 성실성을 인정받을 수 있던 시대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옛말이 된 지 오래이다. 사회 어디에서도 개근상을 가져오라는 요청을 받은 적이 없었다. 알고는 있었지만 개근하는 것을 가지고 눈총 받는 시대가 오다니. 성실성은 이제 3류가 되었다. 무엇이던 성실하게 하는 건 의미가 없다. 잘해야 진짜다. 개근거지의 진짜 의미는 과정보다는 결과만을 좆는 시대의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찐찌버거는 애교인 수준이었다. 개근거지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언니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 짜리 아들을 키우는 언니는 애들을 위해서라도 학기 중에 여행을 한 번은 가야 한다며 내게 이야기해 준 것이다. 요즘 엄마들은 우리 애가 개근거지 소리를 듣지 않게 하기 위해 학기 중에 꼭 한번 어디를 가는 추세라고. 보여주기 식의 결석이다. 근데 우리 조카도 개근거지가 될 판이라고. 아놔..


해외까지는 아니더라도 오션뷰 호텔 정도는 가야 할 것 같다며 급하게 최저가 호텔을 이 잡듯 찾는 언니를 보니 이게 남일이 아니구나 싶었다. 비단 출결에서만 있는 문제가 아니다. 반에서 친구들끼리 '너희 집 몇 평이야?'라는 질문을 어제저녁 뭐 먹었는지 묻는 수준으로 아무렇지 않게 하는 시대이다. 아빠차가 무엇인지도 중요하다. 국산차를 탄다고 하면 모양이 빠진다. 그런데 벤츠를 타도 문제이다. 벤츠 안에서도 급이 나뉘니까. 아빠차만 있어서도 안된다. 엄마도 꽤나 근사한 차를 몰아야 면이 선다. 요즘 초등학생들은 공부뿐만이 아닌 다른 것들에서도 무한 경쟁의 시대를 살고 있는 아이들이다. 소름이 돋을 만큼 모든 것들이 경쟁 안에 있다. 그리고 뒤쳐지는 순간 나락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 세뇌되고 있는 듯하다.


내가 요즘 시대에 초등학교를 다녔으면 개근 찐찌버거가 됐을 판이다. 맞벌이가정에 여행을 갈 여력이 크게 되지는 않은 우리 집에선 개근 찐찌버거를 피할 길이 없었을 것 같다. 이런 걸 생각하면 옛날에 태어난 것에 감사할 뿐이다. 그 시절엔 지금만큼 경쟁이 심하지는 않았으니. 개인적으로 나는 남에게 뒤처진다라는 감각을 이십 대 후반 정도에 접어들어서야 처음 느껴보았다. 출발선이 다르니 본 게임에서 내가 이길 수가 없는 것이 있구나, 여유 있는 집에서 자란 친구들은 이런 것이 다르구나. 매체에서 보았던 남과 나의 '본격적'비교를 그즈음 처음 해본 것 같았다. 그러나 요즘 아이들은 채 10살이 되기도 전에 본격적인 비교를 일삼으면서 자라나고 있다. 아아. 정말 가슴 아픈 문제이다. 이미 이렇게 경쟁사회가 된 것을 어느 누구에게 탓할 수 있겠냐는 말이다.


이런 사회 속에서 어른의 입장으로 어떤 제스처를 취해야 하는 것일까. 경쟁사회 지겹다고 1인 시위라도 해야 하는 걸까? 경쟁은 나쁜 거라고 지나가는 초딩들을 붙잡고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어디서부터 병이 들었는지 모르니 내가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감도 오지 않는다. 이 아이들이 나중에 사회에 나올 즈음엔 정말 많은 것들이 병들어 가겠구나 싶기도 하다. 지금보다 더 깊은 경쟁의 시대는 어떤 모습일까? 별로 알고 싶지가 않다. 세상천지에 이런 말을 만든 미친 사람이 다 있어? 욕이라도 크게 해 본다. 그러나 우리 가족이 개근거지가 되지 않기 위해 오늘도 최저가를 한번 스윽 훑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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