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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 May 20. 2022

샐러드 데이즈

 샐러드 데이즈(salad days).

셰익스피어가 처음 쓴 이 말은 샐러드처럼 생기 있고 푸릇푸릇한 젊은 시절을 말한다. 흔히 풋내기 시절이라고 불리는 미숙하면서 용감한 젊고 어린 날. 나에게도 ‘샐러드 데이즈’라고 이름 지은 친구들이 있다. E와 S. 정확히는 나보다 6살, 7살이 많은 언니들이지만 책으로 만난 사이인 데다 애칭으로 부르다 보니 언니인 것도 나이도 잊게 된다.


E는 가수 요조의 오랜 팬이다. 요조의 노래와 책, 인터뷰뿐만 아니라 짤막한 토막글이 실린 매거진도 찾아 읽을 만큼 찐 팬이다. 좋은 건 자꾸자꾸 알리고 싶기 마련이라 작년에 E에게 요조 작가의 『실패를 사랑하는 직업』을 선물 받아 읽게 되었는데 그 후 요조 작가의 다른 책도 따로 구입해 읽고 온라인 북토크를 신청해 듣기도 하고 제주에 갔을 때 요조 작가가 운영하는 책방무사에 가는 등 나도 덩달아 덕후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됐다. E는 자신의 감정을 글로 잘 풀어내는데 E가 쓰는 글은 명징한 데가 있어서 언제나 찾아 읽게 된다. 작년 여름에는 한 달 동안 매일 주어진 단어로 에세이를 한 편씩 완성해야 하는 컨셉진 에세이 프로젝트를 함께 하며 매일 마감이 있는 삶의 고통을 나누었고 서로의 1호 독자가 되어 주기도 했다. 그리고 또 하나. E와 나 사이에는 필름사진이라는 공통된 오랜 취미가 있다. 필름카메라에 쌓인 먼지를 털어 내고 다시 들게 만든 데는 E의 영향이 크다. 필름카메라를 나란히 어깨에 둘러메고 걸을 친구가 생겼으니까. E와는 ‘요조’, ‘글’, ‘필름사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S는 우아함이 먼저 떠오르는 친구이면서 긍정적인 에너지와 리더십이 느껴지는 친구다. S에게서 느끼는 우아함은 분위기를 말하는데 내가 느낀 우아함을 설명할 수 있는 표현을 얼마 전 책에서 만났다. ‘우아함이란 자신이 처한 입장에서 느긋하고 편안해하는 것임을. 프랑스어는 이것을 ‘bien dans sa peau(피부에서 행복하기)’라고 잘 묘사했다. 편안하고 따뜻하고 감각적인. - 사라 카우프먼, 『우아함의 기술』*조민진, 『내일의 가능성』에서 인용’

 S와 나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생각하니 ‘미술’, ‘B형 남편’, ‘캠핑’으로 모아진다. 미술은 S에게 나희덕 시인의 『예술의 주름들』을 빌려준 후 공감대가 생겼던 일이 먼저인지 페미니즘과 페미니즘 미술사에 관한 책을 자주 읽는 나를 신기하게 여겨 이런저런 질문을 하면서 그에 대한 얘기를 자주 나누어서인지 S에게 도슨트 강의를 공유해 함께 들어서였는지 유난히 미술에 대한 얘기를 S와 나누는 일이 많았다. 한 번은 내가 선물한 책에 대한 출판사 이벤트에 S가 당첨되어 함께 서울에 가 영국 테이트 모던 빛 전시회를 보고 돌아오기도 했다. 지금만큼 가까워지기 전에 책방에서 우연히 만나 단둘이 있게 될 때면 나도 S도 평소보다 더 명랑해질 때가 많았다. 이상하게 목소리가 한 톤 높아지고 별거 아닌 일에도 웃는 일이 많았는데 여전히 자주 웃고 놀랄 만큼 다양한 화제가 오간다. S는 부정적인 이야기를 빠르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전환하는데 탁월함이 있어서 S와 이야기하고 나면 나의 미숙함을 발견하고 반성하게 된다. 좋은 방향으로 바뀌고 싶은 마음을 S에게서 느낀다. S의 리더십은 ‘샐러드 데이즈’가 결성된 일화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몇 주 전 S가 텃밭에서 바질을 처음 수확했다고 오래전 약속한 피크닉을 실행에 옮길 때라고 했다. 어린이날을 이틀 앞둔 날, 대전의 센트럴 파크라고 부르는 은구비공원에 셋이 모였다. 잔디밭에 피크닉 매트와 캠핑 의자를 펴고 서로가 가방에 챙겨 온 물건들을 주섬주섬 꺼내 놓았다. S는 샐러드를 예쁘게 담을 하얀 그릇을, 나는 미니 테이블과 블루투스 스피커를 꺼냈다. E는 크루아상과 커피를 맡았는데 카페에서 테이크아웃하면서 일회용 컵 대신 내몫까지 텀블러에 담아왔다. 친구가 텃밭에서 키운 아직 조그마한 여린 바질 잎은 마트에서 산 다른 채소와 함께 샐러드가 되었다가 E와 내가 가져온 크루아상과 브리치즈, 햄을 만나 샌드위치가 되기도 했다.


그날 공원에는 소풍 나온 중학생들과 어린이집 원생들, 산책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우리 바로 옆에는 아직 ‘아가’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이들이 선생님들의 율동에 맞춰 몸을 흔들기도 하고 선생님이 불어 주시는 비눗방울을 잡기 위해 뛰어다니기도 했다. 그 모습을 어깨너머로 바라보는 순간이 영화처럼 느껴진 날이었다. 어떤 걱정도 불안도 다가올 수 없는 편안하고 가벼운 분위기가 공간을 채웠다. 그날 챙겨 온 두 권의 책 제목이 그날 하루를 설명해주는 것 같기도 했다. 『슬픔이여 안녕』, 『내일의 가능성』. 피크닉 하며 찍은 사진들을 채팅창에 공유하다가 ‘샐러드 데이즈’라는 이름이 생겼다.


 며칠 전 또 한 번 샐러드 데이즈가 모이는 일이 있었다. 줄 게 있으니 내일 오전에 가볍게 차 한잔하자는 S의 연락에 얼마 전 휴대용 다기를 장만해 마땅한 곳이 없으면 지난번처럼 공원에서 만나는 것도 좋다고 말했다. S는 집 근처에 마침 차 마시기 딱 좋은 정자가 있다고 했고 E는 그럼 차에 어울리는 쿠키나 빵을 가져가겠다고 했다. S는 차만 마시면 부족할 수 있으니 카페인과 (E를 위한)디카페인 커피를 내려가겠다고 했다. 김밥을 조금 사 가겠다는 내 말까지 핑퐁처럼 오간 밤이었다. 다음 날 아침 90도로 끓인 물을 텀블러에 담고 휴대용 다기와 티 매트를 챙겨 집을 나섰다. 밤에 갑자기 나온 얘기가 맞나 싶게 정자에 둘러앉아 펼친 다과상은 진수성찬이었다. 텀블러에 끓여 온 물과 커피, 포장 용기를 재활용해 담아 온 샐러드와 용기에 포장해온 빵과 김밥까지. 일회용품을 안 쓰려고 애쓴 흔적들에 나란히 웃었다. 차를 마시기로 한 날이라 평소에 잘 입지 않던 리넨 원피스를 입고 무릎을 꿇고 천천히 차를 따랐다. 찻잔은 보통 사람보다 한 마디는 짧은 내 새끼손가락보다 작았고 친구들의 잔에 찻잎이 들어가지 않게 유리 숙우에 떠 있는 찻잎을 도자기 거름망에 부으려다 숭숭 난 구멍 사이로 물이 줄줄 새 티 매트가 젖는 등 엉망진창인 다도 풍경이었다. 실수마저 재밌고 귀엽게 봐주는 친구들 덕분에 조그만 잔에 담긴 쑥차를 기쁘게 마셨다. 친구가 가져온 샐러드는 텃밭에서 무럭무럭 자라 이제는 마트에서 파는 샐러드 채소를 많이 섞지 않아도 풍성해질 정도가 되었다. 전에는 바질만 친구가 기른 것이었다면 이번엔 애플민트까지 합세하여 상큼한 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분명  것이 있다고   S였는데 마니또라도 하는 것처럼 서로에게  선물을 하나씩 챙겨  것도 귀엽고 정겨웠다. 내가 챙겨  선물은 책과 천연 보리수잎으로 만든  거름망이었는데  거름망은 3개가  세트라서 당연히 E S 생각하며 빼둔 것이었다. E 건넨 선물은 책방무사 멤버십 웰컴 키트로 받은 요조 작가의 『일상 51선』과 무사 패브릭 미스트였다. 『일상 51선』은 덕후의 은덕으로  모두 같은 책을 갖게 되었다. S 나에게는 『모지스 할머니, 평범한 삶의 행복을 그리다』를 E에게 『아무튼, 식물』을 선물했다. 텀블러와 용기에 꽉꽉 채워  마음만큼 빵빵하게 채워진 몸과 마음으로 산에서 내려왔다.


그날을 돌아보면 아무 말 대잔치에 필름카메라를 꺼내 놓고도 단 한 장도 찍지 못한 날이었는데 함께 있는 순간이 참 행복했다. 주고받은 대화들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E가 제주 책방무사에서 공연하게 될 가수의 곡이라며 들려준 노래가 너무 좋았다는 것만은 생생하게 남아 있다. 그날 E가 소개해 준 곡은 가수 장들레의 ‘모르겠어요’였다. 바람에 무심히 흔들리는 나무와 새소리가 들리는 정자에서 가만히 노래를 듣던 순간이 좋아 영상으로도 담았는데 나중에 다시 들으니 노래 가사가 참 좋았다. ‘따듯한 마음이 따듯한 사람이 되고 싶었거든요.’ 내게는 이미 그런 사람인 샐러드 데이즈 친구들.


 셋이 만나면 왜 이렇게 마음이 편안할까 생각하니 ‘비난하는 마음’이 없어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셋 중 솔직함을 무기로 어떤 상황, 어떤 사람에 대한 안 좋은 면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나일 때가 많은데 그런 내 이야기를 오해 없이 가만히 들어주고 좋은 쪽으로 환기해 주는 건 E와 S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최근 관계가 멀어진 이들을 가만히 떠올려 보았다. 예전보다 연락하는 횟수가 줄고 먼저 만나자는 연락도 선뜻 못하게 된 친구가 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친구를 만날 때면 부정적인 이야기를 듣는 일이 많았다. 내가 모르는 사람, 내가 가깝게 여긴 사람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를 듣고 나면 잘 빠져나오지 못하는 성격 탓에 가까워지려던 마음을 접거나 이미 주었던 마음을 조금씩 거두게 되는 일이 많았는데 정작 그 말을 전한 친구는 잘 지내는 것을 보고 마음이 이상해졌던 일이 종종 있었다. 마음의 거리가 멀어진 이들과 즐거웠던 시절을 떠올리다가 한 번 엉킨 실타래를 푸는 건 쉽지 않다는 걸, 때를 놓치면 멀어지는 마음도 있다는 걸 천천히 받아들였다. 그래도 좋아하는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다면 먼저 손을 내미는 따듯한 마음을 가진 따듯한 사람이 되어 보겠다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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