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3회 아카데미시상식 남우주연상 수상자 안토니 홉킨스의 영화, 더파더
영화 '더 파더'. 그리고 안소니 홉킨스. 그의 이름 한 줄만으로도 이 영화를 보러갈 이유는 충분했다. 거기다 집이라는 공간에 인간의 내면을 비유하듯 세련되게 연출한 미장셴까지. 주변인들에게 추천하기에도 모자람이 없는 영화였다.
이 영화 '더파더'는 치매노인의 이야기이다. 스러져가는 기억을 붙잡고 스스로와 싸우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결국에 무력해지는 인간의 서글픔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노년의 주인공 '안소니'는 자신의 딸 '앤'에 대한 기억이 어느 순간부터 헷갈리기 시작한다. 자신이 알던 '앤'이기도 하고 어쩔 땐 자신이 모르던 '앤'이 되어 자신의 눈앞에 나타난다. 딸이 무언가 숨기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기도 한다. 때로는 의심이 가기도 하지만, 애써 모른체 하기로 한다.
그러나 영화 '더파더'는 전적으로 주인공 '안소니'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설령 제 3자의 시점으로 보일지라도 결국에는 '안소니'의 시점으로 해석한 제 3자의 시점인 것을 알 수있다. 그렇기에 기존의 영화 플롯을 따르지 않는다.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고 때로는 낯설기도 한 영화 문법을 극 중 내내 느낄 수 있다. 그러니까, 극의 시간과 공간은 우리가 알던 기존의 순서대로 흐르지 않는다. 뒤죽박죽 엉켜 뭐가 뭔지 결국엔 추측조차 할 수 없는 형태로 극의 서사는 전개된다.
이 지점에서 보는 이로 하여금 '안소니'의 서글픔과 혼란스러움에 이입하게 한다. 이입이라고만 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한 표현일정도로 씁쓸한 슬픔에 잠기게끔 만든다.
자신이 치매에 걸린 노인이기에 매일매일 낯선 사실들이 자신을 괴롭힘에도 안소니는 갈수록 담담해지고 현실에 순응한다. 자신이 알던 '앤'은 분명 남편이 없는데, 어느 순간 사위라는 놈이 자신의 집 한 중간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또 어느 순간에는 내가 아는 '앤'의 얼굴이 아닌 다른 이가 다가와 내게 아버지라 부른다.
안소니는 극 초반 이런 순간을 맞이할 때면 역정을 내고 말도 안되는 상황을 부정한다. 그러나 갈수록 그는 소극적인 태도로 순응하기만 한다. 자신이 틀렸다는 생각을 늘 전제하며 행동하는 듯한 모습은 서글프기 그지 없었다.
극 중반, 이제 안소니는 다른 얼굴을 한 이가 사위나 딸이라고 나타나도 이제는 놀라지 않는다. 아, 내가 또 잘못 생각했구나. 그래그래 맞아. 그렇게 대충 얼버무리곤 누가봐도 낯선 상황을 넘어간다. 이젠 자신의 기억이 믿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었을까. 체념한 노인의 태도는 한없이 서글펐다. 그리고 외로웠다. 중요한 점은 서글프고 외로워 '보이는' 치매노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서글프고 외로운 주인공의 감정이 오롯이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누군가의 시선이나 누군가의 관점을 매개로 필터링되어 보여지는, 타자화된 치매노인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치매에 걸린, 자신의 투병사실을 인지하고, 지는 싸움임을 알면서도 홀로 외롭게 고군분투하는 주인공의 이야기였다. 그래서 보는 이로 하여금 직접적으로 이입하게 하고 혼란스럽게하는 영화였다.
그리고 다시금 기억을 잃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상황인지 체감했다. 단순히 기억을 잃는 것이 아니라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모두 잊어버리는, 그 과정 속에서 자신조차 믿지 못하게 되어버리는 상황이 공포감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그래서일까 이 영화는 약간의 스릴러적인 장르도 가미되어 있는 듯하게 느껴진다. 슬프게도 그 공포감은 현실적인 두려움에서 기인한다. 그래서 더더욱 안소니의 두려움이 스크린 너머로 고스란히 오는 영화였다.
영화가 끝나면 주인공 안소니의 말이 귓가에서 맴돈다.
그는 나에게 남아있는 '낙엽(leaves)들'을 다 잃어버린 것 같다고 했다.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것이 왜 슬픈지. 함축적으로 말해주는 대사이자, 이 영화를 한마디로 설명할 수 있는 대사였다. 올해 오스카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안소니 홉킨스의 영화이기도 한 '더 파더'. 그의 이름이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과 같기에 그 여운이 더 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