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격의 워킹맘, 친정엄마 곁을 떠나다.

맞벌이 부부의 다둥이 육아 자립을 향한 모험여정

by 한가람
와~ 진정한 애국자시네요!

아이들과 산책을 나가면 늘상 한 번씩은 듣는 말이다.

달리 애국할 방도를 몰랐던 우리 부부는 2년 만에 아들 셋을 낳았다.

SNS에는 나보다 더 위대한 엄마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연년생, 쌍둥이, 삼형제맘인 나는 산책길에서 동네 어르신들의 좋아요와 하트를 많이 받는 편이다.


쌍둥이가 24개월이 될 무렵, 더는 미룰 수 없어 복직을 선택했다.

미리 친정엄마 집 근처로 이사해 둔 덕분에 나도, 남편도 큰 걱정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무지'가 그렇게 무서운 것이다.

가보지 않은 길에 대한 '무지', 나는 그 전의 이미 여러 선택이 그러했듯 또다시 운명에 내 모든 것을 걸었다.

그리고 복직 발령 후 3개월이 채 되기 전에 5kg이 빠져나갔다.


4년 만에 다시 찾은 내 자리는 은행의 수신을 담당하는 창구였다.

번호표를 뽑아 30분은 족히 기다려야 내 앞으로 모실 수 있는 손님들이 하루에 200명씩 왔다 갔다.

새로운 업무에 적응하느라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가면,

새끼 너구리들 같은 삼 형제가 나란히 앉아 TV를 보고 있다.

사실, 우리 집엔 TV가 없다. 정확히 말해 아이들이 보고 있던 것은 유튜브 영상이 나오는 컴퓨터 모니터였다.

리모컨을 쥐고 있는 건 항상 첫째.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를 기다리는 시간은 '흐르는 시간'이다.

내가 뭘 하든 흘러보내야 하는 시간.

영상시청은 그 시간의 흐름을 가장 빠르게 넘겨준다.

재미는 덤이다.


"다녀왔습니다."


가장 먼저 반기는 분은 당연히 아이들의 할머니, 할아버지인 나의 부모님이다.

얼른 밥솥을 열어 내 밥상을 차린 뒤, 오늘 아이들에게 새롭게 생긴 상처나

어린이집 선생님이 전한 말들을 일러주는 엄마.

나의 식사가 끝나자마자, 앞치마 풀어놓는 것도 잊고 부랴부랴 짐을 챙겨 현관으로 향하는 우리 엄마.


"네 몸 잘 챙겨. 애들 끄면 다 자게 되어있어~!"


울 엄마의 바람같이 그런 착한 아이들은 다 어디에 사는 걸까.

아침에 눈 뜨면 이미 사라져 버린 엄마와 약 20시간 만에 만난 아이들은, 읽고 싶은 책을 들고 오느라

세 번씩 거실과 침실을 드나든다.


세녀석의 수면의식은 전부 각자이다.

오늘 하루 가장 슬펐던 일 떠올리며 눈물로 베갯잇을 꼭 적셔야 잠드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본인이 잠들 때까지 엄마가 이야기책을 읽고 있어야 하는 녀석이 있고,

엄지 손가락을 빨다 순식간에 잠이 드는 녀석도 있다.

'오늘은 이불에 지도를 몇 번이나 그려놓을까.' 막 기저귀 뗀 둘째를 방수패드로 옮겨 놓고,

아이들 이불을 덮어주면 나도 7시간 정도는 쉴 수 있었다.

유일한 쉬는 시간. 수면.

기저귀 찬 아기 셋이 2시간마다 깨던 날들과 비교하면 너무도 천국 같은 삶이었다.


복직 후 퇴사율이 가장 높다는 첫 해를 무사히 지나갈 무렵의 겨울,

집주인으로부터 매도를 위해 부동산에 집을 내놓았으니 이사를 알아보라는 연락이 왔다.

남편과 나는 당장 내년에 각각 6세, 5세가 되는 아이들과 어디로 가야 하나

수면시간을 아껴가며 부동산 매물지도를 뒤졌다. 여러 기준들을 놓고 팽팽한 대립과 합의를 주고받은 우리는 어느날 불현듯 깨달았다.

이런 처지에 감히 누구도 말은 못 했지만,

'내 아이는 내가 키워야 한다.'는 우리 부부의 공통된 신념을 말이다.


"아빠, 엄마, 우리 이사 가기로 했어요."


아빠는 초등학교 입학하면 매일 차로 아이들을 데려다주시겠다며 나를 달래셨다.

도보 10분 거리에 학교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부모로서 너무 무모하지 않기를 권하셨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에요."


우리 엄마는 아직 일을 하신다. 엄마는 평생을 워킹맘이었다.

서울 사는 많은 아이들이 그랬듯, 나도 학원 뺑뺑이를 돌다 겨우 엄마를 만나 저녁으로 치킨을 먹곤 했던

학창 시절을 보냈다.


출근 전 우리 집에 와서 아이들을 씻기고,

퇴근 후 우리 집 부엌으로 다시 출근하는 엄마는 분명히 버티고 있었다.

딸이 직장을 그만두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엄마 자기 자신에게 달렸던 것이다.

맘 놓고 아프지도 못하는 건 삼 형제의 엄마인 나뿐만이 아니었다.


엄마를 위해서도, 아이들을 위해서도,

태어날 조카들이 받을 할머니, 할아버지의 여유로운 사랑을 위해서도

우리가 떠나는 것이 꼭 옳을 것 같았다.

"그냥, 이제 우리가 키워도 될 것 같아서. 아이들도 많이 컸으니."


이사 갈 집 근처 직장어린이집에도 마침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하며,

그렇게 어느 3월 부모님의 걱정을 뒤로했다.

이렇게 '무지'는 다시 한번 내 인생의 또 다른 용기를 발휘할 기회를 선사했다.




잠자는 아기 고운 볼에 뽀뽀 한 번 하고 빠져나오면 그만이었던 출근길.

내가 양말 세 켤레, 옷 세벌을 침대에 던져 놓으면 남편은 얼른 잡히는 발부터 착착 양말을 신긴다.

잠든 애들을 들쳐업고 치카, 세수를 마쳐 거실에 내놓으면 나는 로션, 빗질.

마지막으로 입에 딸기 한 알씩이라도 넣어 달래며 현관을 나선다.

월요일부터 금요일, 하루도 빠짐없이 셋 중 하나는 무조건 운다.

어린이집까지 10분을 차 안에서 비위 맞추다 지친 나는,


"여보! 나 그냥 지하철역 앞에 내려줘."


등원 중도포기를 선언한다. 씩씩거리며 내린 지하철역 광장에는 벚꽃이 언제 폈는지 흐드러졌다.

눈부신 날이다.

아마도 가까스로 지각을 면하겠지만, 아주 나쁘지는 않았다.

우리 부부 둘 중 하나는 알람소리를 들었고, 아이들은 열이 나거나 아프지 않았고,

다음번에 도착하는 신분당선 열차에 탈 수 있을 확률도 꽤나 높다.


단 몇 분 전, "엄마!" 세 명이서 각자 두 번씩은 불러 이거 해달라, 저게 불편하다 목청 높이던 아들들과의

입씨름을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투닥거리며 오니 금방 왔네.'


좀 모자란 맞벌이 부부의 '내 아이는 내가 키운다.'는 이렇게 현실이 되었다.

'우당탕 쿵쾅'하는 새에 아이들은 일 년만큼 자랐고,

우리들 사이에 어떤 깊은 유대감 외에도 놀라운 팀웍이 자리 잡았다.

'탁하면 척' 이제 서로 눈치도 봐가며 떼를 부리는 아이들.

비록 할머니가 일찍 찾으러 오는 친구들을 전부 보내고 남아, 종이비행기를 스물몇 개나 접는

종일반이지만, 가끔은 한참 재밌었는데 왜 이렇게 일찍 왔냐며 타박하는 아이들이다.


마지막으로,

양가 할머니, 할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들을 하원해 주러 오신다.

달려와 안긴 삼 형제에게, 일주일 동안 못 본 그리움을 잔뜩 담아 반찬도, 간식도 배불리 먹여주신다.

누구도 그들의 사랑을 막을 순 없다. 그날만은 유튜브도 보고, 삼겹살도 굽는다.


제가 잘한 걸까요?
잘하고 싶어요.
잘 해내고 싶어요.

가보지 않은 길 앞에서 어김없이 어린아이가 되는 나는 매번 질문한다.

그리고 어른이기에 끝내는 결정 한다.


부디, 우리 모두 행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