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사리 입국 허가 비자를 받고 싱가포르까지 가서 재입국했지만, 여전히 말레이시아 이민국은 실물 비자를 내주지 않았다. 지금까지 과정 중 단 한 번도 납득할만한 거절 이유가 있었던 적은 없지만, 이번 거절 이유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우리가 말레이시아로 입국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것이다.
엥???? 무슨 증거? 내가 그럼 말레이시아 국경 통과하고 그 앞에서 사진이라도 찍어서 보내야 했단 말인가? 아니 외국인 출입국 기록을 보면 말레이시아에 들어왔는지, 안 들어와 왔는지 충분히 알 수 있을 텐데, 나에게 무슨 입국 증거를 내라는 말인가?
그들이 말하는 증거는, 여권에 찍히는 입국 스탬프였다. 내 여권에는 그 스탬프가 없다는 것이었다. 당연하다. 왜냐면 말레이시아 출입국은 자동심사로 되어 있으니까!
요즘 말레이시아를 포함한 여러 동남아 국가에서는 미리 온라인으로 입국심사신청서를 쓸 수 있고, 한국 국적을 가진 사람은 대면 심사가 아니라 기계를 통한 자동출입국심사를 이용할 수 있다. 내가 싱가포르에서 말레이시아로 다시 들어왔을 때도, 대면 심사 쪽으로 향하니 공항 직원이 억지로 자동심사로 돌려보냈을 정도다. 애초에 스탬프를 받을 수 없는 자동입국 시스템을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내 여권에 입국 스탬프가 없으니 당신이 말레이시아를 입국했다는 걸 믿을 수 없다는 게, 말인가 방귀인가…
당연히 나는 자동출입국심사를 이용해 들어와서 스탬프를 받을 수 없었다고 반론했다. 그러자 말레이시아 이민국의 더 황당한 답변이 돌아왔다. 자기네 나라 국경에는 자동출입국심사 기계가 없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어서 말조차 안 나왔다. 공무원이라는 자가, 그것도 이민국을 담당하고 있는 직원이, 자기네 나라에 자동출입국 시스템이 있는지 없는지도 알지 못하다니… 애초에 나랑 연락하고 있는 이 직원이 과연 말레이시아 사람인 것은 많은지 조차 의심을 하게 하는 발언이었다.
그런 기계가 없다면 대체 나는 여권에 스탬프도 없이 어떻게 이미 말레이시아에 들어왔다는 건지,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대체 무엇과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냥 AI랑 얘기하는 게 이보다는 말이 잘 통할 것이다. 애초에 기본적인 것부터 말이 안 통하는데 도대체 뭘 어디서부터 다시 얘기해야 할지 감이 안 섰다.
나는 결국 이민국과 더 이상의 대화를 포기하고 다시 외국으로 나갔다가 말레이시아로 들어오는 방법을 택했다. 또 다른 1박 2일이지만 이번에는 물가 비싼 싱가포르가 아니라 그나마 가까운 태국 어느 시골 공항으로 비행기표를 끊었다. 물론 다시 말레이시아로 입국할 때 한국인은 자동출입국심사 기계로 보내지겠지만, 직원에게 사정을 얘기하고 대면 심사를 통해 스탬프를 받을 예정이었다. 자기네 나라에 그런 기계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직원인데, 이번에도 여권에 입국 스탬프가 없다면 또 다른 헛소리를 할 게 뻔했다. 결국 또 비행기와 숙소를 예약했다. 이놈의 말 안 통하는 이민국 때문에 얼마나 쓸 때 없는 비용을 쓰고 있는 것인지. 아무리 여행을 좋아하는 나라도, 다른 이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가야 하는 것은 여행이 아니었다.
그렇게 다시 실물 비자를 얻기 위한 두 번째 출입국을 준비하고 있는데, 출국 이틀 전날 이민국에서 메일이 왔다. 우리가 싱가포르에서 자동출입국심사를 통해 입국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엥? 이제 와서? 지난번엔 자기네 국경센터에 그런 거 없다고 바득바득 우길 때는 언제고?
체류자 자격으로 입국한 걸 확인했으니 드디어 거주 비자를 실물로 보내주겠다는 답이 돌아왔을 때, 좋은 것도 좋은 거지만 어안이 벙벙해서 ‘우와’보다는 ‘엥?’이라는 반응이 먼저 나왔다. 확인할 거면 그때 해주던가, 포기하고 태국행 비행기 끊으니 이제 와서 비자 내주겠다는 말을 들으니 허탈함이 좀 몰려왔다. 이렇게 사람 들었다 놨다 쫄깃하게 심신을 끝까지 몰고 갔다가 풀어주는 게 그들의 방식인가 보다.
어쨌든 그토록 원했던 비자 실물을 드디어 받게 되었고, 이걸 받으면 한동안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걱정은 안 해도 되니 정말 한시름 놓게 되었다. 이제 진짜 말레이시아 생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