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집 CG는 잘하네
기대 반, 불안 반으로 표를 예매했습니다. 기대는 원작인 만화 '총몽'을 재밌게 읽었던 기억, 그리고 사이버펑크 장르 자체에 대한 선호 때문이었고 불안은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처럼 알맹이만 쏙 빠진 CG자랑 대잔치이지 않을까라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기대는 오히려 말초신경 쉴 새 없이 두드려대는 눈뽕 충만 CG로 충족되었고, 실망은 공장에서 찍어낸 듯한 성의 없는 할리우드식 서사에서 왔습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스포일러가 되는 부분의 처음과 끝을 빨간 글자로 표시해 놓았으니 원치 않으시는 분들은 넘겨주세요!)
감독의 팬심은 느껴집니다
사이버펑크는 알고 보면 매력적인 장르입니다. 근 미래의 마천루가 빽빽이 들어찬 배경, 사람 같은 AI와 AI 같은 사람이 뒤섞이며 계속해서 등장하는 존재론적 질문들. 영화에서는 '블레이드 러너', 그리고 '트론'을 사이버펑크 장르의 시작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에 영향을 받아 사이버펑크가 꽃피운 곳 중 하나가 일본입니다. '카우보이 비밥', '아키라', '마크로스', '공각기동대'등등 빼어난 수작들이 즐비하죠. 그중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과 제임스 카메론은 '총몽'을 가장 좋아했나 봅니다. 장면 장면 원작에서의 연출을 그대로 가져온 장면들이 자주 보입니다. 덕중의 덕은 양덕이라고 했던가요. 절정에 오른 기술력으로 원작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장면 연출과 업그레이드된 미장센들을 선보입니다. 이처럼 덕심이 넘치는 감독님들, 당연히 영화화를 하기까지 고민이 많았을 겁니다. 원작의 느낌을 그대로 살리고는 싶은데 영화는 두 시간이고 총 9권까지 나온 총몽 1부의 스토리는 너무 방대합니다. 챕터도 4개씩이나 되고요. 결국 최선의 선택을 합니다. 총 3부작으로 알리타를 기획했고 현재 개봉한 영화는 그 첫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2,3부의 제작은 1편의 흥행 여부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욕심이 많아집니다
분명히 영화는 만화책 3권까지의 분량을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후속편의 제작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철저히 만화 초반의 스토리만을 활용하기에는 아쉬움이 컸겠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원작의 자잘한 개연성들이 모두 잘려나갑니다. 최근에 만화방에서 총몽 1부를 정독한 저는 그나마 여기가 잘렸구나 알고 넘어가는 게 가능합니다. 영화로 처음 이 시리즈를 접하신다면 이질감을 느끼실 겁니다. 갑자기 부연 설명 없이 스토리가 전개되고 인물 간의 관계가 형성된다고 할까요.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 역시 어쩔 수 없습니다. 이런 뜬금없는 전개에 기름을 끼얹는 존재가 바로 제니퍼 코넬리가 뒤늦게 합류하여 맡은 오리지널 캐릭터인 '시렌'입니다.
(오리지널 캐릭터가 아니었네요. 잘못된 뇌피셜 사과드립니다ㅠㅠ OVA에 등장한 캐릭터라고 합니다. 제가 유일하게 안 보는 매체가 시리즈 애니메이션이라 전혀 몰랐네요.)
(이 단락은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드라마 시즌 하나는 너끈히 나올 스토리, 2시간으로 압축하느라 당연히 스토리는 엉성합니다. 어떻게든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 OVA에 등장하는 캐릭터인 시렌을 욱여넣는 것 까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드 박사의 전 부인이고 안타깝게 잃어버린 딸이 있었다는 설정 역시 무게감이 생긴 이드 박사의 캐릭터를 잘 받쳐줍니다.
문제는 캐릭터의 근본적인 정체성이 너무 흔들린다는 점입니다. 목적을 위해 뭐든 이용하는 전형적인 냉혈한 캐릭터인 것처럼 등장합니다. 사실 여기서부터 예상이 가긴 해요. 아, 나중에 착해지겠구나. 더구나 제임스 카메론의 시나리오 아닙니까. '에일리언' 때부터 모성의 위대함을 사랑하는 감독인데 당연히 잃은 딸이 있는 시렌 역시 정의의 사도로 변하겠죠.
문제는 그 계기가 너무나도, 너무나아아아도 빈약하다는 점입니다. 영화의 주 악역인 벡터가 범죄 파트너였던 시렌에게 왜 일을 그만두느냐고 묻자 시렌은 '나도 결국엔 엄마인걸'이라는 대답을 합니다. 그러면 최소한 그 계기도 모성애에서 나와야 하는 게 순리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여러 단계로요. 잃어버린 딸을 연상시키는 알리타를 계속해서 만나게 되고 알리타에게서 딸의 모습을 발견하여 잊었던 모성애가 계기가 있어야 개연성이 생기죠.
근데 그런 거 없습니다. 몇 번 마주치지도 않아요 심지어. 한 번은 심지어 머얼찍이 시끄러운 경기장에서 서로 쳐다만 봅니다. 이후에 최종 흑막인 노바 박사의 명령으로 알리타를 추적하던 시렌이 그녀를 발견합니다. 알리타가 배를 관통당해 생명이 꺼져가는 남주 휴고를 붙잡고 슬퍼하는 장면을 목격하죠. 여기에 모성애는 없지 않습니까? 근데 이 장면을 보고 알리타를 찾았냐는 벡터의 질문에 시렌은 아니오라고 대답합니다. 왜죠?? 굳이 굳이 연결점을 찾자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상황이 잃어버린 딸을 연상하게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죠. 근데 이건 억지잖아요! 감독도 찍다 보니 이건 아니다 싶어 허무하게 죽여버리기는 하지만 이 시렌이라는 캐릭터는 거대한 물음표만 남길뿐입니다. 제니퍼 코넬리는 나이가 들어도 이쁘네, 정도밖에 안 남습니다.
(스포일러 끝!)
전형적인, 너무나도 전형적인 스토리라인
원작 이어 붙이느라 생긴 조잡한 이음매,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시렌, 다 그럭저럭 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화, 정확히 말하자면 대감독 제임스 카메론의 각본, 좋게 말하면 정석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지루합니다. 정속 주행하는 청룡열차에 2시간 갇혀있는 기분이랄까요. 물론 처음에 타면 청룡열차 신나고 재밌죠! 90년대에 처음 탔을 때는 말이죠. 이제 어디서 튀어오를지, 어디서 꺾일지 모두 예측 가능한 카메론 표 서사는 힘이 많이 떨어집니다. 아바타 때는 첫 3D 영화의 엄청난 비주얼적 충격으로 기록적인 흥행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2019년이니까요. 영화 좀 봤다 하시는 분들은 저처럼 몇 번이나 몰래 시간을 확인하시게 될 것 같습니다.
이 모든 걸 커버하는 눈뽕 CG
원작보다 일찍 끌어다 쓴 모터볼 시퀀스가 정말 엄청납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겠습니다. 덕중의 덕은 양덕입니다. 원작의 흑백 만화로도 굉장하다 생각했던 연출이 극한의 기술력과 노가다로 아예 새로 창조됩니다. '레디 플레이어 원'의 초반 레이싱 장면에서 느껴졌던 압도감, 자본주의 만세삼창이 절로 나오는 비싼 CG들에 시청각이 호강합니다. 속도감은 속도감대로 살리면서 격렬한 싸움의 합 역시 기가 막히게 맞아 들어갑니다. 걱정되는 부분이 있다면 후속작에서의 액션입니다. 모터볼이라는 에피소드가 사실 원작에서는 2부에 해당하는 내용이기 때문이죠. 이미 소비된 모터볼 시퀀스를 어떻게 더 발전시킬지, 여기서 더 발전시키는 게 가능하긴 할지 의문점이 많지만 우선 이번 편에서는 흠잡을 곳 없이 완벽합니다. 모터볼 씬 외에도 각종 미장센과 소품의 완성도 역시 엄청납니다. 나열하자면 끝도 없지만 와! 싶었던 것들은 이드 박사의 해머, 알리타의 나노 슈트, 사이버펑크 도시의 전경, 자렘과의 통로에서 튀어나오는 회전 톱니 등이 있겠습니다.
그리고 원작의 팬들이 걱정했던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12세 관람가'라는 딱지죠. 잔혹한 표현이 그대로 사용된 원작과 달리 참혹하고 처절한 액션 다 잘린 아동용 영화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저도 했습니다. 한데 영화를 보고 나니 '이게 12세라고?라는 생각이 들 정도입니다. 혈액이나 혈흔이 안 나온다 뿐이지, 할 건 다 합니다. 반으로 갈라지고, 뽑히고, 뽑고, 태우고 베고 입힐 수 있는 상해는 죄다 나옵니다. 다만? 혈액은 안 나오죠. 영화 심의 등급 기준을 교묘하게 이용한 경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런 부분에서는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불쾌한 골짜기, 그리 심하지 않습니다
다들 그러셨겠지만 예고편을 보고 저도 생각했습니다. '눈이 뭐 저리 커?' 혹여라도 영화를 보는 내내 불쾌한 골짜기(인간이 인간이 아닌 존재를 볼 때, 그것이 인간과 더 많이 닮을수록 호감도가 높아지지만 일정 수준에 다다르면 오히려 불쾌감을 느낀다는 이론이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에 시달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는데 생각보다 그리 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보다 보면 사이버펑크 배경, 스카이라인, 눈 돌아가는 액션에 정신 팔려 주인공 눈 크기 따위는 신경도 안 쓰입니다.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원작을 잘 살린 건 아니지만 못 살린 것도 아닙니다. 방대한 원작을 토막 내서 이어 붙이느라 이음매가 조잡할 순 있지만 이를 역대급 CG와 쉴 새 없이 몰아치는 음악이 어떻게든 메워줍니다(사실 음악은 좀 과했습니다). 액션 시퀀스의 쾌감은 역대급입니다. 블록버스터는 스토리고 뭐고 화려한 맛에 본다는 분 강추드립니다. 어떤 영화라도 나는 개연성과 서사의 짜임새가 중요하다는 분 보시면 안 됩니다. 이상 '알리타: 배틀 엔젤'의 리뷰였습니다. 다음에 영화를 보게 된다면, 그리고 글이 쓰고 싶다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