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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gjoon Jun 27. 2019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운명이라는 이름의 싸이코패스


수많은 스포일러가 포함된 글입니다. 영화를 감상하시지 않으셨다면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운명을 극복한다는 문장은 굉장히 친숙하다. 힘든 상황과 역경을 이겨낸 사람들을 빗대어 일상과 미디어에서 사용되는 일종의 상용구에 가깝다. 때문에 이 문장 안에 깃들어있는 모순을 사람들은 쉽게 인지하지 못한다. 운명이라는 단어의 정의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것을 지배하는 초월적인 힘, 또는 그것에 의해 의미 정해진 목숨이나 처지’이다. 이처럼 불가항력인 존재를 극복한다는 모순적인 어구가 자주 사용되는 것은 인간이 느끼는 스스로의 존재와 종에 대한 자부심과 특권의식에서 기인한다. 이와 같은 자만에 대한 회의가 자연스럽게 발생하며, 이는 운명이라는 주제를 다룬 수많은 작품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 왕’은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에서 최초로 시연된 희곡으로 지금까지도 자주 접하게 되는 불멸의 고전이다. 자신에게 내려진 신탁에서 벗어나고자 투쟁하지만 결국에는 운명에 굴복하는 그의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설득력을 지니며, ‘올드보이’에 대한 대중과 평단의 환호가 이를 입증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소재 자체의 파격성 역시 이에 일조하나, 무엇보다도 지금껏 등장한 모든 문화 분야에서 가장 자주 탐구되는 대상 중 하나인 운명이라는 텍스트를 가장 초기에 다뤘다는 점이 작품을 지금까지도 살아있게 하는 동력이다. 힘겹게 투쟁하지만 결국 자신의 운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절망하는 오이디푸스의 모습에서 사람들은 인간의 무력함에 대한 슬픔을 느끼며, 동시에 운명이라는 초월적 힘에 대한 공포감을 느끼게 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운명에 대한 공포와 무력감을 최소한의 요소만을 사용하여 가장 담담하고 소름끼치게 표현한 21세기의 작품이다. 이야기는 세 명의 주연들에 의해, 그리고 안톤 쉬거의 압도적 영향력에 의해 견인된다. 

         

안톤 쉬거 운명     


 르웰린 모스, 안톤 쉬거, 벨 세 명의 인물 중 주인공으로 느껴져야 마땅한 것은 모스로, 그의 도주와 행보를 관객들은 따라가게 된다. 하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는 것은 오로지 안톤 쉬거 뿐이다. 나아가 모스와 벨은 그의 희생양과 사태의 힘없는 관망자로서 쉬거를 강화하는데 기능적으로 사용된다. 


 쉬거의 독보적인 존재감으로 인해 그의 존재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등장했으며 그 중에는 쉬거가 초자연적인 존재라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극 중에서 그가 실제로 미치는 물리적인 상해와 인물들과 나누는 대화, 그리고 짥게나마 모스가 쉬거의 실체를 눈으로 확인하는 모습을 생각해 보면 이는 무리한 해석이다. 다만 그의 초월적 존재로서의 해석이 힘을 얻는 이유는 안톤 쉬거라는 인물이 단순히 싸이코패스 연쇄 살인마라는 설명만으로는 불충분한 비인간적인 속성들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바로 운명의 속성들이다.    

  

운명의 우연성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죽음, 그리고 생존은 오로지 우연성에 기인한다. 극의 초반에 등장하는 고속도로를 달리던 남자는 우연히 보안관의 차를 탄 쉬거를 만나 차를 멈추게 되고, 그로 인해 목숨을 잃는다. 모든 인물들이 마찬가지이다. 모스를 위해 차를 세워준 남자도, 모텔 수영장에 앉아있던 여자도. 심지어는 사태에 큰 영향을 미칠 것 같던 칼슨마저도 우연히 쉬거에서 뒤를 밟혀 허무하게 목숨을 잃는다. 반대로 주유소 가게의 주인은 대놓고 동전 던지기의 확률에 기대어 생존하며, 모텔의 여주인 역시 이유 없이 쉬거에게서 살아남는다. 


 이는 쉬거가 까마귀를 쏘는 장면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상식적으로 폭력과 사격에 단련된 쉬거가 1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목표를 조준하고 쐈을 때 빗나가는 것은 쉽지 않다. 뜬금없이 등장한 까마귀를 쏘는 씬에서 쉬거가 표적을 놓치는 것은, 다르게 말하자면 까마귀가 살아남는 것은 쉬거라는 재앙이 운명적인 속성을 지녔고, 까마귀는 우연히 살아남았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삽입된 장면으로 해석된다. 마치 거대한 지진에서 ‘기적처럼’ 홀로 살아남은 사람처럼 말이다. 쉬거는 마치 인간의 형태를 한 작은 재앙이다. 오로지 하나의 단순한 원칙, 우연성만을 맹목적으로 지키며 목적성 없이 지나가는 길에 마주치는 모든 생명을 앗아간다. 


 우리에게 친숙한 서구적인 사신의 이미지는 전신을 덮는 거대한 천을 둘러메고 거대한 낫을 들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때가 되면 죽을 운명인 사람들을 찾아가 간단하게 낫을 휘둘러 목숨을 빼앗으며, 이는 인간의 어떠한 노력으로도 막을 수 없다. 영화를 볼 수록 드는 생각은 그가 마치 현대적 형태의 사신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해골로 된 얼굴을 숨기는 천 대신 괴상한 단발 머리로 자신을 숨기고, 거대한 낫 대신 산소통을 들고 살인을 기계적으로 반복한다.      


운명의 비논리성     


 영화에 등장하는 연쇄 살인마들은 최소한의 동기를 지니고 있다. 이는 돈이 될 수도, 이상성욕의 충족이 될 수도, 혹은 단순히 살인을 하고 싶기 때문일 수도 있다. 쉬거에게는 그런 살인의 이유가 없다. 최소한의 인과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극의 후반 모스가 살해당한 모텔 근처의 레스토랑에서 늙은 보안관이 벨에게 “이런 사건들은 모두 돈이나 마약 때문이죠”라고 했을 때 벨이 보인 회의적인 표정은 쉬거에게는 살인의 이유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도구가 바로 200만 달러이다. 영화의 초반에 쉬거를 아직 인간적인 존재로 인식하는 단계에서의 관객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목적이 훔쳐간 돈을 되찾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 때, 200만 달러의 존재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감정 없이 진행되는 수많은 살인 행각들에 '돈'이라는 목적성이 전혀 깃들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계적으로, 의무를 수행하듯 목숨을 앗아가는 쉬거를 보며 누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쉬거는 무엇을 위해서 죽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살육이 당연한 것처럼 숨쉬듯이 생명을 앗아가는 존재라고 말이다. 


 인간에게 이유가 없다는 것, 즉 인과관계의 공백은 불안함을 느끼게 하는 요소이다. 다가올 미래에 대한 최소한의 예상조차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쉬거에 대한 공포는 예상 가능한 멕시코 갱들의 살육이나 심지어는 모스의 죽음이 아닌, 쉬거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는 주요소 가게와 트레일러 파크에서 극도로 강화된다. 


 특히 주유소에서의 대화는 아직 쉬거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정립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그 긴장감이 극에 달한다. 영리하게도 감독은 영화에 통틀어서 두 번 나오는 음향 효과중 한 번을 이 씬에 할애하며 일반적 스릴러 영화에서 느낄 수 없었던 답답한 공포를 느끼게 한다. 그렇게 유례없이 긴 대화를 한 후 쉬거는 지나가듯이 영화의 핵심 주제인 우연과 운명에 대해 말한다. 행운의 동전을 주머니에 넣어버리면 보통 동전들이랑 다를 바가 없어진다고, 하긴 실제로 그게 사실이라고 말이다. 생사를 가르는 행운이나 운명이라는 것은 거창하고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다. 아주 사소한 차이에 인간의 운명은 좌우되는 것이다. 모스를 태운 트럭 운전사가 허무하게 죽은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인간은 그 운명에 불가항력이다.   

   

운명의 객관성      


 스릴러 영화의 단골 소재인 싸이코패스는 왜 공포스러운 존재인가? 그들은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하고, 살인을 행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주관이나 감정에 따라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 아닌, 객관적이고도 침착한 살인이다. 하지만 영화의 역동성을 위해 최후의 순간이나 극이 절정에 달했을 때 그들의 격정적인 모습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쉬거에게는 그 최소한의 여지마저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살인마가 아닌 운명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운명은 그 누구에게나 공정하고, 어느 상황에서나 객관적이다. 


 영화 전반을 통틀어 가장 쉬거에게 공격적인 태도를 보인 것은 트레일러 파크의 여주인이다. 그에게 희생당하는 수많은 인물들이 속절없이 사라져가는 것과 달리 그녀는 쉬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그의 요구를 거절했고, 심지어는 그의 반복된 질문에 화를 내기까지 했다. 당연히 쉬거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할 줄 알았던 그녀를 쉬거가 그대로 놔두고 문을 돌아서 나갈 때 관객들은 의아함을 느끼게 된다. 아직 그를 인간적인 존재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쉬거와 운명은 객관적이다. 그 사람이 처한 상황에 하등 관계없이 그 사람이 우연에 의해 죽을 운명인지 살아남을 운명인지 정해진 대로 행할 뿐이다. 


 심지어는 쉬거라는 인물 자신에게도 우연은 객관적으로 다가온다. 모스의 아내를 역시 동전 던지기와 우연에 의해 살해한 후 그는 차를 타고 마을을 떠난다. 화면에는 그가 두 번이나 청신호를 확인하고 천천히 주행하는 장면이 나타난다. 공간적 배경은 한적하기 짝이 없는 미국의 주택가이며 통상적으로 서행이 상식인 평안한 마을이다. 그러나 별안간 쉬거의 차는 옆에서 들이받은 차에 의해 반파되고 그의 팔은 부러진다. 사고가 발생하는 장면 직전에 과속하는 차의 소리라던가 쉬거가 사고 차량 쪽을 확인하는 모습, 무엇보다도 달려오는 차량의 경적 소리도 일체 존재하지 않는다. 팔이 부러진 쉬거는 어떤 감정적 동요도 없이 차에서 내린다. 사고 차량의 운전자를 확인하지도 않는다. 묵묵히 소년의 셔츠를 사서 부목을 만들고 터덜터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던 길을 갈 뿐이다. 


 운명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객관적이다. 운명 그 자체인 쉬거가 자신에게 닥친 운명에 대해 화를 내거나 반응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운명이 어떠한 징조도 없이 닥치며 그 누구에게도 예외는 없다는 것을 쉬거의 고요한 교통사고를 통해 감독은 말하고자 한다.


르웰린 모스 맞서는 인간      


 모스는 강하고 억척스런 인물이다. 베트남전의 저격수 출신으로 대학살이 벌어진 들판을 태연하게 거닐며 죽음 자체에 친숙한 인물이다. 실제로 그는 쉬거와의 싸움에서 자동차 사고를 가장하는 기지를 발휘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 중 의도적으로 그에게 상해를 입히는 유일한 인물이다.      


직감과 우연에 따르는 인간의 위력     


 여기서 다시 한 번 칼슨에 대해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그는 전문적인 킬러로 쉬거를 상대로 조직이 고용할 정도로 실력있는 킬러로 보인다. 병원에 있던 모스를 금방 찾아올 정도로 추적 능력도 탁월하며 그를 상대로 협상을 거는 모습을 보면 배짱도 두둑하다. 이처럼 개인의 능력으로 보면 모스를 상회할 수도 있는 그는 너무나도 간단히 쉬거에게 살해당한다. 


 모스와 칼슨의 차이는 인과를 따르는가, 직감과 우연성에 기대는가에서 발생한다. 칼슨은 정보를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어떻게 쉬거를 추적할 것인지를 계획한다. 반면 모스는 자신의 본능과 느낌에 충실하다. 갱스터들의 총격전이 벌어진 현장에서 200만 달러를 발견했을 때 돈을 챙겨오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은 아닐 것이다. 후에 죄책감에 물을 주러 다시 방문한 살육 현장에서도 언덕 너머에 자동차들이 등장한 것만으로도 위기를 직감하고 빠르게 도망쳐 결국 수많은 갱들에게서 살아남는다. 모스와 대결할 때 역시 마찬가지이다. 뭔가를 직감한 듯 자신이 빌린 방의 옆 방이 아닌 건너편 방에 숨어 있던 그는 결국 쉬거의 첫 번째 추격으로부터 도망칠 뿐 아니라 돈가방 역시 무사히 챙기는 데 성공한다. 두 번째 모텔에서의 대결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에게 돈뭉치를 뒤져 추적장치를 발견하게 하고 샷건을 들고 쉬거의 공격에 대비하게 한 것은 생각이나 인과 관계가 아닌 그의 직감이다. 무차별적으로 찾아오는 죽음이라는 운명에 본능과 우연으로 맞선 결과 그는 영화의 중간까지 훌륭하게 생존하며 오히려 쉬거를 위협한다.   

   

운명 앞에 나약한 인간     


 하지만 결국 모스는 조용하고 허무한 죽음을 맞이한다. 뛰어난 능력과 담대함을 보이던 모스는 살해당하는 장면조차 나오지 않은 채 모텔에서 쓰러진 채 발견된다. 표면상의 주인공인 그가 보인 반항과 투쟁의 흔적은 오직 모텔 바닥에 놓여 있는 산탄총 탄피 두 개 뿐이다. 이 장면에선 두 가지의 해석이 가능한데, 그 중 첫번째가 쉬거를 기다리던 모스가 현장에 우연히 들이닥친 갱단에 의해 살해되었다는 점이다. 낡은 자동차를 이끌고 모텔에 다다를 때 벨은 급히 도로에 나오는 차 한대와 그 차에 달려서 올라타는 몇 명의 갱을 보게 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갱들이 달리는 차에 올려탈 정도로 급박해 보이며 차 역시 타이어 굉음을 내며 도망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범행을 저지른 후 현장에서 급히 도망치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극의 배경은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이다. 살인과 범죄가 특이한 것이 아니며 일상에 스며든 곳이다. 이는 앞서 짧게 등장한 장면에서 벨이 시체를 운반하는 차량을 발견하고도 적재를 똑바로 하라고 지적하며 어떤 추궁이나 법적 절차 없이 지나가는 모습을 통해 확연히 드러난다. 더구나 갱단이라는 존재는 이 무법의 땅에서 무력으로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군림하는 조직이다. 이들이 시비에 휘말려 사람을 한 명 죽였다고 해서 기겁하며 도망치는 것은 오히려 이상하다. 그들의 모습은 오히려 재난  영화에서 불가항력의 자연 재해로부터 황급히 도망치는 모습과 닮아있다. 

 그들은 안톤 쉬거라는 재앙을 만난 것이다. 모스를 죽이러 간 쉬거는 능숙하게 그 목적을 완수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우연히 지나치는 풀장의 여성 역시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다. 모스를 죽인 쉬거는 자연스럽게 옆에 있는 생명들인 갱들에게로 눈길을 돌렸고, 자신들이 마주친 재앙에 본능적 위협을 느낀 그들은 황급히 도주함으로써 자신들의 생명을 지키고자 한다. 


 그리고 벨은 죽어 있는 모스를 발견한다. 그의 허망한 죽음을 고요히 보여주는 씬은 극적이고 잔인한 결투 장면보다 더 강하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아무리 인간이 저항한들 운명이라는 것은 막을 수 없음을 말한다. 그렇게 운명에 맞선 모스는 조용히 극에서 사라진다. 


벨 무력한 관찰자     


 베테랑 보안관인 벨은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사건을 예측하며 최대한 모스와 그의 아내를 도우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벨이 실질적으로 사태에 미친 영향은 전혀 없다. 영화의 끝까지 쉬거나 벨이 남기고 간 흔적을 조사할 뿐 앞서서 극이 흘러가는 방향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결국에 그는 이미 운명이 닥친 후 죽어 있는 모스의 시체를 수습할 뿐이다. 현역의 보안관일지는 몰라도, 어디까지나 그는 노인이기 때문이다.      


쉬거로부터 우연히 살아남는 노인     


 영화의 후반부 벨이 모스가 살해당한 모텔 방에 밤에 다시 찾아가는 장면 역시 마찬가지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이 장면 역시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한다. 하나는 쉬거가 총을 쥐고 숨어있는 모습이 그저 벨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벨이 열고 들어간 문의 뒤, 즉 쉬거가 숨어있어야 할 공간은 비었으며 사람이 숨을 만한 공간이 없다. 하지만 집을 수색하던 벨이 들어간 화장실에선 창틀에 포커스가 잡히고 창틀에는 물기가 어려 있다. 텍사스는 습기가 낮은 도시로 자연스럽게 온도 차이로 인해 창틀에 습기가 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건이 발생한 낮에 화장실을 사용한 흔적이 남아있다는 가능성은 벨이 모텔에 들어가는 밤시간까지의 최소한 6시간 이상이 지났음을 고려해볼 때 불가능하다. 실제로 벨이 들어가기 직전, 혹은 조금 전에 누군가가 방문한 것이다. 불이 꺼지고 폴리스 라인이 설치된 살인 사건 현장에 다시 방문할 인물은 쉬거밖에 없다. 


 주목할 점은 모텔이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쉬거가 취했던 행동이다. 목표물이라고 생각했던 멕시코 갱단을 처리할 때 쉬거는 타겟이 머무르는 옆 방을 빌렸다. 그리고는 조용히 문을 열고 나와 산소 탱크를 끌고 천천히 산소통으로 방문을 열고 목숨을 빼앗았다. 모스가 머물던 방의 문 역시 동일한 방법으로 처리되어 있었으며, 그의 시신 역시 문의 바로 뒤쪽에 뉘여 있었다. 모스는 쉬거에게 갱들과 동일한 방법으로 살해당했으며 쉬거는 일을 처리한 후 옆방에 머무르고 있었거나 경찰이 물러날 때 까지 기다린 후 방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피 묻은 양말을 벗거나 하면서 말이다. 밤이 되자 그는 돈을 챙기고 화장실에 들러 핏자국을 지우거나 먼지를 씻어내려는 용도로 수도를 사용했을 것이다. 그러던 와중 그는 차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거나 직감적으로 누군가 찾아오고 있음을 알게 되고 모스의 방을 벗어나 자신의 방에서 무기를 준비한 채 방문객을 기다린다. 따라서 방 안의 시점에서 열쇠 구멍을 통해 밖을 바라보는 씬과 벨이 밖에서 방문을 보는 씬이 교차될 때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는 교차된다.


 만약 벨이 조금 더 일찍 모텔에 도착하거나 모스의 방을 수색한 후 옆의 방문을 열었다면 그 역시 살해당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운명은 퇴역한 후 집에서 여생을 보내는 것이었고, 따라서 모스는 그를 살해하지 않는다. 우연에 의해 그 역시 살아남은 것이다. 수색을 마친 노인은 힘없이 침대에 앉아 숨을 고른다. 백전노장인 그가 단순히 살해 현장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긴장할 이유는 없다. 벨은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존재가 저항할 수 없는 존재이며 다시 모텔을 찾아가는 행위로 인해 자신의 목숨을 빼앗길 뻔 했다는 사실을 노인의 지혜를 통해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직후에 만난 늙은 보안관 역시 그에게 말한다. “그런 놈을 누가 상대하겠어요?”


현명한 노인들의 무력함      


 영화에는 큰 비중은 없지만 많은 노인들이 등장한다. 벨과 그의 아내, 처음에 모스를 태워주며 그에게 충고하는 노인, 부츠 가게의 주인, 벨이 만난 늙은 동료 보안관, 그리고 벨의 무력함을 확인해주는 맥 삼촌이 그들이다. 그들은 친절하고 지혜롭다. 이유 없이 타인에게 이빨을 드러내지 않으며, 낯선 이들에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충고를 한다. 하지만 그들은 늙고 약하다. 현실에 어떠한 변화도 줄 수 없다. 운명의 파괴력과 무서움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들이지만 노인들은 벨의 신문에서 읽히는 것처럼 의미 없이 희생되기만 한다. 


 자신의 능력과 존재에 회의를 느낀 벨은 역시 은퇴한 보안관은 맥 삼촌을 찾아간다. 벨과 마주한지 얼마 안 되어 그는 벨이 무슨 고민을 하고 있는지를 쉽게 알아낸다. 그는 벨보다 더 오랜 시간 노인이었으며, 동일한 보안관이었고, 같은 무력함을 느꼈을 것이다. 때문에 그는 벨을 위한 최선의 조언을 한다. “무엇이 올지는 알 수 없고 막는 것은 불가능해. 그건 널 가만히 기다려주지 않아. 그런 생각은 자만심이야.” 아마 벨도 알고 있을 현실 그대로를 알려 주는 것이다. 인간은 운명에 거스를 수 없다고. 


 맥과의 대화를 마친 후 벨은 은퇴한다. 마지막 씬에서 그는 극의 시작과 마찬가지로 담담한 독백을 통해 영화를 마무리짓는다. 그는 꿈에서 두 번 아버지를 만난다. 처음에 아버지는 그에게 돈을 주셨지만 벨은 돈을 잃어버렸다. 다음에 만난 아버지는 담요를 두른 채 머리를 숙이고 그를 앞질러 간다. 벨은 생각한다. 아버지께서 나를 먼저 앞질러 가셔서 나를 맞아 주시겠구나. 그러다 그는 허무한 착각과 공상에서 깨어난다.  

    



 운명은 언제나 인간을 앞질러 나간다고 감독은 말한다. 같은 운명이 인간에게 힘과 능력을 주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운명 앞에 인간의 능력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다. 운명이 자신을 빗겨나가 삶을 지속한다고 해도 모든 인간은 죽음이라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운명은 항상 인간을 초월해서 기다리다가 때가 되면 생명을 앗아간다. 아무런 감정도 없이, 오로지 우연과 운명에 적힌 그대로 행한다. 이제 코앞에 그 운명을 맞이한 노인들은 무력하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그들을 위한 장소도, 공간도 없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위한 남아있는 시간은 없다. 시간은 무기력하게 운명을 기다리는 그들을 무심하게 스쳐 지나갈 뿐이다. 마지막 씬의 화면이 꺼지고 한동안 들리는 초침 소리처럼 무심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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