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이 대화를 시작하며
여러분이 기차에 타고 있습니다. 여행을 떠날 생각에 들뜬마음을 안고 좌석에 앉는 순간 출발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나옵니다. 이윽고 부드럽게 열차가 움직이는 순간 우리는 생각합니다. 이제 정말 출발하는구나, 하며 설렘을 느끼죠.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어떨까요? 비슷한 장면이 창 밖으로 끊임없이 지나가고 같은 공간에 머무르면서 설렘은 사라지고 무료함이 찾아옵니다. 계속 가만히 있으려니 좀이 쑤시죠. 가만히 있기는커녕 분명히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움직이고 있는데도 말이에요.
마찬가지로 하루하루 살아내기 바쁜 우리들은 지나가는 시간에 무감합니다. 매일, 매주 반복하는 루틴에서 발생하는 일상성이 속도감을 마비시키죠. 올해 초 제야의 종소리를 들을 때만 해도 분명히 설렘에 가득 차 있었는데도 말이에요.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일을 하고, 맨날 먹던 그 음식을 먹고, 익숙한 집으로 돌아가 익숙한 자기 시간을 보내다 같은 시간에 잠이 듭니다. 그래서 첫눈이 내릴 때쯤 되면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하죠. '뭐 했다고 벌써 연말이야?' 이어서 생각합니다. '올해도 뭐 이룬 거 없이 지나가는구나...'
제가 본격적으로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습니다. 2012년의 마지막 날, 어딘가의 순댓국집에서 하지도 못하는 술을 들이켜던 중 친구 한 명이 건배를 제안하며 소리쳤습니다. "십 년 있다가도 똑같이 이지랄하면서 놀자!" 하고요. 왁자하게 소리 지르며 술을 들이켠 뒤 멍하니 생각했습니다. 십 년 후에 나는 올해 있었던 일, 내가 했던 생각을 얼마나 간직하고 있을까? 해서 10년 전의 저를 기억해보려고 했습니다. 얼굴이 벌게진 사람들로 가득 찬 지하철을 거쳐 집까지 걸어오는 길, 열심히 생각해봤지만 생각난 거라고는 10년 전인지, 9년 혹은 11년 전인지도 모를 사소한 장면들과 편린들 뿐이었습니다. 2002년 월드컵, 이탈리아전에서 우리나라가 지고 있을 때 앞으로 스파게티를 안 먹을 거라고 외치던 장면, 학원 선생님이 무서워 골똘히 땡땡이를 계획하던 모습 따위요. 집에 도착한 후 별 건 없지만 일기를 처음 써봤습니다. 그 날 만난 친구들, 먹었던 음식, 들었던 음악 정도를 적고 나니 쓸 말이 딱히 없었습니다. 그래도 처음으로 형태를 갖춘 기록을 남겼다는 생각에 뭔가 뿌듯함을 느꼈습니다. 일기를 썼다는 사실에 대한 약간의 민망함을 덮을 정도로요. 하지만 덕분에 2022년의 12월 31일에는 10년 전의 나를 선명하게 만날 수 있겠죠.
오늘도 조금 있으면 지나갑니다. 저는 이렇게 2019년 1월 24일에 대한 기록을 기록했습니다. 내년, 혹은 몇십 년 후의 제가 다시 찾아올 수 있는 이정표를 남겼습니다. 이로써 언젠가 잠시 돌아올 수 있겠죠. 잠깐이나마 멈춰 서서 감상에 잠긴 후 다시 돌아가는 길에 그동안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계속해서 걸어가느라 흘린 것들을 주섬주섬 담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오늘 먹은 점심은 바지락 칼국수와 묵은지였고, 지금 듣고 있는 노래는 윤종신 님의 '고요'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tjlim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