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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ngjoon Aug 06. 2019

'농후한 맛', 장어구이



 격자무늬 석쇠 위에서 반으로 잘린 장어가 통으로 두 마리 지글지글 익고 있습니다. 왼쪽은 아직은 뽀얀 소금구이, 오른쪽은 때깔부터 강렬한 한국식 양념구이. 명백히 대비되는 색채감이 반반 치킨 같기도, 훠궈 같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식욕 휘어잡는 비주얼입니다. 조바심에 자꾸 애꿎은 젓가락을 톡톡 쳐서 바로잡으며 이모님의 장어 커팅식을 기다릴 뿐입니다. 마침내 곡도같이 휘어있는 식당 가위로 장어들이 한입 크기로 잘라지고, 두어 번 뽀얀 색이 황금빛으로 물들 때면 OK사인이 떨어집니다. ‘이제 드셔도 돼요~’. 총성을 기다리던 경주마들처럼 젓가락들이 불판 위로 날아듭니다. 아무런 합의도 하지 않았지만 모두 소금구이를 먼저 집습니다. 데리야끼 양념, 생강채 등 각자의 바리에이션은 다양하지만 저는 아무것도 찍지 않고 첫 입을 먹습니다. 탱글한 살이 입 안에서 흩어집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묘한 민물장어의 향은 ‘장어 맛’이라는 단어 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몇 번 맛을 즐길 새도 없이 풍부한 기름을 타고 쑥 뱃속으로 사라집니다. 처음 먹어보는 사람이 눈을 감고 먹으면 생선이라고 생각하기 힘들 정도의 농후한 맛. 참으로 야한 맛입니다.      


 다음으로 양념구이를 집어 한 입. 일부 장어 매니아들은 오로지 소금구이만을 추구하며 양념구이를 배척하고 멸시하지만, 오늘의 멤버들은 소금구이고 양념이고 없어서 못 먹는 아가페적 입맛을 지닌 이들만이 모였습니다. 양념이 불에 아주 살짝 그슬린, 통통한 몸통 쪽을 집어 한 입. 소금구이가 오로지 장어 고유의 감칠맛에 집중한다면 양념은 고추장 베이스의 매콤함과 들찌근한 단맛으로 균형을 잡아줍니다. 슬쩍 스쳐 지나가는 불맛으로 시작해 양념의 강렬한 맛이 찾아오고 이내 장어 맛과 기름진 맛이 뒤섞입니다. 다채로운, 즐거운 맛입니다. 물 한 모금으로 입안을 정리하고 다시 소금구이. 이번에는 데리야끼 소스에 살짝 찍어 먹습니다. 강렬한 시판 소스의 맛이 익숙하고 식상하지만 또 정겹습니다. 한국식 장어구이 집에 와서 일본식 장어구이의 맛을 비슷하게나마 느낄 수 있는 것도 감지덕지입니다. 다음으로 양념구이 위에 생강채를 두 점 올려 한 입. 소금구이에 간장을 찍어 상추쌈으로 한 입. 추가한 공깃밥 위에 양념구이를 얹어 스팸 광고처럼 한 입. 양이 적은 저지만 장어구이를 먹을 때면 언제나 무리를 하게 됩니다. 장어 같은 맛은 장어밖에 없으니까요. 기회가 될 때 양껏 먹어두지 않으면 언제고 이 야한 맛이 그리워져 두 피스짜리 초밥이라도 먹기 위해 서울을 떠돌지도 모릅니다.      


 후식 면요리는 쳐다보기도 싫을 정도로 만복이 되었습니다. 일행들이 모두 비스듬히 의자에 기대어 배 위에 손을 얹고 가쁜 숨을 내쉴 때쯤 입구 쪽으로 향합니다. 이유는 당연히 무료 후식 커피입니다. 서울의 규모가 큰 노포 아니면 지방 음식점에서밖에 찾아볼 수 없는 이 다방 커피 머신은 정겹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 같습니다. 굉음을 내며 뽑아져 나온 커피들을 자리로 가지고 돌아옵니다. 평소에 ‘얼어 죽어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외치던 냉커피 매니아도, 핸드드립 커피만 찾아먹는 커피 덕후도 아무런 불평 없이 설탕 듬뿍, 프림 왕창 들어간 다방 커피를 들이켭니다. 말도 없이 홀짝대는 소리만 들립니다. 사방에서 말소리와 식기 부딪히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오고 장어구이 냄새와 연기로 가득 찬 정신없는 식당에서도 이렇게 여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여유는 가득 찬 배에서 나오기 마련이니까요.      


 이 장어 모임의 끝은 언제나 같습니다. 다다음 달의 장어데이를 정하는 것이죠. 이런 농후한 맛을 즐기기에 매달은 너무 잦고, 분기마다 한 번은 아쉬우니까요. 기름기와 자극으로 가득 찬 행복한 점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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