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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파네마 Feb 04. 2023

#9 다시 찾아온 유럽, 파리에서의 마지막 밤

1월 27일 금요일. Le dernier jour à Paris


28일 아침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는 나는 제대로 된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로 단 하루를 남겨두게 되었다. 스위스에서의 기간을 포함하더라도 지난 일주일은 예상한 것처럼 순식간에 눈 깜빡할 사이 지나가버렸다.


새벽 6시 40분에 눈이 떠졌다. 눈 뜨자마자 머리에 스친 생각은 파리에서 아직 한 번도 일출이나 일몰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일찍 채비를 해서 해 뜨는 에펠탑을 보고 저녁 무렵 해 지는 센 강을 본다면 그리웠던 파리의 풍경을 적어도 한 번씩은  본 셈이 될 것 같았다.


일출 시각인 8시 28분까지 샤요궁에 도착하기로 목표를 잡았더니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어깨에 둘러맨 가방을 한쪽 팔로 꽉 잡고 메트로까지 마구 달렸다. 간당간당하게 세이프. 환승 구간에서도 간신히 바로 열차를 받아 탔다. 에펠탑을 탁 트인 샤요궁 광장에서 볼 수 있는 Trocadéro 역에 도착하니 시간은 8시 26분이었다.


어두웠던 하늘이 차츰 개면서 푸른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날이 여전히 흐린 탓에 떠오르는 태양은 볼 수 없었지만 하늘빛의 변화로 해가 떠오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트로카데오 광장에는 관광객이 북적대는 저녁시간과 달리 몇 마리의 비둘기들 외에는 사람을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광장에서 쭉 이어진 샤요궁으로 나와 에펠탑을 가만히 바라봤다. 프랑스에 처음 온 여행객이었던 나를 파리에 퐁당 빠지게 만들었던 일등공신 에펠탑. 대체로 유명한 관광 명소들은 기대만 못해 실망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지만 에펠탑만큼은 달랐다. 사진이나 영상으로 접했던 것만 수백 번은 됐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보았더니 상상 이상으로 나를 압도하는 멋진 구석이 있었다. 밤이 되어 금빛으로 빛날 때도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지만 이렇게 본연의 철탑으로 있는 낮 시간의 에펠탑도 본연의 위엄이 있었다. 우직하게 서있는 그 모습이 건축물이 아닌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파리에서 본격적으로 살아보겠다고 짐 싸들고 찾아왔을 때는 나중엔 길을 걷다 보기만 해도 화가 치밀어 “대체 나를 왜 여기까지 데려온 거니?”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가도 어느 날엔 또 건물 사이로 빼꼼 드러난 모습을 보며 “그래. 역시 오길 잘했어” 싶게 만들어줬던 에펠탑.


이어폰을 귀에 꽂아두고 노래를 들으며 에펠탑을 향해 걸어갔다. 코앞 지점에 도착해서는 저 위에 있는 탑의 꼭대기를 향해 목이 꺾일 듯 고개를 치켜들어 올렸다. 저녁쯤 한번 더 보러 와야지. 한참을 더 머무르다 자리를 떴다.


아침 일찍부터 나와 뽈뽈거리며 돌아다니다 보니 배가 꽤 출출했다. 이번 여행에서 파리에 도착한 첫날 추억의 무화과빵을 먹으러 찾아갔다가 다 떨어져서 참깨 빵으로 대체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다시 한번 도전해 볼까. 같은 파티서리의 다른 지점에 찾아가 보기로 했다. 빵집까지 걸어가는 길에는 해가 점점 더 떠올라 파리의 아침을 열어주었다.


미리 전화를 걸어보지 않고 무작정 일단 찾아왔는데, 빵 집에 들어오니 내가 좋아하던 무화과 빵이 항상 먹던 작은 사이즈는 없어도 큰 사이즈로 남아있었다. 이제 갓 구워져 따끈따끈하기까지 했다. 큰 덩어리를 두 조각으로 잘라달라고 부탁한 뒤 빵을 받아 들었다.


그 순간 빵 냄새를 맡자마자 추억이 확 떠올랐다. 사람의 기억에 더 깊게 관여하는 것은 시각이 아닌 후각이라는 말은 정말이지 사실인 듯싶었다. 그 고소하고 달큰한 향기가 나를 특정 시점으로 옮겨놔 주었다.


빵을 들고 파티서리 바로 옆 카페에 갔다. 옆집에서 사 온 빵과 같이 먹어도 되는지 물어보자 “Bien sûr(물론이지)"라는 답변을 들었다. 주문한 카푸치노 한 잔과 함께 빵을 천천히 뜯어먹으며 오전 산책의 노곤함을 녹여냈다.


파리에 와서부터는 첫째 날도 둘째 날도 사람들을 만났지만 오늘만큼은 온전한 나만의 하루를 보내고 싶었다. 그저 혼자서 곳곳을 걷고 보고 느끼고 되새기고 싶었다. 카페에서 나와 다음으로 향한 곳은 센 강변에 있는 노트르담 대성당이었다.


첫 번째 파리 여행, 2018년 1월에 나는 노트르담 성당 안에 들어가 그 웅장함에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왠지 모르게 신성해지기까지 하는 느낌이라 가톨릭신자가 아님에도 성당의 구석 의자에 앉아 기도를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파리 어학연수를 한 달 앞둔 2019년 4월 기사를 통해 그토록 웅장하고 멋진 노트르담 성당이 화재로 인해 불타버렸다는 소식을 접했다. 영상 속 파리 시민들은 속수무책으로 불타고 있는 노트르담 앞에 서서 입을 두 손으로 막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 달 뒤인 그해 5월에 파리에 도착해서 11월까지 머무르는 동안에는 내내 노트르담의 재건 공사가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철근이 엉기성기 얽혀있는 모습이 마음을 괜시리 아프게 했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2023년 1월에 찾아온 나. 하지만 여전히 노트르담 대성당은 아직 이전의 모습을 완전히 되찾지는 못한 상태였다. 여전히 공사가 진행 중인 성당 앞에 서서 건물을 바라보다가, 문득 노트르담이 마치 파리에 대한 내 마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도 황홀하고 아름다웠지만 불타버린 뒤 상처만 군데군데 남았고, 그 후 다시 회복 중에 있지만 아직은 다 치유되지 않은 노트르담.


이다음에 한번 더 파리에 찾아왔을 때쯤에는 완전해진 노트르담의 모습을 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트르담도 내 마음도 본연의 빛나는 모습을 찾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노트르담 앞을 흐르는 센 강변을 따라 걸었다. 파리에서 살던 동안에 가장 부러웠던 건 강 주변에 삼삼오오 둘러앉아 피크닉을 즐기던 파리지엥들이었는데 여전히 이곳에서 나는 혼자였지만 이 정도 쓸쓸함은 오히려 즐길만한 것이었다.


강가에 줄지어있는 헌책방에는 책과 그림이 가득 늘어서있었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가 떠오르는 풍경.


문득 지나가던 상점 유리에 비친 내 모습이 다소 심심하게 느껴져, 가방에 있던 베레모를 꺼냈다. 갤러리라파예트 백화점에서 산 검은색 빵모자. 베레모 하나를 머리에 얹었더니 조금은 파리지엔 느낌이 나는 것 같아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부탁해 센 강을 배경으로 사진도 여러 장 찍었다. 사진 속 내 모습을 보니 파리에만 오면 넘쳐나는 나의 생동감이 역시나 가득 담겨있었다. 내가 파리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도 파리에 있을 때만 솟구치는 이런 내 모습이 마음에 들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인들이 바글거리는 영화 ‘비포선셋’ 촬영지 서점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를 지나 Cafe Panis라는 곳에 들어갔다. 에스프레소와 함께 한 입 크기의 작은 디저트가 서너 개 서빙되는 메뉴 ’카페 구르망‘으로 주문했다.


창가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글을 쓱 위해 어제 사둔 블루투스 키보드를 꺼냈다. 그런데,,! 건전지 문제였던 걸까 키보드를 이리저리 만져봐도 전원이 켜지지 않았다. 때마침 어제 만난 한국인 사진작가에게 전화가 왔다.


“뭐하고 있어요?”

“글을 쓰려고 카페에서 키보드를 꺼냈는데 건전지가 나갔는지 전원이 안 켜지네요”

“건전지 가져다줄까요? “


건전지 하나 가져다주러 먼 카페까지 찾아오겠다는 그의 핑계가 귀여워 순간 폭소를 터뜨렸다.


“핑계가 좋네요! 그런데 그냥 조금 졸리기도 해서 숙소 들어가서 잠시 쉬다 저녁때쯤 나오려고요 “

“알겠어요. 그럼 다른 핑계를 좀 더 생각해 봐야겠다 “


장난스럽게 답한 그에게 오늘은 마지막날이니 혼자 시간을 보내고 싶다며 파리에서 좋은 시간 보내다 가시라고 어제 정말 즐거웠다고 정중히 인사를 건넸다. 언제든 떠올리면 기분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을 것 같은 사람이다.


숙소에 들어와 노래를 틀어놓고 이불속에서 몸을 녹이며 한참을 뭉개다 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이제 막 다섯 시를 지나고 있었다. 조금 더 게으름을 부리고도 싶었지만 파리에서의 야경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면 역시나 많은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았다. 급히 나와 우버를 탔다.


이십 분가량 달려 Pont de l'Alma(알마다리)에 도착하니 해가 막 넘어가려던 참이었다. 하늘빛이 어두워지며 커다란 에펠탑에도 노란 조명이 켜졌다. 낮의 에펠탑도 거대한 철탑도 좋지만 역시나 보는 사람을 압도적으로 황홀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황금빛 에펠탑이었다. 저물어가는 센 강변에 서서 화이트에펠이 반짝이는 모습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처음 파리병에 걸렸을 당시 한국에 돌아와 듣고 듣고 또 들었던 The 1975의 Paris를 들으며 이번 여행에서 마지막이 될 에펠탑의 모습을 눈과 마음에 새겼다. “How I'd love to go to paris again"이라는 가사와, 그 뒤에 이어지는 사르르 한 연주 부분이 마음을 몰랑거리게 만들었다.


에펠탑과의 인사를 뒤로 하고 마지막 저녁식사를 하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이번 여행 중 마지막 저녁식사에 대해서는 그래도 나름의 의미부여를 하고 있었는데, 고민 끝에 나는 제대로 된 코스 요리를 먹기로 결정하고 레스토랑을 예약해 둔 상태였다.

 

유학생 시절 어쩌면 과할 정도로 빠듯한 생활을 자처했던 나는 미식의 나라인 프랑스에 살면서 제대로 된 코스 요리 한번 먹어본 적이 없었다. 마음먹고 레스토랑에 가서도 단품 메뉴 하나를 먹고 온 것이 전부였다. 그땐 ‘어차피 파리에서 앞으로 오래오래 살게 될 테니까’라고 생각해 당장의 고생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겼지만, 일정이 변경돼 6개월 만에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는 파리에 있던 동안 너무 팍팍하게만 지냈던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렇게까지 힘들지 않아도 됐을텐데‘, ’조금만 더 좋은 것들을 즐길걸’


그렇기에 나는 이번 여행에서 특히 마지막 식사 때는 어느 정도 격식을 갖춘 맛있는 음식들을 원 없이 즐기고 싶었다. 추천받은 L'epi Dupin이라는 레스토랑을 미리 예약해 두고 구글 지도를 보며 길을 찾아갔다.


그런데 버스에 앉아 차창 밖 풍경을 보는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워낙 길치여서 지도를 보고서도 금방 눈치채지 못했지만 눈에 들어오는 바깥 풍경들이 이상하게 너무나도 익숙했다. 버스에서 내릴 때쯤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예약한 식당은 바로 내가 매일같이 공부하러 가던 아카데미 바로 옆 골목에 있던 곳이었다. 와 이곳에 다시 오다니..!


본인 몸집만 한 백팩을 메고 공부와 일을 하러 영차영차 다니던 그때의 나를 지금 만날 수만 있다면 세상 제일 훌륭한 레스토랑에 데려가 거한 코스요리라도 듬뿍 먹여줄 텐데. 그럴 수는 없겠지만 이 거리를 다시 걷는 것만으로도 그때의 나를 만나 멀리서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내게 파리에서의 마지막 식사 장소로는 이만한 곳이 있을 수 없었다.


음식은 그야말로 끝내줬다. 입맛을 돋우는 아뮤즈부쉬, 정어리와 캐비어가 들어간 애피타이저, 고소한 녹색 크림소스가 끼얹어진 버섯과 크레송, 탱글탱글 사르르 녹아버릴 것만 같은 고소한 관자구이, 샤베트 느낌의 머랭과 티라미수 비슷한 초코 슈 과자까지. 와인과 함께 페어링을 하며 마시니 두 시간의 식사 시간이 지겨울 새가 없었다. 음식이 사람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최고의 행복감을 느끼며 식사시간을 만끽했다.



그날 밤 식사를 마친 뒤에는 곧바로 숙소로 돌아와 짐 정리를 시작했고, 다음날에는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러 샤를드골 공항으로 갔다. 수속을 마친 뒤 남아있던 두 시간 정도의 시간 동안에는 프랑스에서 한국의 스벅처럼 틈만 나면 찾아가던 커피프랜차이즈 Pret a manger에서 헤이즐넛 카푸치노 한 잔과 아몬드 크로와상을 주문했다.


생각해 보니 이번 파리여행에서 크로와상을 한 번도 맛보지 못했구나. 3년 전 프랑스에 있을 당시 나는 고소한 아몬드 페이스트가 일품인 이곳 Pret의 아몬드 크로와상을 그렇게도 좋아했다. 사르르 부서지는 크로와상을 커피와 함께 녹여내며 떠나는 비행기들을 바라보았다. 지난 8일간의 여정이 머릿속에 하나씩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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