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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t Jan 02. 2020

학부모 편지 10호

학원을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학원으로 밀어 넣는 부모를 향하여

학교 수업이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아이들을 보면 또다시 학원을 돌아야 한다며 한숨을 쉬는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각 가정의 상황에 따라 때론 맞벌이라 돌봄 공백을 메우기 위해, 때론 학습 습관의 형성을 위해, 부모가 가르치기 힘든 이유 등으로 학원을 보내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 어른들은 학원에 보낼지 말지에 대한 문제보다 아이의 배움과 삶에 대한 고민을 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쓴 글이 학부모님의 고민에 도움이 될까 싶어 학부모 알림장에 적어봅니다. 




우리 부부는 큰 아이가 가고 싶어 하는 축구교실 말고는 학원을 보내지 않는다. 

사실 학원을 보내는 문제로 우리 부부는 약간의 의견 충돌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내가 육아휴직을 마치고 복직 후에 돌봄의 문제 때문이었지 아이들로 하여금 뭐라도 더 배우게 해야 한다는 생각의 차이는 미미했다. 

아이를 학원을 보내지 않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배움에 있다.

 배움에는 분명히 주체가 있으며 그 주체는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아이가 배움의 주체로 서지 않으면 사라질 지식을 구겨 넣는 것 그 이상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지금까지 와 다른 인재가 필요하다는 말은 당연한 말이지만 다르게 생각해보면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그들이 얘기하는 창의성, 협동력, 의사소통 능력이 언제는 중요하지 않았나? 

이런 것들이 학부모의 불안감을 조성하여 사교육으로 내모는 도구로 사용될 뿐이다. 

4차 산업혁명을 들먹이지 않아도 아이들을 가르쳐 보면 누구나 안다. 

아이들은 자기가 공부하고 싶어야 한다. 

자기들이 필요해야 한다는 말이다. 

학생은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데 억지로 교육하는 근대 교육의 장인 학교에서의 수업 행태를 보면 명확하다. 

수업에서 동기유발이라는 것을 가장 먼저 한다. 

동기유발을 왜 할까? 

이 걸 왜 배워야 하는지에 대한 동기 없이 학교에 왔으니까 교실에 앉아 있는 아이들은 눈만 끔벅거리며 선생님을 보고 있다.      

‘어디 한 번 내 내면에 깊이 잠자고 있는 학습에 대한 동기를 유발해보시지?’하고 시니컬하게 앉아 있는 아이들을 웃기고, 궁금하게 하고, 때론 무지에 대한 두려움을 이용해 겁을 주기도 하며 간신히 수업에 끌어오는 이 땅의 선생님들의 모습은 불쌍하다 못해 안쓰럽다.

그렇게라도 학습에 대한 동기를 유발하지도 못하면 재미없어 딴짓하고 있는 애들이 열심히 준비한 수업을 망쳐 기분이 상한 선생님의 제물이 될 뿐이다.      

학원은 어떤가? 

선행학습이란 허울 좋은 이름으로 빠르게 문제를 푸는 공식만 익힌 채 적으면 몇 개월치, 많으면 몇 년 후에 배워야 할 것들을 가르쳐오지 않았나?

 그렇게 학원에서 먼저 배웠다고 학교 수업이 시시하다고 하는 아이들에게 난 오기가 생겨 열심히 연구하고 가르쳤다.

 ‘나는 공부가 너무 재밌어서, 꼭 학교보다 먼저 배우고 싶어’하는 열망으로 학원에 보내달라고 조르는 아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왜 배워야 하는지 모르는 아이들에게 다들 그렇게 하니까 불안한 마음에 돈을 들여 학원을 보내는 부모는 되고 싶지 않다.      

학교에서 실컷 배우고 학원에 가서 몇 년치 내용을 앞서 배우고 그렇게 아이들은 머리가 무거워져 집에 돌아가면 공부를 많이 한 것 같은 기분에 쉬기라도 하면 다행이다. 

물론 쉬지 못하고 숙제를 하는 아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아이들은 과연 언제 스스로 공부를 할까?’ 

‘왜 이걸 해야 하는지조차 모른 채 지식을 주입받은 아이들은 과연 그 지식을 꺼내어 펼쳐보며 스스로 배움을 정리해 볼 시간은 있을까?’

‘이 아이들의 삶은 과연 행복할까?’

무수히 많은 의문들에 회의적인 답만 떠오른다.  

나는 아들은 이런 삶으로 내몰고 싶지 않다. 

그냥 지금을 즐기게 하고 싶다. 

공부를 시켜야 한다면 학원 말고 스스로 복습하는 습관을 가지는 것에 관심을 두고 지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친구들은 공부를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자기는 너무 공부를 안 하는 것 같다.”며 집에서 스스로 풀 문제집을 사달라는 큰 아들의 말은 기특하기까지 하다. 

큰 아들도 2학년 때부터 문제집을 하루에 1장씩 풀기 시작해서 학년이 올라갈수록 1장씩 늘려가기로 했다.(언제까지 늘려갈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습관을 가지니 3학년이 되고 나선 스스로 공부할 시간을 정하고 어려운 문제도 깊이 생각해서 푸는 힘도 많이 길러진 것 같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몇 개월째 한글을 잘 못 읽는 둘째도 형을 따라 한글을 공부하기로 하고 저녁 시간에 아빠와 정한 만큼 공부하더니 이젠 한글도 곧 잘 읽는다.   

집에 오자마자 부담 없이 가방을 방에 던져놓고 놀러 나가는 지금이 우리 두 아들은 너무 행복하단다. 난 그걸로 족하다.      

물론 두려운 마음이 없지는 않다. 

“아빠, 왜 난 어릴 때 혼내서라도 많이 공부시키지 않아서 지금 이 모양이야?”(물론 이렇게 얘기할 거라 생각하지도 않는다.)라고 물으면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항상 우리 가족은 지금 행복하기 위해 고민하고 선택해 살고 있다. 

언젠가 지금 이 순간을 후회할 일이 온다면 우리는 그때에 행복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가장 좋은 선택을 할 거라 믿는다. 

지금까지 우리가 그래 왔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 모두는 행복을 위해 이 순간을 살고 있습니다. 

배움이 즐거워서 학원을 다니고 싶어 하는 아이는 그 아이대로, 지금 더 놀아야 행복하다는 아이는 그 아이대로 삶의 방식을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부모는 아이와 많은 대화를 하며 서로가 이해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행복을 찾아가는 방법을 고민하는 방법밖에는 없습니다. 

자녀가 하고 싶은 것은 다 못하게 하고서 왜 할 줄 아는 게 없냐고, 왜 꿈이 없냐고 말하는 부모가 되지 않길 바라며 항상 저의 부모 됨을 돌아볼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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