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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랑 Jan 03. 2021

순수한 아이의 눈이 찾아낸 애니메이션의 오류

픽사 '인사이드 아웃'의 그 장면

딸아이는 '인사이드 아웃'을 좋아한다.


2015년 개봉한 픽사의 '인사이드 아웃'은 11살 라일리와 라일리의 머릿속에 사는 감정(기쁨, 슬픔, 소심, 까칠, 버럭)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아빠의 사업으로 미네소타를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이사를 오게 된 라일리가 갑작스러운 환경변화로 심적인 혼란을 겪게 되는데 그 가운데 기쁨이와 슬픔이가 감정 컨트롤 본부를 이탈하게 되는 사고가 발생한다.


핵심 기억을 잃은 라일리를 다시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기쁨이와 슬픔이가 본부로 돌아가야만 하는데 그게 쉽지만은 않다.


'인사이드 아웃'은 환경변화와 사춘기가 겹친 라일리의 이야기를 감정 컨트롤 본부의 기쁨과 슬픔, 두 감정의 부재로 비유하며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나는 개봉 당시 '인사이드 아웃'을 봤을 때  나의 어린 시절, 사춘기, 학창 시절을 떠올렸다. 아주 사소한 일에도 흔들리고 어려워하며 주저했던 날들.


'그때 나 역시 저런 감정을 느꼈더랬지.'

그리고 빙봉. 어린 시절 누구나 하나쯤 가지고 있었던 상상의 친구. 작품 속에선 장기기억저장소에서 일어난 사고로 기억 쓰레기장에 떨어져 잊히게 되지만 실제로는 성장하면서 어린 시절의 기억을 잊어가듯 상상의 친구도 서서히, 영원히 기억에서 지워진다.


그렇게 잊어간 기억, 추억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젠 떠올리고 싶어도 기억나지 않는 기쁘고 순수했던 나날들이 그리워지고 그랬다.


그래서 난 '인사이드 아웃'을 좋아했다. 훗날 아이를 낳으면 함께 보고 이야기를 나눠야지, 생각했었다.


이제 겨우 다섯 살이 된 딸아이와 사춘기나 잊어가는 추억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지만 아이가 귀엽고 통통 튀는 매력이 있는 감정 캐릭터들을 좋아해서 종종 '인사이드 아웃'을 함께 보고 있다.

1월 1일, 새해 첫날 역시 우리는 '인사이드 아웃'을 보고 있었다.


장기기억저장소를 비롯한 상상의 나라, 꿈 제작소 등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들을 보며 깔깔거리고 웃던 아이가 문득 이상하다는 듯이 물어왔다.


회상 튜브를 타고 돌아가려던 기쁨이가 성격의 섬이 무너지는 사고로 기억 쓰레기장에 떨어지게 되는 장면에서였다.


"기쁨아~~~"


슬픔이가 애타게 기쁨이를 부르는데 아이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왜 기쁨이만 불러?"

"응?"

"빙봉도 같이 떨어졌는데 왜 기쁨이만 부르냐고."


기쁨이를 구하려던 빙봉이 휩쓸리며 함께 떨어졌는데, 슬픔이는 오로지 기쁨이만 걱정하며 불렀던 것이다. 앞서 슬픔이는 빙봉이 로켓을 잃어버렸을 때 위로하며 함께 슬퍼해줬었는데, 사고가 나서 떨어지는데 빙봉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기쁨이만 부르고 있지 않은가.


열 번도 넘게 봤지만 그간 한 번도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던 부분이었다.


"혹시 슬픔이는 빙봉이 떨어지는 건 못 본거 아닐까?"


넌지시 핑계를 대 보지만 그런 핑계로 아이를 납득시킬 수는 없었다. 정면으로 떨어지고 큰 목소리로 비명까지 지르는데 못 보고 못 들었을 리 만무했다.

이건 확실한 오류였다.


주인공인 라일리가 행복해지기 위해 본부로 돌아가야 하는 기쁨이가 사고로 떨어지는 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였고 그러니 기쁨이를 걱정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빙봉은 어차피 잊힐 기억이고 애니메이션의 감동 코드로 이용되는 캐릭터일 뿐이니 굳이 대사로 '기쁨아, 빙봉아~'라고 부르는 건 불필요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지극히 어른의 시각이다.


빙봉은 기쁨이와 슬픔이와 함께 고생한 동료였고, 둘이 안전하게 돌아가게 하기 위해 (물론 많은 실수가 있었지만) 궂은 노력도 마다하지 않았던 '친구'였다. 그러니 이 상황에서는 기쁨이 뿐만 아니라 빙봉도 부르짖어줬어야 했다.


순수한 아이의 눈이 찾아낸 오류에 어른의 시각이 얼마나 편협한가 다시 한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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