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멘트 Dec 21. 2023

생각을 지속하는 일의 어려움

이븐 시나와 나

애석하게도 생각을 하지 않고 사는 일은 꽤 쉬운듯하다.  

특히 직장이나 아르바이트 등 나의 시간을 종속하는 주체가 있다면 딱이다. 

거기에 더해 그 일이 매일 엄청난 창의력과 지능을 요구하는 일이 아니라면 (대부분의 일들)

인생의 꽤나 많은 기간을 시간과 여러 가지 우연이 자신을 이끌어가는 대로 살 수 있다.  

일뿐만 이 아니다. 최근에는 여행을 하면서도 나란 인간이 얼마나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는지에 대해 새삼스럽게 놀랐다.  

실제로 나의 집중력 또한 매우 심각한 수준인데, 예를 들어 뭘 좀 읽으려고 책상에 앉으면 목이 마르고, 물을 떠서 자리에 앉으면 뭔가 찾고 싶은 책이 생각나서 괜히 이곳저곳을 뒤적거리고, 그러다 보면 눈에 거슬리는 어지러운 잡동사니가 보이고, 그 와중에 날씨는 더워서 머리가 아프다는 생각을 하다가, 다시 집중 좀 하려고 하면 밖이 시끄러워서 또 창문을 닫으러 일어서고 있는 스스로를 보면서 나는 과연 이성과 지성을 갖춘 하나의 성숙한 인간인가 아니면 그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먹고 배설하고를 반복하는 하나의 유기체에 지나지 않는가에 대한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누구나 듣는 말일 수 있겠지만, 엄마와 이모들이 어렸을 때 나는 또래보다 훨씬 일찍 한글을 뗐다고 했다. 똑같은 말을 몇 번씩 했다는 건 그래도 완전한 거짓말은 아닐 테니 그 말을 살짝 믿어보자면, 총명했던 어린 시절의 그 아이는 성인이 되어 저렇게나 산만한 자기 자신을 상상이나 했을까. 

현대에도 천재들은 존재한다. 각 다양한 분야에서 너무나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활약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현대 사회는 고대나 중세 시대처럼 인프라가 거의 없던 그런 시대보다 더 많은 천재들을 배출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젓가락처럼 얇은 철근 몇 개에 구멍이 숭숭 뚫린 벽돌과 시멘트로만 뚝딱 건물을 짓고 사는 21세기의 페루 일반인들은 과연 마추픽추라는 단단한 도시를 건설한 15세기의 자신들의 조상보다 더 발전했다고 할 수 있는가? 

현대의 리마와 마추픽추. (리마도 좋은 곳은 좋지만 사실 저런 모습이 일반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도시의 모습이다)


5세기 무렵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부터 다시 약 1천 년 이후 동로마 제국이 멸망한 15세기 사이, 오직 신만이 제일 원리로 작용하던 중세 시대 유럽에서는 철학조차도 신학이라는 영향권 안에 들어가 있었을 뿐이었지만, 신기하게도 예전의 그리스 고대 철학은 몇 뛰어난 이슬람 철학자들 덕분에 이 시기에 다시 부활할 수 있었다. 



그중 어떻게 보면 이슬람 철학자들을 대표한다고 이야기해도 무방한 이븐시나 (Ibn Sina)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물론 그가 천재였다는 사실과 또 그에 대한 이야기가 과장되어 전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고도) 과연 현대는 한 개인이 자신이 가진 지적 능력을 최대치로 발휘하며 살아가는 일이 예전보다 쉬워졌을까 아니면 오히려 더 어려워졌을까에 대한 생각이 든다. 

이븐 시나는 이미 열 살 때 코란을 암송했고, 18살 때는 모든 학문 (철학, 고고학, 의학, 수학, 화학, 심리학, 천문학 등)을 통달했다고 하는데 이 중 많은 부분을 독학으로 배웠다고 한다. 의학 또한 독학으로 익혔는데 수많은 전통적 치료법에 자신의 관찰을 덧붙여 요약한 책들을 유럽의 의사들이 이 이븐 시나의 저술을 17세기까지 애용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종합하고 자신의 색깔을 입혀서 향후 등장하는 스콜라철학의 토대를 만들었고 토마스 아퀴나스도 이븐시나의 철학에 큰 영향을 받게 된다. 자신을 지원해 주던 왕조가 무너진 이후 그는 25살 때 유랑 생활을 떠나는데 30여 년 동안 중앙아시아와 페르시아 등지를 여행하며 생과 사를 오가는 삶을 지속한다. 


그는 '신'이라는 거대한 담론이 이 세계를 절대적으로 지배하고 있을 때 유일신에 대한 맹목적 신앙과 합리적이고 철학적인 사고를 어떻게 조화시킬까에 대한 문제에 대해서 깊이 고민했고, 그 자신이 이슬람 사회에서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연구 시 코란의 권위에 호소하지 않았기에 그의 종교연구는 이슬람계 뿐만 아니라 가톨릭 철학자들에게까지도 영향을 미쳤다. 


(참고: <케니의 서양철학사 2권>, 네이버 지식백과  '이븐 시나')




그의 생을 아주 간단히 보더라도 그가 공부했던 학문 자체가 너무나 방대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에는 어렸을 때부터 공부는 '중요과목' 국, 영, 수에 보통 초점이 맞춰져 있고 시험 문제에 대한 답을 잘하기 위한 공부를 하며, 그마저도 고등학교에 가면 문과와 이과로 잔인하게 나눠버리는데, 이때 한쪽의 편을 들게 되면 아주 높은 확률로 그 반대편의 공부는 평생 할 이유도, 필요도 사라지게 된다.


또한 스물다섯 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세상을 유랑했던 그처럼 나의 생을 세계 속으로 내던질 수 있는 용기를 가지기는 더욱더 힘들다. 스물다섯이면 한참 취업 준비를 열심히 해야 하는 때이니까. 이렇게 정해진 인생의 틀이 오히려 개인의 최대 능력치를 가두는 역할을 현대사회에서는 하고 있지 않는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사회는 천재를 배출해 내기 매우 어려운 사회가 아닌가 싶다. 


그 당시 모든 사람들이 '신'이라는 최고 가치만을 이야기하며 그에 대한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을 때 용기 있게 다른 관점을 제시해 줄 수 있는 통찰력과 용기도 지성인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이 또한 온갖 소셜미디어에 빠져 살아가는 나 같은 현대인들에게 쉬운 일은 아닌듯하다. 분야에 상관없이 어떤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지속해서 생각하기가 어렵다. 그러니 이 시대의 지성인이라고 누구나 이야기하는 몇 유명한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나의 포지션을 재빨리 정해버린다. 그 방법이 가장 덜 고통스러우니까. 그리고 그 사람들의 의견을 마치 나의 의견인양 침을 튀겨가며 언성을 높인다. 이런 사회에서 한 개인은 어떻게 지성인이 될 수 있는가. 


지성인은 고사하고,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몇 시간을 순식간에 없애줄 수 있는 유튜브 쇼츠와 인스타그램 같은 플랫폼이 나의 손 끝에 있는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하면 의미 있는 생각을 지속할 수 있는가. 정말 골치 아픈 문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