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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era Nov 14. 2020

핵심은 ‘언어’가 아니라 ‘관계’

아이들 앞에서는 걱정은 걱정일 뿐 현실이 되지 않는다.

여섯 살 일본 아이가 원에 들어오게 되었다. 아이를 만나기 전 걱정이 전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한국말을 전혀 몰라요.'

라는 부모님의 말은 아주 많은 생각과 걱정을 하게 했다.


부모님과 연락을 한 그 날 저녁, 딸아이에게 물었다.

"엄마 유치원에 한국말을 전혀 못하는 일본 아이가 오게 됐어. 엄마는 일본어를 전혀 몰라서 걱정이 정말 많아."

그랬더니 아이가 그런다.

"엄마, 다른 걱정은 안 해도 돼. 그 아이가 따돌림받지 않도록만 하면 돼"

딸의 이야기를 들으니 맞는 말이었다. 해야 할 궁극적인 걱정은 바로 이 것이었다.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 역시 아이는 어른보다 현명하다.


아이가 등원을 시작했다.


등원 첫날, 설렘과 두려움을 함께 부여잡고 버스를 맞이 하기 위해 정문에 서 있었다. 엄마 손을 잡고 버스에서 내린 아이는 아무렇지 않게 엄마와 인사한 후 내 손을 잡았다. '앗싸, 1단계 성공'을 마음속으로 외쳤다.

'울면 어쩌지?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떼를 쓰면 어쩌지?'

라는 걱정을 했던 시간의 쓸데없음을 아이가 몸소 증명해 주었다. 작은 아이의 손을 잡고 발열 체크 줄에 서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일본어를 전혀 하지 못하므로 번역 앱의 도움을 받았다. 차가운 아침, 딱딱한 기계음을 들은 아이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막이 없는 외국 영화 볼 때의 느낌을 아이는 느끼고 있을까? 처음 보는 낯선 풍경에, 낯선 사람들과 낯선 언어들.... 이 느낌에 대해 묻지 못했고 아이는 말하지 못했다.


교실에 들어오며 신발과 가방 정리하는 곳, 아이의 자리를 알려주었다. (원래 유치원 교실에는 정해진 자리가 없다. 그러나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한 방역 수칙에 따라 아이마다 '개별 영역 확보'를 해야하고 이를 위해 유치원 교실은 흡사 초등학교 교실과 같은 모습이 되어 아이마다 정해진 자리가 생겼다.) 누구냐는 아이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온통 새 친구에게 관심이 쏠렸고 분위기가 들뜨기 시작했다. 궁금증과 호기심이 아이들 사이를 파고들었고 이는 새로 온 아이와 기존 아이들 그리고 나까지, 우리 모두의 마음이었다.

"오늘부터 우리와 함께 생활하게 된 새 친구야. 이름은 ***이야. **이는 일본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한국말을 하지 못해."

"그럼 어떻게 말해요?"

"선생님도 일본어를 잘하지 못해서 핸드폰 번역기를 사용할 생각이야."

"우리는 말하고 싶을 때 어떻게 해요? 우리도 일본말을 못 해요."

"선생님이 번역기 도움을 받아 알려줄게."

"저도 핸드폰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일본말을 아주 잘했으면 좋겠어요. "

아이들은 모두 새 친구에 대해 무척 관심이 많았다.


외국인이라는 분류를 받은 아이는 자기 나라에서는 당연히 외국인이 아니었다. 몇 주 사이 아이는 외국인이 되어 우리 앞에 왔다. 아이의 막막함은 어느 정도이며 어떤 느낌인지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새로 온 아이도 그렇지만 낯선 상황을 직면하게 된 것은 기존 아이들도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우리말을 하지 못하는 친구라니.... 아이들이 스트레스를 받으면 어쩌지, 친구를 오해하면 어쩌지, 서로 싸우면 어쩌지,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아이에게 옮겨지면 어쩌지, 새로 온 아이가 적응하지 못하면 어쩌지, .... 뭐 이런저런 온갖 '어쩌지'라는 부정적인 가정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다.


결론을 말하자면,

걱정과 부정적인 가정은 또 하나의 부질없는 감정 낭비였다. 그저 다른 아이들을 맞이할 때와 같으면 되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역시 나보다 현명하고 지혜롭다. 어른의 걱정과 두려움 따위, 다 필요 없이 아이들끼리 웃고 뛰고 '어쩌지' 않고 자연스럽게 평소와 같이 스며들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편견이 나를 괴롭혔을 뿐이었다. 아이들에게 맡기면 되는 거였다.


매일이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채워지고 있다. 다만 종종 수업 중에 핸드폰을 찾아 몇 마디 단어와 문장을 기계음으로 들려주고 아이들에게 어떤 말을 했노라 알려주는 것만이 새로운 일상이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도 일본 단어 몇 마디를 알게 되었다. 간단한 인사말과 동물 이름과 같은 몇 단어들. 그리고 **도 우리말의 단어들을 내뱉게 되었다. 불과 며칠 사이.


한 아이가 그런다.

"선생님, 우리는 **에게 한국말을 알려주고 **는 우리에게 일본말을 알려주니 좋아요. 우리 서로 배우니까 좋아요."

이 한 마디에 모든 마음이 그대로 담겨있었다. 이는 결국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가 아닌가. 언어나 관계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순작용. 아이들은 이미 스며들고 녹아들어 깨우치며 서로 서로 관계의 순작용 속에서 배우고 있었다.


걱정은 걱정일 뿐 아이들 앞에서는 현실이 되지 않는다. 이 현명한 선생님들에게 한 수 잘 배웠다.


"얘들아, 앞으로도 잘 알려줘. 열심히 배울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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