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자의 실패하는 법
대차대조표처럼 빈틈없이 계획으로 짜인 나의 삶에는 작은 우연이 들어올 틈이 없다. 유독 실패를 두려워하는 나는 알림장에 적은 준비물이 없었을 때 당혹감을 느끼기 싫어 매일밤 가방을 점검하던 아이였다. 당당하게 “까먹었어요.”라고 말하거나 옆자리 친구에게 빌리는 방법으로도 세상은 무탈 없이 굴러갈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사는 사람들도 꽤 많다는 것을 다년의 직장 생활을 통해 깨닫고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의 출근 가방은 무겁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넣어둔 물티슈와 보조배터리, 명함이 필요한 상황에 혹여 명함이 모자랄까 봐 여분으로 들고 다니는 명함 한 묶음까지. 흡사 영화 <인사이드 아웃> 속 불안이의 가방 같다.
걱정의 무게만큼 내가 짊어져야 할 가방의 무게는 무거워지기에 여행 가방만큼은 아주 작은 가방을 찾곤 한다. 현실에 딛고 있는 발을 떼는 순간만큼은 무게추를 내려놓고 훨훨 날아가고 싶은 마음에.
비행기에 타서 이륙을 하는 순간, 내가 살던 곳과 멀어지는 순간 나는 합법적으로 경로 이탈을 할 수 있다. 붕 뜬 몸과 마음은 평소였으면 하지 않았을 것들을 시도하게 한다. 아마도 평소였다면 미리 다운 받아온 실패 없는 콘텐츠를 보거나 음악을 들었겠지만 이번만큼은 좌석에 붙은 작은 스크린을 눌러본다. 비행기에서 영화를 보면 좋은 점은 평소에 보려고 했지만 왠지 손이 가지 않았던 영화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실패를 해도 아무렴 어때 어차피 붕 뜬 시간인데-라는 합리화도 가능하다.
어쩐지 '인생영화'로 꼽히는 작품들은 완벽하게 세팅된 순간에 완전히 몰입하여 봐야 할 것 같은 이상한 부담감이 있다. 그래서 매번 만만한 영화부터 보고 계속 미루게 되는 영화들이 있는데 나에게는 <중경삼림>이 그랬다.
작은 스크린 화면, 낮은 화질, 주변의 소음, 불편한 좌석. 영화를 보기에 최적의 환경은 아니었지만 비행기에서 본 중경삼림은 최고의 영화였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부터 나는 이미 홍콩과 사랑에 빠졌다. 홍콩의 쏟아지는 야경을 배경으로 <California Dreamin'>을 들으며 영화의 여운에 심취했다.
계획하지 않는 삶의 좋은 점은 내가 예기치 못한 순간에 내 마음에 정확히 와닿는 감정을 선물처럼 만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 우연을 가장한 경로 이탈이 필요한 이유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