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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엘 Dec 25. 2020

다들 장국영 한 명쯤은 품고 살잖아요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리뷰

삶의 나락에 떨어졌을 때

끝이 없는 절망 속에서 허우적 댈 때

다시 일어나 책상에 앉아 다시 인생의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찬실이는 정말 복도 많다.


임시 가사도우미로 고용해주는 소피가 있고

무조건 따르는 후배들이 있고

검은 봉다리에 장을 잔뜩 봐와서는 백숙을 한 대접 내어주는 주인 할머니가 있다


그리고 장국영이 있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에서 바람둥이로 열연했던 배우 김영민이 속옷 차림으로 나와서 깜짝 놀랐다. 앞머리 꼬랑지를 내리고서는 자기가 장국영이란다. 주인집 할머니의 죽은 딸이 사랑했던 장국영. 그 딸의 방에서 기거하는 그는 찬실이에게만 모습을 드러내며 찬실이의 일상에 사사건건 간섭한다.


찬실이의 심신이 허해져서 그가 눈에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그가 귀신인지 알 수는 없다. 아무튼 장국영은 찬실이가 다시 일어설 수 있게 응원하고 상담해주고 때론 울고 토라지며 찬실이가 원하는 방향으로 살 수 있게 진심을 다해 돕는다. 그리고 비로소 찬실이가 책상에 앉아 영화에 본격적으로 미치게 만든 작품을 떠올리며 힘을 얻자 장국영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은 다 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찬실이를 떠난다.



그리고 김영이 있었다.

김영은 찬실이의 꿈에 나타나 찬실이의 마음을 흔들어 놓을 만큼 매력적인 남자였다. 김영을 통해 찬실이는 10년 만에 이성에 대한 두근거림을 느꼈고 순수한 사랑의 감정을 가질 수 있게 된다. 이것은 단순하게 여성은 남성을 사랑해야만 완전체가 된다는 뻔한 로맨스로 끝나지 않는다. 찬실이는 모든 게 무너진 절망 속에서도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할 줄 알게 되며, 김영과 잘 이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본인을 탓하지 않는다.






딸을 잃은 주인 할머니는 찬실이에게 딸의 방을 내어줄 만큼 마음을 열게 된다. 추위에서 스러져 가는 꽃화분을 거실에 들여놓고 잘 가꾸던 할머니는 어느 날 꽃이 다시 핀 것을 보게 된다. 그리고 서툰 한글 솜씨로 짧은 시 한 구절을 쓴다.



사라도 꼬처러 다시 도라오며능 어마나 조케씀미까



남성들에게 찬실이는 감독님으로, 소피는 선배님으로 불린다.  

특히 40살, 결혼 안 한, 고정적인 수입이 없는, 단칸방 살이 여성인 찬실이는, '그래도' 영화를 다시 만들기로 한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는 영화 없이 못 사는 영화감독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여성 배우들을 대상화하지 않았다.

소피는 소피대로,

찬실이는 찬실이대로,

주인 할머니는 주인 할머니대로 

각자의 인생을 산다.

찬실이가 곧 김초희 감독이었고, 나였고, 우리 모두였다.

 


찬실이는 정말로 복도 많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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