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미자차를 찐하게 탔다. 매실차나 오미자차나 설탕만 이빠이 들어가는 건 매한가지인데 이렇게 쓸데없이 달기만 한 차를 왜 마시는지 모르겠다. 다 늦은 이 시간에 뜬금없이 배가 부글부글거려서 어이가 없었다. 어쩌자고 저녁시간에 또 날 긴장하게 만드는 건지 한숨을 푹 쉬었지만, 어젯밤 맥주 두 캔을 들이붓고 곧바로 잠든 기억이 떠올라 머쓱해졌다. 이유가 명확하면 마음이 한결 가볍다. 내뱉은 한숨을 다시 쏘옥 들이마시고 팔팔 끓는 물에 이 엿같은 설탕물을 타서 뜨끈한 온수매트 안에 들어왔다.
어젯밤에 꽤 재미있는 (보이는)라디오를 들었다(보았다). 음악인들이 진행하는 라디오를 들으면 그 뒷얘기를 들을 수 있어서 재밌다. 그 이야기들을 듣고 나면 아무도 모르는 얘기를 은밀하게 나만 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어디 가서 평론가처럼 아는척하기에 딱 좋다. 그 노래를 들을 때 백데이터만큼의 감동이 딸려오는 건 덤. 그래서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즐긴다고 했던가. 이왕이면 경제, 재테크, 부동산, 주식, 사업 같은 쩐이 딸려오는 분야의 덕후여서 돈방석에 앉으면 얼마나 좋았을꼬. 하필 꼭 극소수의 인간만이 생존해있는 서브 중의 핵서브 컬처에만 꽂히는지 모르겄다. 백날 좋아해 봐라. 이거 무슨 누가 먼저 사라지냐 게임도 아니고. 요가를 해도 꼭 수요 없는 마이솔에 꽂혀가지고 선생님 그만두고 요가원 없어지고 이 방랑을 언제까지 해야 되는 건지. 제발 좀 그놈의 '대중'들이 좋아하는 것에 꽂힐 수는 없는 팔자인 걸까.
아 이 얘기를 하려던 게 아니었고, 어젯밤에 그 재미있는 보이는 라디오를 맥주를 홀짝홀짝 마시면서 정말 즐겁게 시청하고 있었다. 적당히 즐거운 음악 이야기와 적당히 오른 술기운에 사르르 녹듯 침대에 누웠고 마취약이 들어간 듯 잠에 빠졌다. 정말 이상적인 음주가 아닌가. 비록 다음 날 두통과 뱃속 부글거림에 이런 엿같은 설탕물컵을 들고 25도 온수매트에서 지져야 한대도 말이다. 이 나이 되어서 이제야 술맛을 알게 되었다고 하면 누가 믿어주려나. 그것도 이렇게 집에서 적당히 즐거운 이야기가 곁들인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나는 술집에 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일단 술집에 가려면 여러 명의 인간들이 함께 있어야 하고, 또한 다른 테이블엔 나와 관련 없는 다른 인간들까지 있는데 이게 꽤 괴롭다. 이게 보통 노이즈가 아닌 것이 누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다들 자기 말을 들어달라는 애원의 눈빛을 보내며 씨부렁대는데 정말로 기가 쏘옥 빨리고 집에 가고 싶어 죽겠다는 생각밖에 안 든다. 처음 정식으로 술이란 걸 먹어본 건 고2 때였다. 그날 친구는 개가 되어 욕실바닥에 토사물을 싸질러놓고 잠이 들었고, 나는 고무장갑을 끼고 남의 집 욕실바닥을 치우며 생각했다. 절대로 나는 나중에 이러지 말아야지. 사실은 그보다 아주 더 오래전에 생각하긴 했다. 집안의 어른으로부터 너무 못 볼 꼴을 많이 봐온 게 크다. 저렇게 되어야지 보다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를 먼저 배운 탓이다.
술주정 부리는 인간들을 혐오한다. 기숙사 룸메이트의 술주정을 한 번 호되게 겪은 이후 술에 취한 그에게 기숙사 방 문을 잠그고 열어주지 않은 적도 있었다. 차가운 복도 바닥에서 하룻밤을 지낸 그는 그 이후로 절대로 술주정을 부리지 않았다. 술에 취해도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조용히 침대로 들어갔다. 술주정도 사람을 가려 부린다는 것을 목격하니 더 혐오스러웠다.
적당히 나이를 먹어 적당히 오른 술기운을 적당히 즐길 수 있는 내 시간이 좋다. 기 빨리며 리액션을 해줘야 하는 노이즈가 없는 이 귀한 시간. 다음날 엿같은 설탕물을 마셔야 하는 고문을 당해야 한대도 정말로 딱 죽기 좋은 밤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