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티엘 Dec 31. 2023

충전

나는 이제 지쳤어요 땡벌



작정하고 화장실 배수구를 해체했다. 가장 깊숙이 있는 놈이 문제였다. 뭔가에 뻑뻑하게 콱 막혀서 빠지질 않았다. 콱 막혀 빠지지 않는 원통형의 트랩 주위는 각종 오물로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불쾌하게 더러운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자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해 보자. 공구함에서 조금이라도 지레처럼 생긴 놈들을 가져와 하수구에 억지로 끼어넣어 보았다. 배수구를 해체하려고 했으나 내 손가락 뼈가 해체되는 것 같았다. 시도에 실패한 각종 공구들이 오물을 한껏 뒤집어쓰고 화장실 바닥 한구석에 하나씩 하나씩 나뒹굴었다. 이제 마지막이다. 너마저 실패하면 그냥 이대로 사는 거야. 인내심이 바닥을 쳤다. 어쩌면 실패하길 바랐는지도 모르겠다.

뺀찌(정식명칭은 '플라이어'. 명색에 한국어를 가르치고 싶다는 인간이 이딴 말을 쓰냐는 비난이 여기까지 들린다. 좀 봐주십쇼)로  그 문제의 원통형에 달린 꼭다리를 콕 잡아서 쑤욱- 잡아 빼니 그놈이 수욱 나왔다. 오물보다 나를 더 놀라게 했던 건 바로 머리카락 뭉치였다. 이 휑한 두피의 주범들이 여기 다 모여 있었구나. 흐미 아까버라.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고 이만큼 빠졌으면 이만큼 다시 새로 나왔어야 하거늘. 이제 내 두피는 재생능력도 없는 게냐.  




비누칠을 한 수세미로 해체된 배수구 트랩 조각을 하나하나 박박 닦았다. 제 색깔을 찾은 놈들을 재조립하고 다시 끼워 넣었다. 화장실 바닥도 박박 닦고 방향제도 이빠이(좀 봐주십쇼 예?) 뿌렸다. 인위적인 냄새를 좋아하지 않아 방향제를 서랍 깊숙이 처박아 놓았었는데 방향제도 오랜만에 바깥공기를 쐬었으리라. 올해 마지막날이라고 구태의연하게 한 해의 때를 벗긴다 뭐 그런 짓이었냐하면 뭐 그게 맞나 보다.








올해 나는 지쳤다. 정말 너무 지쳐서 모오든 의욕을 다 잃었다. 특히 리액션에 지쳐 우쭈쭈는커녕 '응' 대답조차 하기 지겨울 정도로 지쳤다. 고장난 리액션 기계. 올해 내 생각의 99%는 모든 게 지겹고 지치고 뻔하고 그만하고 싶다였다. 그래서 그냥 마음 가는 대로 했다. 우쭈쭈, 으쌰으쌰 동기부여를 내놓으라는 손길에도 지쳐서 드러눕고 말았다. 아웃풋이 없으니 생산성은 제로였다. Yield 가 0%면 시말서를 쓰던가 8D를 쓰던가 아무튼 뭐라도 썼던 때가 있었지.



아이폰 8은 드디어 맛이 갔다. 아직도 홈버튼 쓰는 사람 있으면 나와보세요. 이 놈의 아이폰 8 내가 언제까지 쓸 수 있나 끝까지 가볼 거야 시바. 다시는 애플에 돈 쓰지 않겠다고 장담했건만 또 애플에 기부를 했다. TV도 없이 유일한 스크린이었던 엘지 피시그램도 맛이 간 지 오래다. 아니 명색에 900g을 자랑하는 휴대용 노트북인데 2시간도 못 버티면 이게 휴대용이냐고. 7년 썼으면 오래 버텼다고 해야 하나. 그러고 보니 올여름 일본 여행 때 미러리스 카메라 배터리가 아예 맛이 가서 여행 중 써보지도 못하고 짐짝이었던 게 떠올랐다. 금세 잊고 있었네.


아이폰 배터리 교체 - 102,000원

노트북 배터리 교체 - 74,000원

미러리스 카메라 배터리 - 구매예정

휴대용 보조배터리 - 구매예정


각종 배터리 교체에 거금을 썼고 쓸 예정이다. 역시 돈인가. 돈을 쏟아부어야 다시 충전이 되는 것인가. 그럼 나는 무엇에 돈을 써야 하는 것인가. 돈지랄을 하긴 했다. 요가지도자과정 일명 TTC (Teacher Training Course)에 등록을 했고 몇 달째 수련 중이다.






어제 새벽수련을 마치고 매트를 정리하다가 예전 선생님과 우연히 마주쳤다. 선생님도 그곳에서 새벽 수련을 하시고 매트를 정리하고 계셨던 것이었다.


아쉬탕가 프라이머리 하프 시리즈부터 풀 시리즈까지 내게 모든 진도를 주신 분. 아쉬탕가는 시퀀스가 정해져 있는데 선생님으로부터 진도를 받은 만큼 수련을 한다. 설령 다음 시퀀스를 알고 할 수 있어도, 받지 않은 진도는 하면 안된다. 그래서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린다.

나는 프라이머리 풀시리즈 수련을 하는 게 대단한 것인지 몰랐다. 최근에 어떻게 하면 진도를 받을 수 있냐고 조언을 구하거나, 진도를 받지 못해 마음고생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야 알았다. 그리고 그 선생님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풀시리즈까지 못했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래서 그 분께 묻고 싶다. 내게 풀시리즈를 주신 기준이 무엇이었냐고. 그때 못하던 아사나는 여전히 못하고 있는데 왜 나에게 진도를 주셨나요. 이 가엾은 몸뚱이에서 대체 어떤 가능성을 보신 건가요.


선생님을 만나고 마음이 조금 왈칵했다. 내가 이곳에서 TTC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셨다며, 언젠간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하셨다.

"선생님 때문에 제가 여기까지 오게 됐잖아요" 괜히 한번 칭얼거려 봤다. 선생님과 같은 타임 수업을 들었다니. 참 세상 별일이다.





자 배터리도 사고 돈지랄도 했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진짜 지랄을 시작해 볼까?


    

같이 수련을 한다는 이유로 어마어마한 유대가 형성된다. 증말로 고마운 일이다. 흐규흐규 (사진 출처는 한 도반님)



keyword
작가의 이전글 아이고 나마스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