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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리 Mar 01. 2022

넘어져도 좋아!

- 스노보드가 좋은 이유

올해로 스노보더 3년 차가 된 나. 사실 보드를 타러 가는 일과 타는 일은 나처럼 저질체력을 가진 사람에게 쉬운 일은 아니다. 내가 얼마나 저질체력이냐면 여럿이 보드를 배우러 간 첫날, 지인이 맨 처음 포기할 것 같은 사람으로 나를 꼽았다는 것, 그럼에도 슬로프 하나를 온전히 완주한 것 보고 정말 의외라고 놀랐다고 하면 이해가 갈까. 하지만 그가 몰랐던 것이 하나 있다. 내 사전에 처음부터 안 하면 안 했지, 중도포기란 없다는 것을. 지지부진하게 물고 늘어지더라도 꾸역꾸역 끝을 보는 게 나다. 하긴, 내 몸 하나 제대로 가누지 못하면서 무거운 장비를 이고 지고 넘어지기를 반복했으니 중간에 포기를 했어도 누구 하나 나무라지는 못했겠지만. 


그런 저질체력을 가진 내가 보드를 탄다. 새벽같이 일어나 장비를 차에 싣고 스키장으로 가, 차 안에서 불편하게 옷을 갈아입고, 제대로 걷기 힘든 부츠를 신고, 무거운 장비를 들쳐 메야하는 힘든 여정이지만 나는 보드 타러 가는 게 좋다. ‘슬로프를 가로지르면 기분이 조크 든요’라고 이유를 대고 싶지만 여전히 비루한 실력의 보더라 참는다.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내가 진짜 내가 보드를 좋아하는 이유는 공식적으로 넘어질 수 있어서다. 대놓고 넘어질 수 있는 곳, 미끄러지고 고꾸라져도 창피하지 않은 곳이 바로 스키장이다. 왜냐하면 모두 넘어지니까. 안 넘어지려는 초보자도, 라이딩에 자신 있는 상급자도 잠깐 방심하거나 기술을 욕심내면 여지없이 눈 속에 처박힌다. 그리고 어디 하나 부러지지 않은 이상 (물론 정말 아프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일어난다. 그렇게 눈밭을 몇 번 구르고 나면 왠지 모를 해방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평소에는 할 수 없는 일탈 같은 행위에 마음이 후련해진달까. 맨 정신으로 땅바닥에 구르는 일은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맨 정신으로 넘어져도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일어날 수 있는 곳, 아니 대놓고 넘어질 수 있는 곳, 나는 스키장이 그런 곳이어서 좋다. 보드를 타다 넘어지는 것은 라이딩에 실패했다고 보지만, 나에겐 중력으로부터 내 몸을 해방시키는 즐거운 해프닝일 뿐이다.


폭설주의보가 내린 날 스키장에 간 적이 있다. 내리는 눈의 양 때문에 슬로프를 타고 내려오는 내내 시야 확보가 안돼서 고생했지만, 그걸 핑계로 나는 더 적극적으로 눈밭에 굴렀다. 폭신하게 쌓인 자연 ‘눈’ 침대 위에서 실컷 굴러버렸다. 이때만큼은 부피가 커서 거추장스러웠던 스키복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오히려 방수가 철저히 되어 마음대로 굴러도 젖지 않는 스키복이 고마웠다. 


올해 시즌도 거의 막바지에 왔다. 아마도 저번 주에 갔던 곤지암 스키장이 마지막 라이딩이 될 것 같다. 이제 살짝 물 오른 실력이 후퇴하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은 내년에 고생할 내 몸에게 맡겨두고, 내년 시즌에도 안전하게 눈밭을 구르는 보더가 되길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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