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경은 Sep 01. 2022

부모와의 소통

성숙한 마음으로

“엄마, 그때 나한테 왜 그랬어?”
“아빠가 오빠만 예뻐했잖아.”
“나는 항상 참기만 했어. 도대체 언제까지 나만 그래야 해?”
“왜 맨날 나만 뭐라고 하는데?”     


누구의 이야기 같으신가요? 아이들의 투정 같으신가요? 아님 십대 사춘기 아이들의 불만 같으신가요? 아닙니다. 실제 제가 만난 성인들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만난 20대에서 50대까지, 어렸던 그 시절 자신에게 왜 그렇게 상처를 줬는지 자신의 부모에게 이와 같이 묻고 싶다고 말합니다. 왜 그럴까요?      

제가 만난 성인들은 좋은 대학을 나오고, 부러워하는 직장을 다녀도, 가정을 꾸려 자녀를 키우고 있는데도 자꾸만 체기가 있는 것처럼 속이 답답하다고 말합니다. 열심히 살았고 나름 성공도 했는데도 삶이 만족스럽지 못하고 무기력하다고요. 그래서 상담실을 오게 됐다고요. 그들의 이야기를 주욱 듣다 보면 공통되게 나오는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상처받은 어린 시절입니다. 그들은 마치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 듯 어린 시절을 이야기할 때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러워합니다. 마치 상처받았던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말이죠. 그들의 아물지 않은 상처는 현재 진행형이었던 겁니다.      


어린 시절에 어른들에게 자주 들었던 말이 있습니다. “어른 되면 다 해결돼. 별거 아니야.”, “나중에 크면 이해할 거야.”라고 말이죠. 저는 어린 시절에 빨리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른이야말로 마법 같다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정말 그런가요? 진짜 어른 되면 다 해결되던가요? 어른의 눈으로 본 아이들의 세상은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였던 겁니다. 하지만 정작 어른이 된 지금, 가만히 생각해 보세요. 어른이 되니까 만능이 되었나요? 오히려 어른이 된 지금 어린 시절의 결핍을 메꾸고 채우느라 바쁘진 않으신가요? 열심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자꾸 제자리걸음 하는 것처럼 느껴지진 않나요?


심리학에선 이런 걸 미해결과제라고 합니다. 어린 시절 해결하지 못하고 억압된 감정과 결핍이 건강한 매일의 삶을 자꾸 방해하게 된다고요. 그러니 성숙한 어른이 되고 싶은데도 자꾸 어린아이인 채 머물러 있게 되는 겁니다. 미해결과제는 마치 인생에서 브레이크가 걸린 것 같은 느낌을 주니까요.      

미해결과제는 보통 부모와 관련된 경우가 많습니다. 아무래도 가장 많은 갈등이 일어나는 관계니까요. 사랑받고 싶어서, 인정받고 싶어서, 혼나지 않으려고, 비난받지 않으려고. 스스로는 할 수 있는 영역이 매우 적었던 어린 시절의 막강 파워는 부모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어린아이에게는 부모가 최고 권위자였고, 의식주를 쥐고 있으니 생존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절대 파워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니 부모 앞에서 아이가 무력해지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왜 성인이 된 지금도 여전히 부모는 절대 파워일까요? 단지 부모라서 일까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같은 이야기를 해도 남이 이야기하는 건 상처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가 한다면 어떨까요? 속이 상하고, 억울해서 눈물이 날 겁니다. 왜 그럴까요? 외적으로는 성장했으나 내면은 성숙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미성숙한 어린아이인 채 살고 있으니 여전히 그의 인생의 절대권자는 부모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부모의 말 한마디에 좌지우지할 수밖에 없었던 겁니다. 지금 괴로운 게 다 부모탓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어릴 적 부모가 자신의 연약함을 돌봐주었더라면 더없이 좋았겠지만, 불행히도 그들 역시 아파서 내면의 어린 자신을 돌보지 못했을 수 있습니다. 그들도 미성숙한 채 외적으로만 어른이고 부모 역할을 했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러니 지금의 자신과 그때의 부모는 어쩌면 동병상련일 수도 있습니다. 이제 와서 부모에게 사과를 받는다고 자신의 상처가 치유될까요? 아닙니다. 더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궁금하신가요?


그 상처는 ‘어른이 된 자신’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무슨 말인가 싶으시죠? 좀 더 자세히 이야기하겠습니다. 이제 자신은 사회적으로 유능하고 부모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어엿한 성인이 되었다는 걸 잊으면 안 됩니다. 이게 핵심 포인트입니다.


‘성인이 된 내’가 여전히 ‘상처받은 어린이인 채인 나’를 돌보는 겁니다.


부모가 필요했던 그 시절의 아이가 아닌 어른이 된 자신이 말이죠. 어린 시절 자신이 받은 상처이니 누구보다 더 잘 알 겁니다. 그러니 구석구석 더 세심하게 자신을 돌볼 수 있습니다. 이사할 때를 떠올려 보세요. 포장이사가 편하지만 결국은 자신의 생활패턴에 맞게 몇 날 며칠 물건을 재배치해야 진짜 편하게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을 말이죠. 마찬가지라고 보면 됩니다. 오래 묵힌 상처는 자신이 가장 잘 알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지금껏 쌓아 올린 자신의 유능함과 성공을 자기 자신을 돌보는 데 사용한다면, 누가 해도 더 베스트일 수는 없지 않을까요? 이제껏 타인을 위해 사용한 최선의 열심과 유능함을 자신에게 사용해 보세요. 그럼 부모의 대한 원망, 억울함, 화가 더 이상 독이 되지 않게 될 겁니다. 그런 다음 부모와 대화해 보세요. 성숙한 성인 대 성인으로 말이죠. 그러면 건강한 관계가 될 겁니다. 상처받았던 어린 시절 그대로의 미성숙한 자신은 부모와 건강한 대화를 할 수 없다는 걸 잊지 마세요. 건강한 어른의 대화를 하는 자신을 발견해 보세요.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울 거라고 보증합니다.


처음에 나열한 원망의 말 기억하시나요? 미성숙한 내면의 어린아이가 화가 나서 뱉어냈던 말과 성숙한 어른이 되어서 나누는 말을 비교해 보세요. 확실한 차이를 아시게 될 겁니다.  

   


A씨 : “엄마, 그때 나 좀 잘했다고 좀 많이 말해주지. 그럼 지금보다 좀 낫지 않았을까?”

엄마 : “지금 네가 어때서. 지금도 충분히 훌륭해.”

A씨 : “그래? 나 좀 괜찮은 사람인가?”

엄마 : “왜? 누가 뭐라는 사람 있어? 데려와. 웃기는 사람이네. 너만큼만 하라고 해.”

A씨 : “뭐야~ 엄마도 어렸을 때는 나보고 왜 그렇게 너만 생각하냐고 했잖아.”

엄마 : “그야. 잘한다고 하면 기고만장해질까 봐 그랬지.”

A씨 : “절대 잘난 척 안 할 테니까. 이제 잘한다고 팍팍 말해줘.” (웃음)





---------------------------------------------------------------------------------------------------------------


*2022 9월호 <씨튼가족> 간행물 - 通通한 이야기로 통시리즈에 게재한 저의 글입니다.

이곳에도 공유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배우자와 소통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